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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중국조사(中國祖師) 法脈 系譜

제 37조 황벽 희운(黃蘗希運) (814~850)

by 산산바다 2022. 11. 19.

산과바다

황벽 희운(黃蘗希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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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7 황벽 희운(黃蘗希運) (814~850)

 

 

시호(諡號)는 단제선사(斷際禪師)

 

塵勞逈脫事非常(진로형탈사비상) : 번뇌를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 

緊把繩頭做一場(긴파승두주일장) : 승두(고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

不是一番寒徹骨(부시일번한철골) : 겨울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 : 어찌 봄날에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당나라의 선승(禪僧)으로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사람으로, 어려서 홍주(洪州) 황벽산(黃蘗山) 산사(山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키가 칠척의 당당한 체격이었으며, 이마가 볼록 튀어나와 있어 육주(肉珠)로 불렸다. 또 체격만큼이나 성격도 호방하여 거칠 것이 없었다. 사가어록(四家語錄)에 의하면, 그가 남전보원(南泉普願)과 함께 초롱을 쓰고 외출했는데 남전이 이를 보고 덩치가 산만한 놈이 손바닥 만한 초롱을 쓰고 있구나! 라고 놀리자, 황벽은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이 초롱에 들어간다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찾았지만, 마조가 이미 입적하고 없자 석문(石門)에 가서 백장회해(百丈懷海)의 지도를 받고 이치에 통달했다.

 

대중(大中) 2(848) 홍주자사(洪州刺史배휴(裵休)의 청으로 종릉(鍾陵)의 용흥사(龍興寺)에 가 머물렀다. 완릉(宛陵)의 개원사(開元寺)에도 머물면서 찾아드는 학인들을 가르쳤다.

황벽산에서 입적해 황벽희운(黃蘗希運)으로 불리고 문하에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인 임제 의현(義玄)이 있다. 저서에 황벽산단제선사전심법요(黃蘗山斷際禪師傳心法要)가 있다.

 

마조도일 이후 중국 당대(唐代)의 선은 크게 변화하였다.  마조도일의 선을 홍주종(洪州宗)이라고 하는데, 홍주종에서는 많은 걸출한 선사들이 배출되었다. 그중에서도 홍주종의 선을 가장 잘 계승했다고 일컬어지는 인물이 바로 황벽희운(黃蘗希運)선사이다.

황벽은 젊었을 때부터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시류(時流)를 좇지 않는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성격은 스승인 백장에 참학(參學)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조당집에 황벽이 하루는 걸식을 나가서 어떤 집 앞에 이르렀는데, 한 노파가 나와서 말하기를 화상은 참으로 염치가 없구려. 하였다.

황벽은 기가 차서 아직 밥도 얻어 먹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염치없다고 꾸짖으시오? 하고 되물었다.

노파가 겨우 그 모양이니 어찌 염치없는 게 아니겠소? 하니 이 말에 선사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노파는 선사의 당당한 풍모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깨닫고는 성대히 대접하였다. 공양을 마치고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 선사는 노파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스승으로 섬기겠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노파가 말하기를 저는 다섯 가지 장애(五障)가 있는 여인의 몸입니다. 듣건대 강서에 백장이란 대사가 계시는데, 그리로 가셔서 묻고 배우십시오. 하였다고 한다. 뒷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노파는 젊었을 때 남양 혜충(南陽 慧忠) 국사를 섬기고 배웠다고 한다.

한편 황벽에게는 배휴라고 하는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 배휴(裵休, 797~870) 홍주자사(洪州刺史) 지낸 재가 거사로서 원래는 종밀(宗密)의 제자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나중에는 황벽의 제자가 되었는데, 황벽의 저서인 전심법요(傳心法要)와 완릉록(宛陵錄)은 모두 배휴에 의해서 편집된 것이다.

배휴와 황벽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하루는 홍주자사(洪州刺史) 배휴가 용흥사(龍興寺)에 왔다가 벽에 걸려 있는 고승의 초상화를 보고는 안내하는 스님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요? 하니 어느 고승의 상()입니다. 하였다.

스님의 말을 듣고 배휴는 거만한 어투로 다시 물었다. 형상은 볼 만하다마는, 고승은 어디에 있소?

안내하는 스님이 질문에 얼른 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배휴가 되물었다. 이 절에는 선사가 없소?

근래에 한 스님이 와 계시는데 선사같이 보입니다.

그러자 배휴는 그 스님을 불러오라고 했다. 바로 황벽 선사였다.

배휴는 앞에서와 똑같이 말했다. 형상은 볼 만하다마는, 고승은 어디 있소?

이때 선사는 큰 목소리로 불렀다. 배휴!

배휴는 깜짝 놀라 엉겁결에  ""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사는 틈도 주지 않고 되물었다. 배휴는 어느 곳에 있소?

이 말에 배휴는 깨달음을 얻어서 선사에게 귀의하였다.

그러나 황벽의 가장 큰 공적은 임제의현(臨濟義玄,~867)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낳은 것이다.

임제가 깨닫게 된 계기를 임제록(臨濟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임제는 황벽의 문하에서 3년을 공부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자 하루는 황벽의 처소를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분명한 뜻(佛法的大意)입니까?

그러자 임제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황벽은 몽둥이로 때렸다.

이와 같이 3번을 물었는데 그때마다 황벽은 때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황벽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한 임제는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황벽을 찾아갔다.

그러자 황벽이 말하기를 너는 다른 곳에 가지 말고 대우(大愚) 선사를 찾아가라. 너를 위해 가르침을 줄 것이다.

임제가 대우 선사를 찾아가자 대우가 묻기를 어디에서 왔느냐?

황벽의 처소에서 왔습니다.

황벽은 무슨 가르침을 주었더냐?

3번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3번 다 두들겨 맞았습니다.

저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대우가 말하기를 황벽이 이렇게 노파심절(老婆心切, 남의 일을 지나치게 걱정 함)하게 가르쳐 주었건만, 여기에 와서 무슨 잘못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게냐?

임제가 언하에 대오(大悟)하여 말하기를 아니, 황벽의 불법도 별것이 없었구나(元來黃蘗佛法無多子).

그러자 대우는 임제의 멱살을 움켜잡고 말했다. 이 오줌싸개야. 아까는 잘못이 있느니 없느니 하더니 지금은 황벽의 불법도 별것이 없구나. 라고 하는구나. 너는 무슨 도리를 알았느냐? 빨리 말해라 말해!

그러자 임제는 대우의 옆구리를 3번 쥐어박았다.

대우는 임제를 밀치면서 말하기를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이것이 임제가 깨달은 기연으로서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황벽의 불법무다자(黃蘗佛法無多子)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위에서와 같이 황벽의 불법도 별것이 없구나. 로 해석(解析)하는 경우도 있고, 황벽의 불법은 간단하구나. 로 해석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은 없는 경우로서, 이때 무다자(無多子)라는 것은 구질구질한 것이 없구나(간명 직절하구나)로 번역할 수 있다.

하루는 황벽 스님이 백장 선사께 여쭙기를, 종상종승사(從上宗乘事)를 장차 만인에게 어떻게 지시하시렵니까?

하니, 백장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계셨다. 말없이 앉아 있는 여기에 심오한 진리가 숨어 있는 법이다.

그러자 황벽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끊어져 가게끔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니, 그 말끝에 백장 선사께서는 네가 이 낱 사람인지라. 라고 말씀하시고는 곧장 조실 방으로 돌아가셨다.

사람인데 왜 이 낱 사람이라고 하느냐? 여기에도 큰 뜻이 숨어 있다.

우리가 이러한 법문을 바로 받아들이는 눈을 갖추어야 세세생생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아주 당당하게 진리의 낙()을 누리며 영겁(永劫)토록 열반의 극락세계에서 생활하게 되는 법이다.

하루는 백장 스님이 황벽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를 갔다 오느냐?

대웅산 밑에 가서 버섯을 따옵니다.

범을 안 만났더냐?

황벽 스님이 으흥하고 범이 물려는 형세를 지으니 백장 스님이 도끼로 찍는 시늉을 하는 것을 황벽 스님이 덤벼들어 한번 쥐어박았다.

백장 스님도 한 차례 쥐어박고 크게 웃으며 돌아갔다. 그날 백장 스님이 상당 설법에서 말하기를 대웅산 아래 큰 범이 있으니 대중은 조심하라. 내가 오늘 한번 물렸다.

 

되풀이 되는 말씀이나 <전등록>에 전하기를 선사는 민() 지방 출신으로, 이마 사이가 우뚝 솟은 것이 살로 된 구슬 같았고, 음성이 낭랑하며 의지가 깊고 맑았다. 어릴 때에 고향의 황벽산(黃蘗山)에서 출가하였다. 나중에 천태산(天台山)에 가다가 어떤 스님을 만났다. 그와 함께 웃고 말하기를 마치 예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처럼 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눈의 광채가 사람을 쏘듯 빛났다. 그와 같이 길을 가는데, 때마침 개울물이 넘쳐서 삿갓을 벗고 지팡이를 세워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이때 그 스님이 선사를 데리고 함께 건너겠다고 하자, 선사가 건너시려면 사형이나 혼자 건너시오.” 말했다. 그 스님이 옷을 걷고 물살을 건너는데,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하면서 돌아보며, “건너오시오, 건너오시오.” 말하자, 선사가 쯧쯧 고얀 놈이로군, 내가 진작부터 알았더라면 네 다리를 꺾어 놓았을 것이다.” 말했다. 그 스님이 탄복하여서, “참으로 대승의 법기 (法器)이시니, 저로서는 미치지 못할 바입니다.” 말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나중에 서울(京師)에 갔다가 어떤 사람이 알려 주어서 백장을 찾아가 물었다. “위로부터 전해오는 종승(宗乘)을 어떻게 보여 주십니까?” 하지만 백장이 잠자코 있으니, 선사가 뒷사람들로 하여금 끊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백장이 장차 그대가 그런 사람이 되겠구나.” 하며 일어나서 방장으로 들어가니, 선사가 뒤를 따라 들어가서 저는 일부러 찾아 왔습니다.” 말하자, 백장이 그렇다면 뒷날에 나를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어느 날 백장이 선사에게 어디를 갔다 오는가?” 물으니, 선사가 대웅산(大雄山) 밑에서 버섯을 따고 옵니다.” 대답하였다. 백장이 호랑이大蟲을 보았는가?” 하니, 선사가 호랑이 소리 흉내를 내니, 백장이 도끼를 들고 찍으려는 시늉을 하였다. 대사가 백장을 한 대 갈기니, 백장이 껄껄 웃고는 돌아가 버렸다. 백장이 상당하여 대중에게 대웅산 밑에 호랑이가 한 마리 있으니, 여러분은 조심하시오. 늙은 백장도 오늘 한 차례 물렸소.” 라고 말했다. 선사가 남전南泉 회상에 있을 때에 울력으로 나물을 다듬는데, 남전이 어디를 가시오?” 물으니, 선사가 나물을 다듬으러 갑니다.” 대답했다. 남전이 무엇으로 다듬는가요?” 물으니, 선사가 칼을 번쩍 들었고, 남전이 여러 사람이 나물을 다듬는군.” 하였다. 어느 날 남전이 선사에게 내가 우연히 목우가牧牛歌를 지었는데, 장로長老가 화답해 주시오.” 말하자, 선사가 저에게는 따로 스승이 계십니다.” 하였다. 선사가 하직하고 떠나는데 남전이 문밖까지 전송을 나왔다가 대사의 삿갓을 번쩍 들고, “장로의 몸은 몹시 큰데 삿갓은 퍽 작구려.” 말하니, 선사가 그렇지만 대천세계가 몽땅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라고 대구하였다. 남전이 다시 노사老師는 적이오.” 하니, 선사는 그대로 삿갓을 쓰고 떠났다.

그 뒤에 홍주洪州 대안사大安寺에 머물렀는데 학자들이 밀물같이 모였다. 당시에 정승相國인 배휴裵休가 완릉 宛陵 지방을 다스렸는데, 그는 대선원大禪院을 짓고 선사에게 설법을 청하였다. 선사가 본래 머물던 산을 몹시 사랑하므로 다시 황벽黃蘗이라 불렀다. 나중에 또 고을로 청하여 모시면서 자기가 저술한 글 한 편을 선사에게 보이니선사는 이를 받아서 자리 옆에 놓으며 대략 훑어보지도 않고 가만히 침묵하다가, “알겠는가?” 물었다. 배휴가 모르겠습니다.” 대답하니, 선사가 문득 이렇게 회통한다면 오히려 비슷하겠지만, 만약 종이나 먹으로 표시한다면 어찌 나의 종지라 하겠는가?” 말하였다. 배휴는 다시 시 한수를 지어 바쳤으니: 대사의 심인心印 전해 받은 뒤부터 (自從大士傳心印), 이마에 구슬 있는 일곱 자 몸이 (額有圓珠七尺身), 촉수蜀水 십년 동안 주석하다가 (掛錫十年棲蜀水), 돛단배 타고 오늘 장빈 건넜네. (浮盃今日渡章濱). 천여 명 용상들이 높이 따르고 (一千龍象隨高步), 만리향 꽃과 같이 인연을 맺어 (萬里香華結勝因), 제자로 섬기기를 원하지만은 (擬欲事師爲弟子), 그 법을 누구에게 부촉하실까? (不知將法付何人). 그러나 선사는 여전히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로부터 문중의 가풍이 강표(江表)에 성행하였다. 당나라 대중(大中) 때에 본산 에서 임종하니, 단제(斷際) 라는 시호와 광업(廣業)이라는 탑호가 드려졌다.

 

진월이 찬탄 첩부한다.

백장의 법을 받아 호랑이 위세로서,

강호(江湖)를 제접하고 임제에 부촉하니,

높고 큰 선풍(禪風) 법맥이 뒷세상에 전하네.

 

황벽희운 선사는 백장회해의 법을 이었고 임제의현 선사에게 전하여, 후대에 가장 활발한 임제종의 비조가 되신 분으로서, 한국에서는 고려말기에 가지산문의 태고보우 선사가 그 법계에 속한 석옥청공의 법을 받으면서, 오늘날 조계종으로 이어져 옵니다. 그분의 법어로 전하는 <전심법요(傳心法要)>는 간결 명료하게 선법의 요체를 보이는 선문의 주요 어록으로 전해져 온다.    

 

황벽(黃檗) 선사 하면임제문중(臨濟門中)에서 마조(馬祖) 선사 아래 백장(百丈), 백장 선사 밑에 황벽 선사인데, 바로 그 아래가 또 임제 선사이다. 모두 도인 가운데 으뜸가는 도인이요, 밝은 도안(道眼)을 갖추신 분들이다.

 

하루는 황벽 스님이 백장 선사께 여쭙기를,

"종상종승사(從上宗乘事)를 장차 만인에게 어떻게 지시하시렵니까?“

하니, 백장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계셨다. 말없이 앉아 있는 여기에 심오한 진리가 숨어 있는 법이다그러자 황벽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끊어져 가게끔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니, 그 말끝에 백장 선사께서는 "너가 이 낱 사람인지라.“

라고 말씀하시고는 곧장 조실방으로 돌아가셨다사람인데 왜 이 낱 사람이라고 하느냐? 여기에도 큰 뜻이 숨어 있다우리가 이러한 법문을 바로 받아들이는 눈을 갖추어야 세세생생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아주 당당하게 진리의 낙()을 누리며 영겁(永劫)토록 열반의 극락세계에서 생활하게 되는 법이다.

황벽 선사께서 출세(出世)하신 당대(唐代), 무수 도인이 배출되어 선법(禪法)을 크게 선양(宣揚)하던 때였다당시 헌종(憲宗)이라는 임금이 있어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한 사람은 목종(穆宗)이고 한 사람은 선종(宣宗)이다. 맏이인 목종이 왕위를 계승하고 또 아들 셋을 두어, 경종(敬宗),문종(文宗),무종(武宗)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목종이 재위(在位)하던 당시에, 후에 선종이 된 대중(大中)이라는 아우는 열 살 남짓 되었던 때였다그 아이가, 형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용상(龍床)에 앉아 조회를 하고 국사를 논할 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조회가 끝나면 궁중에 있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용상에 올라가서 형이 정사(政事)하던 것을 그대로 흉내 내곤 하였다그렇게 하기를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 반복하므로, 신하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목종에게 아뢰었다. "임금님의 아우가 용상에 올라가서 정사(政事)를 흉내내는 것은, 필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바람이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목종이 그 말을 듣고는 아우에게 가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주 영특한 내 아우로구나." 하며 칭찬을 하였다.

그러나 목종이 죽고, 세 아들이 차례차례 왕위를 계승해서 마지막 셋째가 왕위에 오르자, 숙부 대중(大中)을 종으로 부리고 타살(打殺)하려 했다. 이유인즉, 아버지 목종이 나라를 다스릴 때 용상에서 아버지를 희롱했다는 것이었다그런데 요행히 천명(天命)으로 살아나 산으로 피신하여, 향엄 지한(香嚴志閑) 선사의 회상(會上)으로 가서 사미승(沙彌僧)이 되었다하루는 향엄 선사께서 사미 대중(大中)을 데리고 여산(廬山) 폭포를 구경 가셨다. 거기에서 수십 길 되는 벼랑에서 쏟아지는 짚둥 같은 폭포를 보고 향엄 선사께서 글을 두 구() 지으셨다.

 

穿雲透石不辭勞 地遠方知出處高

구름을 뚫고 돌을 뚫으며 쏟아지는 물이 수고로움을 모르니

그 근원이 멀고 멀어서 출처가 아주 높은 줄을 앎이로다.

 

향엄 선사께서 그렇게 두 구를 지으시고는, 사미 대중에게 이르셨다.

"네가 뒷 글귀를 한 번 이어 보아라."

그릇을 떠보기 위해서 시험을 던지신 것이다. 그러자 대중이 척 받아서,

溪澗豈能留得住 : 어찌 산골짝 개울에 머무르리오.

終歸大海作波濤 : 마침내 큰 바다에 돌아가 파도를 일으키리라.

 

하고 아주 멋진 대구(對句)를 하였다향엄 선사께서 들어보시고는,

"됐다. 시절인연(時節因緣)만 기다려라."

하셨으니, 장차 세상에 돌아가 큰 파도를 일으킬 그릇임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그런 후로 사미 대중은 염관(鹽官) 선사 회상으로 갔다. 그곳에서 시절인연을 기다리고 지내는데, 당시 염관 선사 회상에는 황벽 선사께서 유나(維那) 소임을 맡고 계셨다.

스님네는 항시 조석(朝夕)과 사시(巳時)에 부처님 전에 예배를 드리는데, 하루는 대중이 예불(禮佛)을 올리고 계시는 황벽 선사를 보고 다가가서 여쭈었다.

"부처님 경(), '부처님에게도 집착해서 구하지 말 것이며, 부처님의 진리의 법에도 집착해서 구하지 말 것이며, 부처님의 진리의 법을 수행하는 스님네에게도 의지해서 구하지 말라.'는 법문이 있는데, 스님께서는 예불을 올리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황벽 선사께서 그 말을 받아서,

"부처님께 집착해서 구하는 바 없이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고, 부처님의 진리의 법에 집착해서 구함이 없이 부처님 진리의 법에 예배를 올리고, 부처님의 진리의 법을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집착함이 없이 스님들께 예()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 할 진대는 예배드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대중(大中)이 이렇게 반문하자, 황벽 선사께서 대중의 뺨을 한 차례 갈겨 버리셨다.

"대단히 머트러운 스님이시군요."

"이 부처님 진리 가운데 무슨 머트럽고 세밀함이 있을 수가 있느냐?“

하시며 황벽 선사께서 연거푸 대중의 뺨을 두 대 더 올려치셨다.

그러고서 세월이 흐른 후에, 당나라 궁중에서는 대중(大中)을 임금으로 추대해 모셨다.

대중은 임금이 되고 나서, 과거 수행하던 시절에 황벽 선사께 뺨을 세 차례 맞았던 사실이 생각나서, 황벽 선사에게 추행사문(醜行沙門)이라는 호를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에 조정에는 배상국(裴相國)이라는 이가 있어 그것을 만류했다.

배상국은 신심(信心)이 아주 대단하여 일생 황벽 선사 회상에서 수행하여 진리의 안목(眼目)을 갖춘 분이다. 그래서 노령에는 "스님, 부처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 고귀한 진리의 법을 저에게 전()하지 않으시렵니까?“

라고까지 하신 분이다. 거사(居士)로서 그렇게 훌륭한 안목을 갖추셨던 것이다.

상국(相國)이라는 벼슬이 요즘의 국무총리쯤 되다 보니, 임금이 황벽 선사께 머트러운 수행을 한 분이라고 추행사문(醜行沙門)이라는 호를 내리려고 하니, 간언(諫言)을 했던 것이다.

"폐하께서는 그 말씀을 거두십시오. 황벽 도인께서 폐하의 뺨을 세 번 때리신 그 인연으로 폐하의 삼생(三生)의 업()이 다 소멸된 고로, 오늘날 이렇게 왕위에 오르시게 된 것입니다."선종(宣宗)이 그래도 신심(信心) 있는 왕인지라, 듣고 보니 배상국의 말이 옳으므로, 추행사문이라는 호를 거두고 대신 단제(斷際) 선사라는 호를 내렸다. 삼생(三生)의 업을 다 끊어주신 위대한 선사라고 그렇게 호를 내린 것이다이와 같이 선지식(善知識)에게 법방망이를 맞는 데서는 중생의 한량없는 업()이 일시에 소멸되는 법이다. , 선지식이 설()하는 고준한 진리의 한 마디는 귓전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다겁다생(多劫多生)에 지어온 업이 소멸되고, 그 한 마디를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길 것 같으면, 필경에 불과(佛果)를 이룬다고 했다그러니 이 법석(法席)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자리인가그러므로 세상 일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이 고귀한 법문 한 마디 잘 들어서 마음 가운데 있는 가지가지의 번뇌를 제거하는, 이 일에 지나가는 것이 없다

 

하루는 백장스님이 황벽스님에게 물었다.

"어디를 갔다 오느냐?"

"대웅산 밑에 가서 버섯을 따옵니다."

"범을 안 만났더냐?" 황벽 스님이 "으흥!"하고 범이 물려는 형세를 지으니 백장 스님이 도끼로 찍는 시늉을 하는 것을 황벽 스님이 덤벼들어 한번 쥐어박았다. 백장 스님도 한 차례 쥐어박고 크게 웃으며 돌아갔다. 그날 백장 스님이 상당설법에서 말하기를

"대웅산 아래 큰 범이 있으니 대중은 조심하라. 내가 오늘 한번 물렸다."하였다그 후 백장의 법을 받아 가지고 여러 곳으로 다니며 형적을 숨기고 지냈다. 한번은 용흥사(龍興寺)에 와서 쓰레질이나 하면서 머물고 있었는데 홍주자사(洪州刺史) 배휴(裵休)가 왔다.

배휴는 법당 벽 그림을 가리키며 

"저것이 무엇이요?“

하고 물으니 안내하는 스님이 "고승의 상()입니다."

"형상인즉 볼 만 하나 고승은 어데 있소?"스님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니,

배휴가 "이 절에 선승(禪僧)이 없소?"

 

"근자에 한 중이 와 있는데 선승같이 보입니다." 휴는 그 중을 불러오라 하였다. 바로 황벽 스님이다. 휴는 다시 앞서의 말로 물으니 황벽이 즉시에 큰 목소리로 "배휴!" 하고 불렀다. 휴는 엉겁결에  "!" 하니,

 

"어느 곳에 있는고?" 하는데서 배휴가 활연 계합하였다. 휴는 그 자리에서 제자의 예를 드리고 사제에 모시고 조석으로 문법하였다.

 

그 후 배휴의 청으로 완능(宛陵)의 개원사(開元寺) 홍주 대안사(大安寺)에 있으면서 크게 교화하니, 법중이 항상 천여명이 넘었다. 법을 이은 제자가 12인이 있는데 그중에 임제(臨濟)스님이 있다. 지금 여러곳에서 성행하고 있는 완릉록(宛陵錄)과 전심법요(傳心法要)는 선사법어를 배휴가 기록한 것이다.     

 

전심법요(傳心法要) 서문

 

대 선사(大禪師)가 있었으니, 이름은 희운이요, 홍주(洪州)의 고안현 황벽산 축봉 밑에 살았다. 조계 6조의 적손(嫡孫)이요, 백장의 제자이며, 서당(西堂)의 조카로서 최상승인 문자를 여인  심인(心印)을 홀로 지니고, 오직 한 마음만을 전할뿐, 딴 법이 없었다.

 

마음의 본체는 공하여서 만 가지 인연이 모두 공적하니 마치 등근 해가 허공에 솟아 비치는 것이 고요하여 가는 티끌도 없는 것 같았다. 증득한 것은 신구(新舊)도 심천(深淺)도 없고, 말하는 것은 이치도 견해도 세우지 않고, 종주(宗主, 주장)도 세우지 않고, 문호도 열지 않았다. 바로 이것 이어서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난다. 그러한 후에야 본래의 부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간결하고 그 이치는 곧고, 그 도는 높고, 그 행은 고고했다. 사방의 학자들이 산을 바라보고 모여들어 모습 만을 보고 깨달았으니, 왕래한 무리들이 항상 일천여 명이었다.

 

내가 회창(會昌) 2년에 종릉(鐘陵)을 다스리러 나왔다가 산에서 고을로 모셔서 용흥사(龍興寺)에 묵으시게 하고 조석으로 도를 물었고, 대중(大中) 2년에는 완릉(宛陵)을 다스리러 나왔다가 다시 임지로 모셔다가 개원사(開元寺)에 계시게 하고 조석으로 도를 묻고 돌아와서 적으려 하면 열에서 하나나 둘 정도를 기억해서 심인(心印)이라 여겼으나 감히 드날리지 못했다. 이제 신기하고 정묘한 뜻이 미래까지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하다가 끝내 끌어내어 그의 문하의 제자인 태주와 법건에게 주어 옛 산인 광당사(廣唐寺)에 돌아가서 장로 스님들에게 지난 달에 항상 듣던 법문과 같은지 다른지를 가려 달라 하였다.

당의 대중 11108일에 삼가 기록한다. 하동(河東) 배휴(裵休)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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