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왕유(王維) 詩 바로가기(가나다 순)
* 왕유(왕웨이, 王維, 699년 혹은 701년 ~ 759년)는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당시(唐詩)는 중국 고전문학 최고의 정화로 후세 사람들에게 불후의 고전적 자양을 제공하고 있다. 시불(詩佛) 왕유(王維)는 시선(詩仙) 이백(李白),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함께 당시의 3대 거장으로 꼽히면서도 이(李)ㆍ두(杜)와는 또 다른 시풍으로 그 특유의 매력을 발한다.
* 현존 왕유 시는 고금을 통틀어 최선본(最善本)으로 평가되는 진철민(陳鐵民)의 ≪왕유집교주(王維集校注)≫에 의거해 총 308편 376수로 산정(算定)할 수 있다.
* 초년의 왕유는 적극 진취적인 유가 사상의 소유자였으나 정치적인 실의에 빠지기 시작한 중년 이후에는 불가와 도가적인 경향을 아울러 보이다가 점차 오직 불교에만 극도로 심취하였는데, 이 같은 인생 사상이 그의 창작 정신의 원천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李白과 杜甫가 각각 낭만시와 사회시 창작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면 王維가 당나라 시단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보적인 면모를 보인 것은 바로 자연시의 창작으로, 그는 동진(東晋)의 도연명(陶淵明) 이후 최고의 자연시인으로 평가된다. 송(宋)나라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는 ‘시중유화(詩中有畫)’ㆍ‘화중유시(畫中有詩)’,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말로 산수수묵화의 대가이기도 했던 왕유 시(詩)ㆍ화(畫)의 예술적 경지를 압축 평가함으로써 후세의 절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왕유의 자연시는 역관역은(亦官亦隱 - 몸은 벼슬하고 있으나 마음은 늘 피세 은둔의 정취를 동경하고 추구하는 삶)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지어졌으며 대부분이 은거 생활과 불도(佛道) 사상이 결합된 산물로, 시인의 피세 은둔의 초탈 정신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세속적인 욕망은 일찌감치 떨쳐버리고 오직 한가롭고 편안하기 그지없는 시인의 성정(性情)이 시작 속에서 여실히 표현되고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전원 경물이나 산수 풍광의 묘사 가운데서 절로 풍겨나는 은둔적 정취이다. 이를테면 ≪망천집(輞川集)≫ 중의 <죽리관(竹籬館)>은 그윽한 대숲 속의 탈속적인 정취를 묘사하고 있으니, 세상과 동떨어져 고적(孤寂)함이 감도는 깊은 대숲 속에서 거문고도 타고 휘파람도 불며 살며시 다가와 비춰주는 밝은 달빛과 ‘지음(知音)’의 벗인 양 하나 되어 탈속적인 정취를 즐기는 시인은 이미 ‘해탈’의 경지에 든 듯하다. <산장의 가을 저녁녘(山居秋暝)>은 저녁녘에 한 차례 비가 온 뒤 그윽하고 고아한 산중의 경물을 묘사하였는데, 시정(詩情)과 화의(畫意)가 넘치는 가운데 시인의 고결한 품성과 초탈적 정서가 새롭다. <날씨 갠 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新晴野望)> 역시 비가 막 갠 후 아득한 들판에 펼쳐진 초여름의 전원 경색(景色)과 농경 생활을 묘사하였는데, 전편에 걸쳐 강조되고 있는 소박하고 평화로우면서도 활력 넘치는 전원의 생활과 정취는 세속적인 번뇌에서 벗어난 자적(自適)한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정서가 그대로 배어 있다.
* 왕유의 시적 재능은 자연시 창작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李)ㆍ두(杜)를 능가할 정도였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다방면에 걸쳐 다수의 가작을 남기고 있다. 초년에는 유가적인 인생관에 입각해 매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경향을 보여 종군(從軍), 변새(邊塞), 호협(豪俠)을 노래하거나 입공보국(立功報國)의 기개를 떨쳐 보이는가 하면 객관성이 결여된 인재 등용이나 형평성을 잃은 논공행상을 비롯한 정치적 부패상을 풍자 폭로하였다. 또한 생애 전반을 통해 창작된 증별(贈別)이나 일상생활의 다양한 서정의 시편(詩篇)도 대개 은근하면서도 진솔한 정감의 묘사로 후세에 널리 애송되고 있다. 이를테면 <안서로 출사하는 원이를 송별하며(送元二使安西)>는 송별시의 절창(絶唱)으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인구에 회자된 명작인바, 전편에 걸친 절묘한 정경(情景)의 융합과 강력한 전형성 그리고 애틋한 정감과 풍부한 함축미는 송별시의 전범(典範)으로 손색이 없다.
왕유의 시는 정치적인 실의와 실절(失節), 가정적인 불행을 딛고 한껏 유유자적하는가 하면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시종 따스한 인정을 베푼 시인의 생활 서정으로, 오늘날 현실 생활 속에서 삶의 고뇌와 갈등으로 지친 현대인에게 ‘해탈’의 지혜를 일러주고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 왕유(王維)는 당대(唐代)의 저명한 시인으로 자는 마힐(摩詰)이다. 조상 대대로 기(祈-지금의 산시성(山西省) 기현(祁縣)에서 살았지만, 그는 포주(蒲州-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영제(永濟)로 옮겨 살았고, 만년에는 남전(藍田) 망천(輞川)의 별장에서 살았다. 개원(開元) 9년(721)에 시행된 진사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뒤, 태자중윤(太子中允), 중서사인(中書舍人), 상서우승(尙書右丞) 등을 지내다가 벼슬에 있는 동안 세상을 떴다. 소식(蘇軾)은 시와 그림에서 모두 높은 성취를 보인 그에 대해 ‘味摩詰之詩, 詩中有畫; 觀摩詰之畫, 畫中有詩(마힐의 시를 음미하다 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다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림에서는 인물, 총죽(叢竹), 산수 등에 뛰어났고, 시에서는 당대(唐代) 산수전원파의 대표로 꼽혔는데, 특히 산수시(山水詩)에서 큰 성취를 보여 맹호연(孟浩然)과 함께 ‘왕맹(王孟)’으로 불리며 개원(開元 713~741)과 천보(天寶 742~756) 연간의 최고 시인으로 자리 잡았다. 만년에는 벼슬길에 무심해져 부처를 정성으로 모셨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런 그를 ‘시불(詩佛)’이라 불렀다. 《왕우승집王右丞集》 등을 통해 4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 왕유(王維, 701-761, 일설 699-761)는 한족(漢族)으로, 당조(唐朝) 때 하동(河東) 포주(蒲州)(지금의 산동 운성) 사람이다. …… 당조(唐朝) 때의 유명한 시인이자 화가로서 성당(盛唐) 시기 산수전원시파의 대표적 시인이다. 자(字)는 마힐, 호는 마힐거사, 세칭 ‘왕우승’이었으며, 젊은 시절에 도를 믿었었는데, 나중에 사회의 타격을 받자 철저하게 선화(禪化)되었다. 현존하는 시는 400여 수이며, 대표작으로 《상사(相思)》, 《산거추명(山居秋暝)》 등이 있다. 왕유는 참선(參禪)하여 이치를 깨달았으며, 배움에 엄숙하고 도를 믿었으며, 시, 글씨, 그림 등에 정통하여 맹호연과 함께 ‘王盟’으로 합칭(合稱) 되었다. 소식은 “마힐의 시를 음미해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구나.” 하고 그를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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