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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悟道頌

진각국사(眞覺國師) 오도송(悟道頌)

by 산산바다 2015. 1. 18.

산과바다

진각국사 부도 송광사 광원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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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국사 오도송(眞覺國師 悟道頌) 11781234

 

불각화(佛覺華:부처님의 꽃)

普光明殿是吾家(보광명전시오가)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하신 곳(보광명전)은 그대로 나의 집이요.

三法一源初睡起(삼법일원초수기) 삼법(敎法行法證法)의 한 근원에 첫잠이 깨다.

百十由旬一念收(백십유순일념수) 멀고도 너무 멀어서 생각하기 힘든 거리 한 생각에 거둬들이니

世間時劫都爲爾(세간시겁도위이) 세간의 시간이야 모두 헛된 것이구나.

 

 

보조국사의 수행은  

회광반조 廻光反照 : 진여자성인 인간 본래의 모습을 깨달아 진심(眞心)을 통한 불성을 말함,

돈오점수 頓悟漸修 : 홀연히 순간적으로 깨달음을 이루되 이를 부동의 것으로 하기 위해 지속적인 수행정진을 해야 된다는 뜻.

정혜쌍수 定慧雙修 : 적연부동(寂然不動)의 마음과 초월적 관조의 지혜를 일체화하여 무심의 경지에 이름을 말함.

간화경절 看話徑截 : 일체의 지혜를 떨쳐 버리고 오로지 조사들의 활구를 참구함으로서 무심합도(無心合道)의 깨침을 말함이다.  

보조국사 스승이 수행에 있어 병진수행주의(竝進修行主義), 심외무법 성외무법(心外無法 性外無法)을 말했다면,

진각국사는 색신(色身)으로 나를 보는 것도 사도(邪道), 보리와 열반이 원래 청정하다 하여 실천수행이 없는 것도 사도라고 말했다. 또한 진각국사는 화두 참구에 있어 사구(死句)에 들지 말고 활구(活句)의 본바탕에 들라고 강조했다.

 

 

진각국사비-강진 월남사지에 위치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

 

속성은 최씨(崔氏). 자는 영을(永乙), 호는 무의자(無衣子). 나주 화순현 출신이다. ()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출가하기를 청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불경을 생각하고 주문을 외었다. 1201(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가 있으면서 불경을 공부했다. 다음해에 어머니가 죽자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의 지눌(知訥)에게 나아가, ()를 올려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빈 다음 지눌 밑에 출가했다. 이때부터 혜심은 힘써 정진했는데 한때 오산(蜈山)에 있을 때는 반석(盤石) 위에 앉아 밤낮으로 선경을 익혔고 오경(五更)이면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려 듣는 사람들이 이로써 시간을 짐작했다고 한다. 또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에 있을 때는 연좌대(宴坐臺) 위에서 좌선을 했는데 눈이 내려 머리까지 쌓여도 오직 좌선에만 몰두했다.

 

1205(희종 1) 지눌이 억보산(億寶山) 백운암에 있을 때 혜심은 스승을 찾아가 뵈었다. 지눌이 다 해어진 짚신을 가리키며 "신발이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하고 묻자, 혜심은 "왜 그때에 보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또 어느 날 지눌이 조주(趙州)"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와 대혜종고(大慧宗杲)10가지 병을 들어 대중에게 물음에, 모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혜심은 "3가지 병을 앓는 이라야 그 뜻을 알 것입니다"라고 했다. 지눌이 다시 "3가지 병을 앓는 사람은 어떤 곳으로 숨을 쉬는가?"하고 묻자 혜심은 손으로 창을 1번 내리쳤다. 이에 지눌은 방장에 돌아가 그를 불러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네. 그대는 불법을 임무로 삼아 본래의 서원을 바꾸지 말게"했다.

 

1208년 지눌이 그에게 수선사의 사주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지리산으로 피하여 오래 숨어 지냈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수선사에 들어가 조계종의 2세가 되었다. 이후 그는 조정의 지원을 받아 수선사를 확장하고 선사의 선풍을 더욱 진작시켰는데, 그의 문하에는 뛰어난 선납(禪衲)들도 많았지만 최우(崔瑀)를 비롯해 당시 무인집권자들의 가족과 무인정권에 참여했던 수많은 문무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혜심은 1213(고종 즉위)에 선사(禪師)를 제수받고 다시 1216년에는 대선사로 올려졌다. 1219년 왕이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로 명하자 여러 번 사양하다가 이듬해 부임했다. 1234626일 문인인 마곡(麻谷)에게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라고 말하고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했다. 이때 나이 56, 법랍 32세였다.

 

왕은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의 이름을 원조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했다. 부도는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진각국사비는 강진군 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그의 비명에는 "승과(僧科)를 거치지 아니하고 승직에 오른 것은 사()가 처음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그의 문하에는 청진몽여(淸眞夢如진훈(眞訓각운(覺雲마곡 등이 있으며 청진몽여는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3세 법주가 되었다.

 

혜심은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2세로서 간화선(看話禪)을 크게 떨쳤다. 간화선은 화란 화두의 준말로서 화두를 근거로 공부하는 선풍을 간화선이라 하는데, 중국 당나라말 이후부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 대혜종고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처음 전해졌다. 혜심도 지눌과 같이 수행의 요점은 지()와 관(), ()과 혜()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외에 혜심은 간화일문(看話一門)을 들어 이것이 가장 빠른 길이며 지관·정혜도 모두 이 속에 포함된다고 했다. 혜심이 정혜쌍수를 수행의 요체로 본 것은 지눌과 동일하지만, 지관·정혜가 간화일문에 포함된다고 함은 그의 독특한 견해이다. 혜심은 선교융회의 입장과는 달리 한결같이 간화선만을 주장했고, 선과 교라는 상대적 의미에서 교를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선 안에서도 이론적인 선은 옳지 못하다고 물리쳤다. 그는 "망상을 버리고자 하면 간화만한 것이 없다"라고 했으며 선수행에서의 간화일문에 의한 실참실오(實參實悟)를 한결같이 강조했다. 그는 또 유학에도 통하여 유불(儒佛)이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저서로는 선문염송집 禪門拈頌集(30심요 心要(1조계진각국사어록 曹溪眞覺國師語錄(1구자무불성화간병법 狗子無佛性話揀病法(1무의자시집 無衣子詩集(2금강경찬 金剛經贊(1선문강요 禪門綱要(1) 등이 있다.

 

* 진각국사 禪詩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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