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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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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白 詩(이백 시) HOME

by 산산바다 2020. 10. 24.

산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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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白詩(가나다순) - 바로가기

1 가거온천궁후증양산인(駕去溫泉宮後贈楊山人) 181 수중초(樹中草)
2 감단재인가위시양졸부(邯鄲才人嫁為廝養卒婦) 182 수화정(秀華亭)
3 강상기원육림종(江上寄元六林宗) 183 숙무산하(宿巫山下)
4 강상망환공산(江上望皖公山) 184 숙오송산하순온가(宿五松山下荀媼家)
5 강상유(江上遊) 185 숙청계주인(宿清溪主人)
6 강상음(江上吟) 186 승가가(僧伽歌)
7 강상추회(江上秋懷) 187 시종의춘원봉조부룡지류색초청청신앵백전가(侍從宜春苑奉詔賦龍池柳色初靑聽新鶯百囀歌)
8 강하행(江夏行) 188 심산승불우작(尋山僧不遇作)
9 강행기원(江行寄遠) 189 심옹존사은거(尋雍尊師隱居)
10 객중행(客中行) 190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
11 거부사(去婦詞) 191 아미산월가송촉승안입중경(峨眉山月歌送蜀僧晏入中京)
12 견경조위참군량이동양2(見京兆韋參軍量移東陽二首) 192 안육백조산도화암기유시어관(安陸白兆山桃花巖奇劉侍御綰)
13 결객소년장행(結客少年場行) 193 앵무주(鸚鵡洲)
14 결말자(結襪子) 194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
15 경천송족제순(涇川送族弟錞) 195 야박황산문은십사오음(夜泊黃山聞殷十四吳吟)
16 경하비이교회장자방(經下邳圯橋懷張子房) 196 야사(夜思)/정야사(靜夜思)
17 계전추(桂殿秋) 197 야숙산사(夜宿山寺)
18 고객행(估客行)/估客樂(고객락) 198 야전황작행(野田黃雀行)
19 고구려(高句驪) 199 야좌음(夜坐吟)
20 고랑월행(古朗月行) 200 야하정로정(夜下征虜亭)
21 고랑월행(古朗月行) 201 양반아2(楊叛兒二首)
22 고어과하읍(枯魚過河泣) 202 양보음(梁甫吟)
23 고유소사항(古有所思行) 203 양양가(襄陽歌)
24 고의(古意) 204 양원음(梁園吟)
25 의고12(擬古十二首) 205 양춘가(陽春歌)
26 곡선성선양기수(哭宣城善釀紀叟)/(題戴老酒店) 206 어오송산증남릉상찬부(於五松山贈南陵常贊府)
27 곡조경형(哭晁卿衡) 207 억동산2(憶東山二首)
28 공무도하(公無渡河) 208 예장행(豫章行)
29 공성작(空城雀) 209 월녀사5(越女詞五首)
30 공후요(箜篌謠) 210 증숭산초련사(贈嵩山焦煉師)
31 과팽려호(過彭蠡湖) 211 업중증왕대(鄴中贈王大)
32 관방백응2(觀放白鷹二首) 212 여강주인부(廬江主人婦)
33 관산월(關山月) 213 여사랑중흠청황학루상취적(與史郎中欽聽黃鶴樓上吹笛)
34 관원단구좌무산병풍(觀元丹丘坐巫山屏風) 214 여산요기노시어허주(廬山謠寄盧侍御虛舟)
35 괘석강상대월유회(挂席江上待月有懷) 215 역양장사근장군명사제가(歷陽壯士勤將軍名思齊歌)
36 구별리(久別離) 216 영왕동순가11(永王東巡歌十一首)
37 구월십일즉사(九月十日即事) 217 오로봉(五老峰)
38 구일(九日) 218 오서곡(烏棲曲)
39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 219 오송산송은숙(五松山送殷淑)
40 구호오왕미인반취(口號吳王美人半醉) 220 오야제(烏夜啼)
41 구호증징군홍(口號贈徵君鴻) 221 옥계원(玉階怨)
42 국가행2(鞠歌行二首) 222 옥진공주별관고우증위위장경2(玉真公主別館苦雨贈衛尉張卿二首)
43 군도곡(君道曲) 223 옥진선인사(玉眞仙人詞)
44 군마황(君馬黃) 224 옥호음(玉壺吟)
45 군자유소사행(君子有所思行) 225 왕소군(王昭君)
46 군행(軍行) 226 왕우군(王右軍)
47 궁중행락사8(宮中行樂詞八首) 227 우인회숙(友人會宿)
48 금광섬요황학루(金光閃耀黃鶴樓) 228 우전채화(于闐採花)
49 금릉성서루월하음(金陵城西樓月下吟) 229 우후망월(雨後望月)
50 금릉송장십일재유동오(金陵送張十一再游東吳) 230 운간월(雲間月)
51 금릉신정(金陵新亭) 231 원가행(怨歌行)
52 금능주사류별(金陵酒肆留別) 232 원단구가(元丹丘歌)
53 금향송위팔지서경(金鄉送韋八之西京) 233 원별리(遠別離)
54 기동로이치자재금릉작(寄東魯二稚子在金陵作) 234 원정(怨情)
55 기상오왕3(寄上吳王三首) 235 원정(怨情)(新人如花雖可寵)
56 기원(寄遠)[十二首] 236 원주학기(袁州學記)
57 낙양맥(洛陽陌) 237 월녀사5(越女詞五首)
58 난초(蘭草) 238 월야강행기최원외종지(月夜江行寄崔員外宗之)
59 남경서회(覽鏡書懷) 239 월야청노자순탄금(月夜聽盧子順彈琴)
60 남도행(南都行) 240 월중람고(越中覽古)
61 남류야랑기내(南流夜郞寄內) 241 월하독작4(月下獨酌四首)
62 남릉서별(南陵敍別)/남릉별아동입경(南陵別兒童入京) 242 유간천(幽澗泉)
63 남분서회(南奔書懷) 243 유동정5(遊洞庭五首)/배족숙형부시랑엽급중서가사인지유동정5(陪族叔刑部侍郎曄及中書賈舍人至游洞庭五首)
64 남산사(南山寺) 244 유소사(有所思)/고유소사행(古有所思行)
65 남헌송(南軒松) 245 유야랑증신판관(流夜郎贈辛判官)
66 내일대란(來日大難) 246 유주호마객가(幽州胡馬客歌)
67 노군동석문송두이보(魯郡東石門送杜二甫) 247 유태산6(遊泰山六首)/(天寶元年四月從故禦道上泰山)
68 노로정(勞勞亭) 248 의고12(擬古十二首)
69 노로정가(勞勞亭歌) 249 일출입행(日出入行)/일출행(日出行)
70 노중도동루취기작(魯中都東樓醉起作) 250 임강왕절사가(臨江王節士歌)
71 녹수곡(淥水曲) 251 임로가(臨路歌)/臨終歌(임종가)
72 단가행(短歌行) 252 입조곡(入朝曲)/(一作鼓吹入朝曲)
73 답호주가엽사마문백시하인(答湖州迦葉司馬問白是何人) 253 자견(自遣)
74 대로주점(戴老酒店)/곡선성선양기수(哭宣城善釀紀叟) 254 자등수(紫藤樹)
75 대미인수경(代美人愁鏡) 255 자류마(紫騮馬)
76 대설헌종형우성재(對雪獻從兄虞城宰) 256 자야사시가(子夜四時歌)
77 대제곡(大堤曲) 257 자야오가(子夜吳歌)
78 대주(對酒) 258 장가행(長歌行)
79 대주문월( 對酒問月) 259 장간행2(長干行二首)
80 대주부지(待酒不至) 260 장문원2(長門怨二首)
81 대주억하감2수병서(對酒憶賀監二首幷序) 261 장상사2(長相思二首)
82 대주행(對酒行) 262 장진주(將進酒)
83 도의편(擣衣篇) 263 적벽가송별(赤壁歌送別)
84 도형문송별(渡荊門送別) 264 전성남(戰城南)
85 독록편(獨漉篇) 265 전원언회(田園言懷)
86 독불견(獨不見) 266 전유준주행2(前有樽酒行二首)
87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 267 절양류(折楊柳)
88 동노문범주2(東魯門泛舟二首) 268 정도호가(丁都護歌)/정독호가(丁督護歌)
89 동무음(東武吟) 269 정전만화개(庭前晚花開)
90 동산음(東山吟) 270 제동계공유거(題東溪公幽居)
91 동해유용부(東海有勇婦) 271 제봉정사(題峰頂寺)
92 두릉절구(杜陵絕句) 272 제원단구산거(題元丹丘山居)
93 등고구이망원(登高丘而望遠) 273 조노유(嘲魯儒)
94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 274 조대(釣臺)
95 등양왕서하산맹씨도원중(登梁王棲霞山孟氏桃園中)/휴기등양왕서하산맹씨도원중(攜妓登梁王棲霞山孟氏桃園中) 275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96 등여산오로봉(登廬山五老峰) 276 조왕력양불긍음주(嘲王歷陽不肯飲酒)
97 등태백(登太白) 277 조춘기왕한양(早春寄王漢陽)
98 망목과산(望木瓜山) 278 주필증독고부마(走筆贈獨孤駙馬)
99 망부산(望夫山) 279 중산유자첩가(中山孺子妾歌)
100 망여산폭포수2(望廬山瀑布水二首) 280 중억(重憶)
101 망여산폭포수2(望廬山瀑布水二首) 281 증곽계응(贈郭季鷹)
102 망월유회(望月有懷) 282 증내(贈內)
103 망천문산(望天門山) 283 증단칠낭(贈段七娘)
104 맥상상(陌上桑) 284 증로사호(贈盧司戶)
105 맥상증미인(陌上贈美人) 285 증맹호연(贈孟浩然)
106 맹호행(猛虎行) 286 증서안의(贈徐安宜)
107 명고가봉전종옹청귀오애산거(鳴皋歌奉餞從翁清歸五崖山居)/河南府陸渾縣有鳴皋山 287 증숭산초련사(贈嵩山焦煉師)
108 명안행(鳴雁行) 288 증왕륜(贈汪倫)
109 목욕자(沐浴子) 289 증전징군소양(贈錢徵君少陽)
110 몽유천모음유별(夢游天姥吟留別) 290 증최사호문곤계(贈崔司戶文昆季)
111 무궁화(無窮花) 291 증최자의(贈崔諮議)
112 문왕창령좌천룡표요유차기(聞王昌齡左遷龍標遙有此寄) 292 증한양보록사2(贈漢陽輔錄事二首)
113 문유거마객행(門有車馬客行) 293 증황산호공구백한(贈黃山胡公求白鷳)
114 발백마(發白馬) 294 증황산호공구백한병서(贈黃山胡公求白鷴并序)
115 방대천산도사불우(訪戴天山道士不遇) 295 진녀권의(秦女卷衣)
116 방도안릉우개환위여조진록림별류증(訪道安陵遇蓋還為餘造真籙臨別留贈) 296 진녀휴행(秦女休行)
117 배족숙형부시랑엽급중서가사인지유동정(陪族叔刑部侍郞曄及中書賈舍人至游洞庭) 297 채련곡(採蓮曲)
118 백구사(白鳩辭) 298 천리사(千里思)
119 백두음2(白頭吟二首) 299 천마가(天馬歌)
120 백로자(白鷺鶿) 300 첩박명(妾薄命)
121 백마편(白馬篇) 301 청계반야문적(清溪半夜聞笛)
122 백비과(白鼻騧) 302 청계행(清溪行)/宣州清溪(선주청계)
123 백운가송유십육귀산(白雲歌送劉十六歸山)/백운가송우인(白雲歌送友人) 303 청촉승준탄금(聽蜀僧浚彈琴)
124 백저사3(白紵辭三首) 304 청평조사3(淸平調詞三首)/청평조(淸平調)
125 백호도(白胡桃) 305 초서가행(草書歌行)
126 백호자가(白毫子歌) 306 초출금문심왕시어불우영벽상앵무(初出金門尋王侍御不遇詠壁上鸚鵡)
127 별내부징3(別內赴徵三首) 307 촉도난(蜀道難)
128 별동림사승(別東林寺僧) 308 추도단수(抽刀斷水)/(宣州謝脁樓餞別校書叔雲)
129 보살만(菩薩蠻) 309 추등선성사조북루(秋登宣城謝脁北樓)
130 봉대곡(鳳臺曲) 310 추등파릉망동정(秋登巴陵望洞庭)
131 봉생편(鳳笙篇) 311 추사(秋思)/억진아(憶秦娥)
132 봉취생곡(鳳吹笙曲)/봉생편송별(鳳笙篇送別) 312 추사2(秋思二首)
133 봉황곡(鳳凰曲) 313 추석서회(秋夕書懷)
134 부득백로사송송사부입삼협(賦得白鷺鷥送宋少府入三峽) 314 추야독좌회고산(秋夜獨坐懷故山)
135 부풍호사가(扶風豪士歌) 315 추일노군요사정상연별두보궐범시어(秋日魯郡堯祠亭上宴別杜補闕范侍御)
136 북상행(北上行) 316 추일연약원섭백발증원륙형림종(秋日鍊藥院鑷白髮贈元六兄林宗)
137 북풍행(北風行) 317 추포가17(秋浦歌十七首)
138 비가행(悲歌行) 318 추풍사(秋風詞) -삼오칠언
139 비룡인2(飛龍引二首) 319 추하형문(秋下荊門)
140 빈가행상신평장사형찬(豳歌行上新平長史兄粲) 320 춘사(春思)
141 사공정(謝公亭) 321 춘야낙성문적(春夜洛城聞笛)
142 사구성하기두보(沙邱城下寄杜甫) 322 춘야연도리원(春夜宴桃李園)
143 사변(思邊) 323 춘원(春怨)
144 산인권주(山人勸酒) 324 춘일귀산기맹호연(春日歸山寄孟浩然)
145 산자고사(山鷓鴣詞) 325 춘일독작2(春日獨酌二首)
146 산중문답(山中問答)/山中答俗人 326 춘일유나부담(春日遊羅敷潭)
147 산중대작(山中對酌) 327 춘일취기언지(春日醉起言志)
148 삼오칠언(三五七言) - 추풍사(秋風詞) 328 춘일행(春日行)
149 상류전행(上留田行) 329 출자계북문행(出自薊北門行)
150 상봉행2(相逢行二首) 330 취후답정십팔이시기여퇴쇄황학루(醉後答丁十八以詩譏余槌碎黃鶴樓)
151 상삼협(上三峽) 331 취후증종생고진(醉後贈從甥高鎮)
152 상운낙(上雲樂) 332 치자반곡사(雉子斑曲辭)/설벽사기고취치자반곡사(設辟邪伎鼓吹雉子斑曲辭)
153 상이옹(上李邕) 333 치조비(雉朝飛)
154 상지회(上之回) 334 태원조추(太原早秋)
155 상황서순남경가10(上皇西巡南京歌十首) 335 파녀사(巴女詞)
156 새상곡(塞上曲) 336 파릉증가사인(巴陵贈賈舍人)
157 새하곡6(塞下曲六首) 337 파릉행송별(灞陵行送別)
158 서악운대가송단구자(西嶽雲臺歌送丹丘子) 338 파주문월(把酒問月)
159 선성견두견화(宣城見杜鵑花) 339 하심양성범팽려기황판관(下尋陽城泛彭蠡寄黃判官)
160 소가행(笑歌行) 340 하일산중(夏日山中)
161 소군원(昭君怨) 341 하종남산과곡사산인숙치주(下終南山過斛斯山人宿置酒)
162 소년자(少年子) 342 행로난삼수(行路難三首)
163 소년행(少年行) 343 행행유차렵편(行行遊且獵篇)
164 소년행이수(少年行二首) 344 협객행(俠客行)
165 소대람고(蘇臺覽古) 345 형주가(荊州歌)
166 소도원(小桃源) 346 호무인(胡無人)
167 소무(蘇武) 347 호안서(胡雁壻)
168 송륙판관왕비파협(送陸判官往琵琶峽) 348 황갈편(黃葛篇)
169 송맹호연지광능(送孟浩然之廣陵) 349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170 송배십팔도남귀숭산이수(送裴十八圖南歸嵩山二首) 350 회선가(懷仙歌)
171 송양산인귀숭산(送楊山人歸嵩山) 351 회해대설증부애(淮海對雪贈傅靄)
172 송우림도장군(送羽林陶將軍) 352 횡강사6(橫江詞六首)
173 송우인(送友人) 353 희증두보(戲贈杜甫)
174 송우인입촉(送友人入蜀) 354 희증정률양(戱贈鄭溧陽)
175 송잠징군귀명고산(送岑徵君歸鳴皋山) 355
176 송장사인지강동(送張舍人之江東) 356
177 송저옹지무창(送儲邕之武昌) 357
178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358
179 송한시어지광덕(送韓侍御之廣德) 359
180 수은명좌견증오운구가(酬殷明佐見贈五雲裘歌)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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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古風 五十九首 - 바로가기

1. 古風 其一 2. 古風 其二 3. 古風 其三 4. 古風 其四 5. 古風 其五
6. 古風 其六 7. 古風 其七 8. 古風 其八 9. 古風 其九 10. 古風 其十
11. 古風 其十一 12. 古風 其十二 13. 古風 其十三 14. 古風 其十四 15. 古風 其十五
16. 古風 其十六 17. 古風 其十七 18. 古風 其十八 19. 古風 其十九 20. 古風 其二十
21. 古風 其二十一 22. 古風 其二十二 23. 古風 其二十三 24. 古風 其二十四 25. 古風 其二十五
26. 古風 其二十六 27. 古風 其二十七 28. 古風 其二十八 29. 古風 其二十九 30. 古風 其三十
31. 古風 其三十一 32. 古風 其三十二 33. 古風 其三十三 34. 古風 其三十四 35. 古風 其三十五
36. 古風 其三十六 37. 古風 其三十七 38. 古風 其三十八 39. 古風 其三十九 40. 古風 其四十
41. 古風 其四十一 42. 古風 其四十二 43. 古風 其四十三 44. 古風 其四十四 45. 古風 其四十五
46. 古風 其四十六 47. 古風 其四十七 48. 古風 其四十八 49. 古風 其四十九 50. 古風 其五十
51. 古風 其五十一 52. 古風 其五十二 53. 古風 其五十三 54. 古風 其五十四 55. 古風 其五十五
56. 古風 其五十六 57. 古風 其五十七 58. 古風 其五十八 59. 古風 其五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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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李白 701~762)

 

*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青蓮居士), 적선인(謫仙人)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와 함께 이두(李杜)’라 불렸고, 이백은 시선(詩仙)’이라 불렸다. 그 외에 기경인(騎鯨人), 적선인(謫仙人) 또는 벼슬이름을 따서 이한림(李翰林)이라고도 한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 이백은 성당(盛唐) 때 농서(隴西) 성기(成紀, 지금의 간쑤(甘肅)성 티엔수이(天水)) 사람으로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四川)성인 촉나라의 창명현(彰明縣) 또는 안서도호부(安徐都護府) 소속의 쇄엽성(碎葉城)에서 태어났다. 또한 중종 신룡(神龍) 초에 촉의 검남도(劍南道)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 청련향(靑蓮鄕)으로 옮겨 산둥(山東)에서 살았기 때문에 산둥 사람이라고도 전해진다.

 

1. 방랑을 거듭했던 청년기

그의 선조는 수나라 말에 서역에서 왔다고 한다. 그의 집은 간쑤성 농서현에 위치했고,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아시아에서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남성적이며 용감한 것을 좋아한 인물로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했고, 25세에 촉 지방에서 나와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유랑생활을 하며 강남(江南) 지역을 여행하였고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람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도교를 수양하기도 해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25살 이후에는 촉나라를 떠나 장강을 따라서 강남과 산둥, 산시(山西) 등지를 떠돌며 한평생을 보낸 인물로 안릉 남릉(南陵) 동로(東魯-지금의 산둥성 일대)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를 했었고 유람 생활을 많이 해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2. 벼슬과 궁정생활

현종 천보(天寶) 원년(742)에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으로 와 하지장을 만났는데, 하지장은 이백 시의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인 느낌과 주관적인 정감을 즉흥적으로 청신하고 화려한 시구에 담아내는 것을 보고 그를 적선인이라 칭했다. 하지장의 인정을 받은 이백은 오균 등의 추천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아 자신의 재능을 정치적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랐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744,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그가 맡은 임무가 단지 포고문 초안을 마련하거나 한낱 궁정 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를 지어 올리며 임금의 치적을 칭송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이백이 궁정 시인일 때 현종과 양귀비의 연회장에서 지은 시이다. 이로 인해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에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결국 이백은 어지러운 조정 분위기와 궁정 시인으로서의 처지에 답답함을 느끼고 하지장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으며 장안의 한량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술을 몹시 좋아한 이백은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3. 다시 방랑의 길로

이백은 정치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제멋대로인 태도 때문에 현종의 충신 환관 고역사의 미움을 받고 권문귀족들의 모함을 받아 1년 만에 궁정을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장안을 떠난 그는 다시 긴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이백은 안사의 난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십여 년간, 동쪽으로는 허난성 뤄양(洛陽)을 지나 노() 지방까지, 남쪽으로 오월(吳越) 지방까지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천보(天寶) 3(744) 뤄양에서 두보를 만났고 두보와 석문(石門)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했고 더 남하하여 광릉, 금릉(金陵, 장쑤성 난징(南京)시에서 노닐었고 다시 회계를 찾았다. 허난성 카이펑(開封)에서는 고적과 우정을 나누었다. 후에 산둥 지난(濟南)의 도관(道觀) 자극궁(紫極宮)에 들어가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해 도사(道士)가 되기도 했다.

 

4. 유배 그리고 죽음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현종이 장안을 버리고 촉으로 피신했고 결국 그의 아들 이형이 왕위에 올라 당 숙종이 되었다. 이때 이백은 동남부에 있었는데, 그곳은 지리적으로 전쟁의 중심부로부터 거리가 있어 안전할 수도 있었으나, 새로 즉위한 숙종의 동생 영왕(永王) 이린(李璘)이 장강 남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이백을 그의 막료로 발탁하였고, 이로 인해 56세였던 이백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왕은 숙종과 대립하다 싸움에서 패했고, 결국 거사는 역모로 간주되어 이백 역시 연루되어 심양(尋陽, 지금의 장시(江西)성 주장(九江))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 지금의 구이저우(貴州)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으나 삼협(三峽, 양쯔강 상류 협곡) 부근까지 왔을 때 곽자의 등 술 친구, 시 친구들의 도움으로 759, 사면되어 강남으로 돌아왔다.

말년이 되어 그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고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61세에 안후이(安徽)성 당도(當塗)의 현령이었던 종숙 이양빙에게 의탁해 살며 빈객으로 있으면서 얼마 뒤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강 채석기(採石磯)에서 장강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동정호로 뛰어들어 익사했다고도 한다.

 

5. 이백의 시와 평가

이백은 젊어서부터 도교에 심취하여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는데 그의 시가 보여주는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고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했다. 이백은 두보와는 크게 달랐는데,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비해,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해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이백은 고시(古詩)와 절구(絶句)를 특기로 했다. 그의 절구는 신품(神品)’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詩才)는 천래(天來)의 재, 천재(天才)’라고 했다.

당시(唐詩)를 중국 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백의 시는 그 꽃 중의 꽃이라고 평가받는다. 일생 동안 가끔 불우한 처지를 당한 적도 있어 시 작품이 퇴폐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는데 중국에서 굴원 이후로 가장 걸출한 낭만주의 시인으로 꼽히고,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1천 여 편에 달하는 시문이 현존한다.

청나라 때에 출간된 전당시에 수록된 시의 수가 약 5만 수이고 시인 수가 22백여 명인 것을 생각하면 수량만으로도 이백의 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최고의 시문집은 송대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 소사빈(蕭士驞)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등이 있다. 이백의 시상은 협기(俠氣)와 신선과 술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작품으로 <정야사>, <행로난(行路難)>, <장진주>, <월하독작> 등이 『이태백집(李太白集)』에 수록되어 있다.

 

*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랐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742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등이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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