산과바다
李白詩(가나다순) - 바로가기
* 古風 五十九首 - 바로가기
이백(李白 701~762)
*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青蓮居士), 적선인(謫仙人)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와 함께 ‘이두(李杜)’라 불렸고, 이백은 ‘시선(詩仙)’이라 불렸다. 그 외에 기경인(騎鯨人), 적선인(謫仙人) 또는 벼슬이름을 따서 이한림(李翰林)이라고도 한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 이백은 성당(盛唐) 때 농서(隴西) 성기(成紀, 지금의 간쑤(甘肅)성 티엔수이(天水)) 사람으로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四川)성인 촉나라의 창명현(彰明縣) 또는 안서도호부(安徐都護府) 소속의 쇄엽성(碎葉城)에서 태어났다. 또한 중종 신룡(神龍) 초에 촉의 검남도(劍南道)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 청련향(靑蓮鄕)으로 옮겨 산둥(山東)에서 살았기 때문에 산둥 사람이라고도 전해진다.
1. 방랑을 거듭했던 청년기
그의 선조는 수나라 말에 서역에서 왔다고 한다. 그의 집은 간쑤성 농서현에 위치했고,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아시아에서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남성적이며 용감한 것을 좋아한 인물로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했고, 25세에 촉 지방에서 나와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유랑생활을 하며 강남(江南) 지역을 여행하였고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람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도교를 수양하기도 해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25살 이후에는 촉나라를 떠나 장강을 따라서 강남과 산둥, 산시(山西) 등지를 떠돌며 한평생을 보낸 인물로 안릉 남릉(南陵) 동로(東魯-지금의 산둥성 일대)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를 했었고 유람 생활을 많이 해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2. 벼슬과 궁정생활
현종 천보(天寶) 원년(742년)에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으로 와 하지장을 만났는데, 하지장은 이백 시의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인 느낌과 주관적인 정감을 즉흥적으로 청신하고 화려한 시구에 담아내는 것을 보고 그를 적선인이라 칭했다. 하지장의 인정을 받은 이백은 오균 등의 추천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아 자신의 재능을 정치적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랐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744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그가 맡은 임무가 단지 포고문 초안을 마련하거나 한낱 궁정 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를 지어 올리며 임금의 치적을 칭송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이백이 궁정 시인일 때 현종과 양귀비의 연회장에서 지은 시이다. 이로 인해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에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결국 이백은 어지러운 조정 분위기와 궁정 시인으로서의 처지에 답답함을 느끼고 하지장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으며 장안의 한량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술을 몹시 좋아한 이백은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3. 다시 방랑의 길로
이백은 정치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제멋대로인 태도 때문에 현종의 충신 환관 고역사의 미움을 받고 권문귀족들의 모함을 받아 1년 만에 궁정을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장안을 떠난 그는 다시 긴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이백은 안사의 난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십여 년간, 동쪽으로는 허난성 뤄양(洛陽)을 지나 노(魯) 지방까지, 남쪽으로 오월(吳越) 지방까지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천보(天寶) 3년(744년) 뤄양에서 두보를 만났고 두보와 석문(石門)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했고 더 남하하여 광릉, 금릉(金陵, 장쑤성 난징(南京)시에서 노닐었고 다시 회계를 찾았다. 허난성 카이펑(開封)에서는 고적과 우정을 나누었다. 후에 산둥 지난(濟南)의 도관(道觀) 자극궁(紫極宮)에 들어가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해 도사(道士)가 되기도 했다.
4. 유배 그리고 죽음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현종이 장안을 버리고 촉으로 피신했고 결국 그의 아들 이형이 왕위에 올라 당 숙종이 되었다. 이때 이백은 동남부에 있었는데, 그곳은 지리적으로 전쟁의 중심부로부터 거리가 있어 안전할 수도 있었으나, 새로 즉위한 숙종의 동생 영왕(永王) 이린(李璘)이 장강 남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이백을 그의 막료로 발탁하였고, 이로 인해 56세였던 이백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왕은 숙종과 대립하다 싸움에서 패했고, 결국 거사는 역모로 간주되어 이백 역시 연루되어 심양(尋陽, 지금의 장시(江西)성 주장(九江)시)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 지금의 구이저우(貴州)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으나 삼협(三峽, 양쯔강 상류 협곡) 부근까지 왔을 때 곽자의 등 술 친구, 시 친구들의 도움으로 759년, 사면되어 강남으로 돌아왔다.
말년이 되어 그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고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61세에 안후이(安徽)성 당도(當塗)의 현령이었던 종숙 이양빙에게 의탁해 살며 빈객으로 있으면서 얼마 뒤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강 채석기(採石磯)에서 장강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동정호로 뛰어들어 익사했다고도 한다.
5. 이백의 시와 평가
이백은 젊어서부터 도교에 심취하여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는데 그의 시가 보여주는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고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했다. 이백은 두보와는 크게 달랐는데,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비해,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해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이백은 고시(古詩)와 절구(絶句)를 특기로 했다. 그의 절구는 ‘신품(神品)’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詩才)는 천래(天來)의 재, 즉 ‘천재(天才)’라고 했다.
당시(唐詩)를 중국 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백의 시는 그 꽃 중의 꽃이라고 평가받는다. 일생 동안 가끔 불우한 처지를 당한 적도 있어 시 작품이 퇴폐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는데 중국에서 굴원 이후로 가장 걸출한 낭만주의 시인으로 꼽히고,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1천 여 편에 달하는 시문이 현존한다.
청나라 때에 출간된 『전당시』에 수록된 시의 수가 약 5만 수이고 시인 수가 2천2백여 명인 것을 생각하면 수량만으로도 이백의 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최고의 시문집은 송대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 소사빈(蕭士驞)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이백의 시상은 협기(俠氣)와 신선과 술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작품으로 <정야사>, <행로난(行路難)>, <장진주>, <월하독작> 등이 『이태백집(李太白集)』에 수록되어 있다.
*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랐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742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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