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문왕창령좌천룡표요유차기(聞王昌齡左遷龍標遙有此寄) - 이백(李白)
왕창령이 용표로 좌천되었다는 말을 듣고 멀리서 이시를 지어 보내다
楊州花落子規啼(양주화낙자규제) : 양주는 꽃이 지고 뻐꾸기 우짖는데
聞道龍標過五溪(문도룡표과오계) : 듣자하니 용표가 오계를 건너간다 하네.
我寄愁心與明月(아기수심여명월) : 근심스런 내 마음 저 밝은 달에게 부치노니
隨君直到夜郎西(수군직도야낭서) : 그대 따라 야랑의 서쪽에 가겠네.
* 王昌齡 : [698-756] 성당(盛唐)의 저명한 시인으로 자는 소백(少伯), 강녕(江寧) 출신이라 사람들이 왕강녕(王江寧)이라고도 불렀다. 현종(玄宗) 개원(開元) 15년(727)에 진사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 그의 시는 고적(高適), 왕지환(王之渙)과 이름을 나란히 하며 변새시(邊塞詩)를 잘 썼다. 훗날 용표(龍標)(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현黔陽縣)로 좌천된 까닭에 사람들이 왕용표(王龍標)라고도 불렀다.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록산이 군사를 일으키자 고향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곳 자사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살해되었다. 그때 나이 58세였다.
* 龍標(용표) : 지명. 무주(巫州)에 속한 현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서부 검양현(黔陽縣). 여기서는 왕창령을 가리킨다. 왕창령이 일찍이 강녕승(江寧丞)을 지냈고 또 당시 용표위(龍標尉)로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왕강녕(王江寧) 또는 왕용표(王龍標)라고불렀다.
* 左遷(좌천) : 직위가 강등 되는 것을 가리킨다. 안사고(顔師古)가 《한서漢書∙주창전周昌傳》에 나오는 ‘좌천’이란 말에 주를 붙인 것을 보면 “是時尊右卑左, 故謂貶秩位爲左遷(당시에는 오른쪽을 높이고 왼쪽을 낮게 여겼기 때문에 직위가 강등되고 봉록이 깎이는 것을 좌천이라고 하였다).”이라고 했다.
* 揚州(양주) : 지명. 양주는 중국 역사상 서한(西漢), 수당(隋唐), 청조(淸朝) 등 모두 세 차례 전성기를 맞았던 곳이다. 당대에는 대외교류의 문호 역할을 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였으며, 농업과 상업, 수공업이 모두 발달하여 ‘강회지간부갑천하(江淮之間富甲天下)(장강과 회하 일대에서 으뜸가는 부를 이룬 곳)’라 하여 동남부 제일의 도시로 꼽혔으며, ‘양일익이(揚一益二)(양주가 첫 번째고 익주는 두 번째다 – 익주(益州)는 지금의 청두(成都)를 이른다)’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양주화락(揚州花落)’ 대신 ‘양화낙진(楊花落盡)’으로 쓴 자료도 있다. 당시 이백이 양주를 유람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다.
* 子規(자규) : 두견새. 뻐꾸기.
* 聞道(문도) : 듣자니
* 五溪(오계) :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五溪謂酉辰巫武陵等五溪也(오계는 유, 진, 무, 무, 능 등 다섯 계곡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서부와 귀주성貴州省 동부 일대를 가리킨다. 용표龍標는 귀주에 가까워 당대에는 퍽이나 구석진 곳으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 夜郞(야랑) : 지명. 당대 진주珍州에 속하던 곳(지금의 귀주성貴州省 동재현桐梓縣 동쪽)이었다. 진주는《통전通典》에서 “古蠻夷之地, 大唐貞觀七年置珍州或爲夜郞郡(고대에는 오랑캐의 땅이던 것을 대당정관 7년 진주를 설치하고 야랑군 이라고도 하였다).”이라하였다.
* 隨君(수군) : 그대 따라 ‘수풍(隨風)’(바람 따라)으로 적고 있는 자료도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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