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悟道頌

나옹선사(懶翁禪師) 오도송(悟道頌)

by 산산바다 2015. 1. 18.

산과바다

오도송(悟道頌) 모음 HOME

 

 

 

나옹선사 오도송(懶翁禪師 悟道頌) (나옹선사 1320-1376)

 

무문(無聞)

眼耳元來自沒踪(안이원래자몰종) 눈과 귀는 원래 자취가 없거늘

箇中誰得悟圓通(개중수득오원통) 누가 그 가운데서 원만히 깨칠 것인가

空非相處飜身轉(공비상처번신전) 텅 비어 형상 없는 곳에서 몸을 굴리면

犬吠驢鳴盡豁通(견폐노명진활통) 개 짖음과 나귀 울음이 모두 도()를 깨침이네.

 

* 용맹정진 4년 왕사께서 29세 때 겨울, 눈이 쌓인 뜰을 거닐다가 때 이른 매화꽃(梅花)을 보고 대오(大悟)하셨다.

 

 

대원(大圓)

包塞虛空絶影形(포색허공절영형) 허공을 꽉 싸안은 그 모습 뛰어나

能含萬像體常淸(능함만상체상청) 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몸은 항상 깨끗하다.

目前眞景誰能量(목전진경수능량) 앞의 참 경개(景槪)를 누가 능히 헤아리니

雲卷靑天秋月明(운권청천추월명) 눈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 달은 밝아라.

 

* 어느 날 지공은 나옹왕사에게하늘의 해와 땅의 조사를 모두 다 쳐부수어, 그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무엇인가 물었다.

왕사는안팎이 다 붉다면서 대각(大覺)을 이루게 되었다. 왕사의 입에서 금구(金口 : 부처님의 입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황금이나 금강에 비유한 말)가 흘러 나왔다.

 

 

                              選佛場中坐(선불장중좌) : 선불장 가운데 앉아서

                              惺惺着眠着(성성착면착) : 성성이 눈여겨 잘 보니

                              見聞非他物(견문비타물) : 보고 듣는 것 다른 것이 아니라

                              元是舊主人(원시구주인) : 다만 본래의 옛 주인일세

 

나옹선사 부도탑(천보산 화암사 기슭 동쪽의 지공선사승탑(指空禪師僧塔) 바로 아래쪽에 있다.)

 

나옹선사 (懶翁禪師, 1320-1376)

 

성장기 스님의 휘는 혜근(慧勤) 이요, 호는 나옹(懶翁)이며, 본 이름은 원혜(元慧)이다. 속성은 아()씨인데 영해부(寧海府) 사람이다. 거처하던 방은 강월헌(江月軒)이라 하며, 현재의 지명은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다. 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공민왕의 왕사였으며,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이고, 조선건국에 기여한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출생의 전설-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 까치소라는 개울이 있는데 까치소 앞에서 관헌에 끌려가다가 그의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고 낳은 아이를 개울가에 그대로 둔채 예주부 관청에 끌려갔다. 부사가 옷자락에 묻은 피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연유를 물어보니 도중에 출산한 아이를 그대로 두고 왔다는 것을 알고는 어서 돌려보내라는 사또의 엄명에 따라 그 곳에 돌아가니 아이는 죽지 않고 수백마리의 까치들이 애기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자라서 나옹대사라는 큰 인물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는 원나라 유학을 했고 인도의 지공스님의 제자로서 인도 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서 한국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 절터가 있는데 경주의 황룡사 절터보다 규모가 큰 한국 최대의 사찰로 중창했고, 무학대사가 그의 제자였으며, 조선 태조 왕사로서 양천도의 주요인물이다. 나옹, 지공, 무학, 세분의 부도와 비석이 회암사 터의 뒤쪽에 현존하고 있는데, 비석은 조선왕조 유학사상의 지주였던 목은 이색이 찬하여 지금도 비문이 남아있다.

그 출생지 부근에 장륙사라는 조그만 사찰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 때 건물로 건물 내벽에 그의 초상화가 남아있고, 그가 입적한 남한강변 여주신륵사에도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비문이 남아있으며, 그의 가송집과 비문을 한글로 해석한 서적으로 나옹록이 있고 연구서도 있다.

 

* 혜근(惠勤: 13202~13766)은 고려의 승려이다.

속명은 아원혜(牙元惠), 초명 원혜(元慧), 호는 나옹(懶翁), 법호는 보제 존자(普濟尊者)이며 법명 혜근(惠勤). 시호는 선각(禪覺). 영해부(寧海府: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출신이다.

1320(충숙왕 7) 음력 115일에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영산군(靈山郡) 출신의 어머니 정씨(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339(충숙왕 후 8) 20세에 출가했으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 득도했다.

1344(충목왕 즉위년)에 회암사에서 4년 동안 밤낮으로 홀로 앉아 정진하던 중에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

1347(충목왕 3)에 원나라의 연경(燕京: 현 베이징)으로 건너가 이름난 승려들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인도의 지공선사(地空禪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 후 1351(충정왕 3)부터 1354(공민왕 3)까지 중국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1355(공민왕 4)에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住持)로 있었다.

1358(공민왕 7)에 고려로 귀국했으며, 1360(공민왕 9)에 오대산에 머물렀다.

1361(공민왕 10)에 왕과 태후의 청으로 신광사에 잠시 머물렀으며, 11월에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사찰을 지켰다.

1363(공민왕 12)에는 구월산에 들어갔으며, 1365(공민왕 14)에는 물러나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그 후 여러 산사(山寺)를 돌아다녔다.

1366(공민왕 15)에 금강산에 있었고 1369(공민왕 18)에 오대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1370(공민왕 19)에 회암사에 스승의 유골을 안치했고, 음력 910일에는 공부선(功夫選)을 거행했다.

1371(공민왕 20)에 법복(法服)과 발우(鉢盂)를 하사받았으며,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로 봉했다.

그 후 송광사에 있었다가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또한 절을 중축했다.

1376(우왕 2)에 낙성(落城)을 축하하는 법회를 크게 열었는데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혜근은 밀양시의 영원사(靈源寺)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병이 도졌다. 한강에 이르렀을 때 호송 관원이었던 탁첨(卓詹)에게 자신의 병세가 위중해 뱃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결국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7일 만에 여흥(驪興: 현 경기도 여주시)에 도착해 신륵사에 머물렀다. 탁첨(卓詹)이 재촉해 다시 떠나자고 말했지만 떠나지 않고 음력 515일 진시(辰時: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조용히 입적(入寂)했다.

 

* 나옹혜근(懶翁惠勤) 열반송(涅槃頌)

 

 

 

 

산과바다 이계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