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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詩仙 李白 詩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 이백(李白)

by 산산바다 2020.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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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 이백(李白)

       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보내며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 친구는 황학루 서편에서 작별을 고하고

煙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 춘 삼월 꽃피는 시절에 양주로 내려간다네.

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 외로운 돛단배 멀어져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

唯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 오직 장강만 하늘과 맞닿아 흘러가네.

 

 

* 이백은 20대 후반에 12세 연상인 맹호연(689 - 740)과 교분을 맺었다. 이백은 739년 황학루에서 맹호연을 만났는데 맹호연이 광릉으로 떠나려던 참이었고, 이 시를 지어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고 한다.

* 황학루(黃鶴樓)는 악양의 악양루(岳陽樓) 남창의 등왕각(藤王閣)과 함께 강남 3대 명루로 꼽힌다. 우한(武漢)에서 가까운 장강 가에 세워진 누각으로, 각 층마다 보이는 풍광이 다르며 꼭대기에서는 장강을 가장 잘 조명할 수 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황학루는 삼국시대 오()의 손권이 유비와의 싸움에 대비해서 223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원래 3층 건물이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퇴락하여 증개축을 거듭한 것으로, 지금의 황학루는 1985년에 재건한 철근 콘크리트의 5층 건물로 높이가 51m나 되며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된 최신식 누각이다.

황학루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나라 때 신씨라는 사람이 경치 좋은 이곳에 주막을 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노인(王子安)이 찾아와 술을 청하기에 내다주었더니 여러 잔을 마시고도 돈을 내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그 후에도 노인은 가끔씩 와서는 돈도 내지 않고 술만 마셨고 후덕한 주모는 노인을 잘 대접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귤껍질로 벽에다 학을 그려놓고는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면 학이 춤을 출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그동안의 술값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후로 사람들이 모이는 술자리마다 노래를 부르면 벽에 그려진 학이 나와 춤을 추었고,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술을 마시는 바람에 주인은 큰 부자가 된다. 그런데, 10년 후에 다시 나타난 노인은 술을 대접하려 하자 필요 없다면서 자기가 그렸던 황학을 타고 피리를 불면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는데, 그 후 그 자리에다 정자를 짓고 황학루라 불렀다고 한다.

 

* 황학루는 중국 역대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그 천하절경을 노래했는데, 역대 명사로는 최호(崔顥),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가도(賈島), 육유(陸遊), 등이 문예를 뽐냈으며, 최호의 시 '황학루(黃鶴樓)'와 이백의 시 '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보내며(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가 걸려 있다.

 

이백(李白, 701~762 盛糖)이 천하절경이라는 황학루(黃鶴樓)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멋진 풍광에 취해 한수 읊으려는데, 바로 옆에 최호(崔顥, 704~754)가 지은 시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읽어 보니 천하의 절창이라 크게 낙담하고 다시는 붓을 들지 않는다 말했다는 믿기지 않는 일화가 있습니다. 실제로 황학루 부근에 ()을 버렸다() 의미의 '擱筆亭(각필정)' 이란 정자도 있다.

黃鶴樓

 

 

황학루(黃鶴樓)/登黃鶴樓(등황학루) - 崔顥(최호)

황학루에 올라

 

昔人已乘黃鶴去 (석인이승황학거) : 옛사람 이미 황학 타고 떠났으니

此地空餘黃鶴樓 (차지공여황학루) : 이곳에는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아있네

黃鶴一去不復返 (황학일거불복반) : 황학이 한 번 떠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白雲千載空悠悠 (백운천재공유유) : 흰 구름만 천 년 동안 부질없이 흘러가네.

晴川歷歷漢陽樹 (청천력력한양수) : 한양 땅 나무는 맑은 내에 뚜렷하고

芳草萋萋鸚鵡洲 (방초처처앵무주) : 앵무섬에 방초는 무성하구나.

日暮鄕關何處是 (일모향관하처시) : 해 저무는데 고향은 어느 곳인가

煙波江上使人愁 (연파강상사인수) : 물안개 핀 강가에서 수심에 잠기네.

 

* 당나라 시인의 칠언율시 가운데, 최호의 〈황학루〉 시를 가장 으뜸으 꼽는다.

황학루와 악양루는 강호의 명승지를 나란히 점하고 있다. 杜小陵(두소릉:杜甫)孟襄陽(맹호연)登岳陽樓(등악양루)시는 모두 강호의 웅장하고 광활한 기세를 발휘한 것들이다. 황학루는 장강(長江)과 한수(漢水)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고 물과 하늘이 드넓어, 누각에 오르는 이들이 매양 이곳에서부터 시상을 떠올리기 쉽다. 만일 최호 역시 강가의 풍경만을 오로지 읊었다면, 아마도 두보나 맹호연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호는 유독 황학루세 글자에서 착상을 하며, 1·2구에서 제목의 글자를 짚어내어 황학은 떠나고 빈 누각만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언뜻 보면 마치 평담하게 직서(直敍)한 것 같지만 그 뜻은 마치 신선이 학을 타는 것과 같아, 그 일은 허무함에 속하되 직언하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3구에서 바로 이어서 황학이 이미 가버리고 난 후 다시 돌아올 가망이 없다고 했으니, 마치 長恨歌(장한가)에서 入地昇天(입지승천)’이라 했던 것처럼 아득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각은 신선 때문에 이름을 얻었으나, 신선은 가고 없어 누대가 비었으니 남아 있는 것이라곤 하늘 끝의 흰 구름이어서 천년 동안 유유히 흘러갈 뿐이다.

 

* 황학루(黃鶴樓)는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 성 우한 시의 양쯔 강 강변에 있는 유명한 역사적 누각으로 악양루, 등왕각과 함께 중국 강남 삼대명원의 하나로 손꼽힌다.

황학루에 관련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왕자안(王子安)이라는 선인이 학을 타고 내려왔는데, 이를 기념해서 황학루를 만들었다는 것과 비문의(費文禕)가 선인이 된 이후 황학을 타고 이곳에 내려와 종종 머물렀다는 전설 등이 있다.

황학루는 중국 역대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그 천하절경을 노래했다. 역대 명사로는 최호(崔顥),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가도(賈島), 육유(陸遊), 양신(楊慎), 장거정(張居正) 등이 문예를 뽐냈으며, 그 중 8세기의 유명한 시인 최호의 시 등이 걸려 있다. <위키백과>

* 黃鶴(황학) : 全唐詩(전당시)에는 본래 白雲(백운)’으로 되어 있다.

* 悠悠(유유) : 먼 곳에서 바람이 이는 가운데 떠다니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 歷歷(역역) : 분명한 모습이다.

* 漢陽(한양) : 무창(武昌)의 서북쪽에 있으며, 황학루와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인다.

* 萋萋(처처) : 많고 무성한 모양이다.

* 鸚鵡洲(앵무주) : 황학루의 동북쪽 長江 가운데에 있었던 섬이다.

* 鄕關(향관) : 시인의 고향을 말한다.

* 앵무주(鸚鵡洲) : 後漢禰衡(예형)은 자가 正平이니 재주가 있어 기개를 숭상하며 강하고 오만하였다. 공융(孔融), 양수(楊修)와 친하였는데, 공융이 조조(曹操)에게 천거하자 조조는 기뻐하여 문지기에게 명하여 손님이 오면 곧 통지하게 하였다. 예형이 마침내 큰 영문(營門)에 앉아서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크게 꾸짖으니, 관리가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조조는 예형은 유자(孺子)이니 내가 그를 죽이는 것은 참새와 쥐를 죽이는 것과 같을 뿐이다. 이 사람은 평소에 헛된 명성이 있으니, 그를 죽이면 원근에서 장차 나더러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유표(劉表)에게 보내었다. 예형이 다시 오만하고 업신여기자 유표는 그를 용납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강릉태수인 황조(黃祖)에게 보내니, 이때 나이가 36세였다. 황조의 장자인 사()가 손님들을 크게 모아 잔치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앵무를 올리자, 사는 술잔을 들고 예형에게 이르기를 선생이 시를 지어서 아름다운 손님들을 즐겁게 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예형이 붓을 잡고 글을 지었는데 점획을 하나도 더하지 않았다. 뒤에 또 예형이 말을 불손하게 하여 황조를 꾸짖자, 황조가 죽여서 사주(四洲)에 장례하니 후인들이 이로 인하여 이곳을 앵무주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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