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가거온천궁후증양산인(駕去溫泉宮後贈楊山人) - 이백(李白)
황가(皇駕)를 수행하여 온천궁(溫泉宮)에서 돌아온 후 양산인에게
少年落魄楚漢間(소년낙백초한간) : 젊은 날 실의에 빠져 한수 유역 떠돌 때
風塵蕭瑟多苦顔(풍진소슬다고안) : 풍진 세상 냉대 속에 얼굴 펼 날 없었고
自言管葛竟誰許(자언관갈경수허) : 관중과 공명 자처해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
長吁莫錯還閉關(장우막착환폐관) : 탄식하며 집에 박혀 시나 짓고 있었네.
一朝君王垂拂拭(일조군왕수불식) :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임금님의 은총 받고
剖心輸丹雪胸臆(부심수단설흉억) : 가슴에 담아둔 충정으로 마음을 씻어낸 뒤
忽蒙白日回景光(홀몽백일회경광) : 갑작스럽게 임금님의 햇살 같은 빛을 받아
直上靑雲生羽翼(직상청운생우익) : 날개 돋은 듯 청운 위로 날아오를 수 있었네
幸陪鸞輦出鴻都(행배난연출홍도) : 임금님 탄 가마 모시고 홍도문을 나설 때
身騎飛龍天馬駒(신기비룡천마구) : 위풍당당 궁에서 기른 좋은 말 위에 앉았더니
王公大人借顔色(왕공대인차안색) : 왕공을 비롯한 귀인들이 웃는 낯으로 대해주고
金璋紫綬來相趨(금장자수내상추) : 동인자수(銅印紫綬) 대관들도 서로 사귀자 달려들어
當時結交何紛紛(당시결교하분분) : 그 당시에 만났던 사람들 너무나도 많았지만
片言都合惟有君(편언도합유유군) : 그 가운데 그대 한 사람 나와 뜻이 맞았으니
待吾盡節報明主(대오진절보명주) : 밝으신 임금님 은총 모두 갚아드린 뒤에
然後相携臥白雲(연후상휴와백운) : 남산으로 들어가 그대와 함께 흰 구름 아래 누우리라
* 溫泉(온천) : 온천궁(溫泉宮). 천보(天寶) 6년(747)에 화청궁(華淸宮)으로 개명했는데, 현재의 산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縣) 남쪽 여산(驪山) 위에 있었다. ‘山人’은 산림에 은거하는 은사(隱士)를 가리키고, ‘駕’는 황제가 타는 수레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황제’의 뜻으로 새겨 읽었다.
* 落魄(낙백) : (뜻을 얻지 못해) 실의에 빠지다. 곤궁해지다. ‘楚漢間’은 옛날 초나라 땅에 속하는 후베이(湖北)의 한수(漢水) 유역 일대를 가리킨다.
* 風塵蕭瑟(풍진소슬) : 어지러운 세상에 쓸쓸히 타향을 떠도는 것을 가리킨다.
* 管葛(관갈): 춘추시대 때 제환공(齊桓公)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한 관중(管仲)과 삼국시대 때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세운 제갈량(諸葛亮)을 말한 것이다. ‘許’는 인가하다.
* 長吁(장우) : 길게 탄식하다. ‘莫錯’은 적막하고 쓸쓸한 것을 가리키고 ‘閉關’은 문을 닫아두는 것을 가리킨다.
* 垂(수) : 총애(寵愛)하다. 수청(垂靑), 즉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을 가리킨다. 특별히 애호하다.
* 剖心(부심) : 성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丹’은 ‘赤心’과 같다. ‘輸’는 ‘送’과 같고 ‘雪’은 ‘洗’와 같다.
* 忽蒙白日回景光(홀몽백일회경광) : 갑작스럽게 황제의 은총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 ‘蒙’은 ‘受’와 같다. ‘白日’은 황제를 가리키고, ‘回’는 반조(返照)를 가리킨다.
* 直上靑雲生羽翼(직상청운생우익) : 날개가 돋아 구름까지 바로 올라갔을 만큼 출세가 빨랐던 것을 가리킨다.
* 幸陪鸞輦出鴻都(행배난연출홍도) : 한림원(翰林院)을 나서 영광스럽게 황제를 수행한 것을 가리킨다. ‘鸞輦’은 황제가 타는 수레를 가리킨다. ‘鴻都’는 동한(東漢) 때 문사(文士)들이 모이던 궁정 안의 홍도문(鴻都門)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한림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새겨 읽었다.
* 身騎飛龍天馬駒(신기비룡천마구) : 궁정 안 마구간에서 기르던 준마를 타는 것을 가리킨다. 당나라 때 궁정 안에 여섯 개의 마구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말을 기르던 마구간의 이름이 비룡구(飛龍廐)였다. ‘天馬’는 서역(西域)의 대완국(大宛國) 산 말들을 가리킨다. 당나라 제도에서는 한림학사가 되어 한림원에 들어가면 궁정 안 마구간에서 기르던 장차마(長借馬)라 불리는 말을 한 필 하사하였다.
* 王公大人借顔色(왕공대인차안색) : 왕공으로 불리는 귀족들이 웃는 낯빛으로 서로 맞아주는 것을 가리킨다.
* 金璋紫綬來相趨(금장자수내상추) : 구리로 만든 동인(銅印)과 자줏빛 인끈(印綬)을 늘인 고위관리들이 서로 달려와 이백 자신과 교유하려 했던 것을 말한 것이다. 당시에는 대관大官만이 자줏빛 인끈을 쓸 수 있었다.
천보天寶 2년(743) 겨울, 당시 한림학사였던 이백이 현종唐玄宗을 수행하여 여산에 있는 온천궁을 다녀온 뒤에 양산인에게 지어 보낸 것으로, 시기는 천보 3년(744) 3월, 짧은 한림학사로서의 삶을 끝내고 궁을 나온 이후일 것으로 보인다.
* 스물여섯 늦은 나이에 고향 촉蜀을 떠난 이백은 호북湖北의 안륙 安陸을 중심으로 각지를 유람하며 ‘제후들을 두루 찾아다니고 경상들을 만났으나(遍干諸侯, 歷抵卿相)(「與韓荆州書」)’ 추천을 받아 조정으로 들어가려던 그의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옥진공주(玉眞公主)와 하지장(賀知章)의 입을 맞춘 듯한 칭찬을 들은 현종(玄宗)이 이백을 만나자마자 마음에 들어 한림학사로 등용했는데, 그런 데는 바깥세상의 일들에 대해 묻는 현종 앞에서 유람 중 마음속에서 숙성된 생각들을 거침없이 토해낸 이백의 태도에도 매력을 느꼈겠지만 그런 이백을 등용함으로써 자신을 개명한 군주로 보이고 싶은 현종의 바람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후 현종은 궁중연회나 성밖 순유巡遊 때마다 이백을 수행하게 했는데, 이백은 이를 자신에 대한 현종의 예우(禮遇)라 생각하면서 관중과 안영 같은 담론을 펴고(申管晏之談) 제왕을 위한 계책으로 왕을 도와서(謀帝王之術)(「代壽山答孟少府移山答」) 백성들을 구제하는(欲濟蒼生)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호기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협의 기질이 강했던 이백이 처세에 능한 정객들이 모여 있는 궁중에서 배겨나기가 애초부터 쉬운 일일 수 없었을 것이고, 이 시에서 보듯 이백은 궁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벌써 마음에 맞는 이와 함께하는 산림 속에서의 삶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이백이란 사람은 애초부터 ‘順’이나 ‘從’과 어울릴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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