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무학대사 오도송(無學大師 悟道頌) (무학대사 1327~1405)
靑山綠水眞我面(청산록수진아면) 푸른 산 푸른 물이 나의 참모습이니
明月淸風誰主人(명월청풍수주인) 밝은 달 맑은 바람의 주인은 누구인가
莫謂本來無一物(막위본래무일물) 본래부터 한물건도 없다 이르지 마라
塵塵刹刹法王身(진진찰찰법왕신) 온 세계 티끌마다 부처님 몸 아니런가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指空)이 창건한 사찰로, 그 제자인 나옹(懶翁)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無學大師(무학대사 1327~1405)
고려(918~1392) 말~조선(1392~1897) 초의 승려이다. 속성은 박이고 이름은 자초(自超)이며, 법명은 무학(無學) · 계월헌(溪月軒)이다. 조선 태조에 의해 왕사가 되었으며, 한양천도를 도왔다.
<생애 초반>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무학의 부모는 왜구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하층민으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았고, 이러한 사정으로 무학의 어렸을 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어린 그가 지나치게 못생겨서 내다 버렸으나 학들이 와서 아이를 감싸므로 그의 부모는 그가 특별한 아이라 생각하여 도로 데려왔다 한다.
<출가와 승려 생활>
18세에 송광사에 들어가 소지 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문산(龍門山)의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전수받고,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1353년(공민왕 2년)에 원나라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원나라에 있는 동안 오대산(五臺山) 등 중국의 각지를 순례하였다. 나옹 혜근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고려로 돌아왔다.
1364년 나옹은 회암사를 중건하고 무학을 불러 수좌승으로 삼았다. 나옹이 사망한 뒤에는 무학은 전국을 돌며 수행하였는데, 이 때 이성계와 처음 만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역성혁명에 동참>
무학은 일찍이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여 석왕사(釋王寺)를 짓게 해준 인연으로 이성계의 우우(優遇)를 받았으며, 상지술(相地術)에 밝았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는 무학의 해몽과 한양 천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으나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미흡한 점이 많다.
1392년(조선 태조 1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았으며 회암사(會巖寺)에 있었다. 개국 직후부터 태조는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도읍을 정하는 것에 의견을 내었다.
(계룡산에 올라)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능히 알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계유 2월 11일의 기사
(남경의 옛 궁궐터에서) 임금이 또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었다.“어떠냐?” 자초가 대답하였다.“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이에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경상·전라·충청·강원·풍해·경기좌·우도의 민정(民丁)을 선발하여 성 쌓는 공사를 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갑술 8월 13일의 기사
<수도 이전>
두 번째 새 도읍 후보지는 한양이었다. 왕사 무학대사가 어명을 받고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학은 삼각산에 이어 목멱산(木覓山, 지금의 서울 남산)에 올랐다. 이곳이 적당하다고 쾌재를 부르는 순간,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이럇!' 무학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노인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무학은 그대로 태조에게 길지를 보고하였다.
무학이 노인의 말을 쫓아 가보니,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다시 삼각산을 거쳐 백악산 밑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무학의 말을 듣고 그 길지로 향하고 그곳을 궁궐터로 정하였다.
그런데 무학의 의견에 정도전이 반대하고 나섰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며 반대하였다.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다시 잡은 자리가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 본래 무학이 잡은 자리는 종로의 필운동 근처였다.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1394년(태조 3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천도를 명령했다.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
<생애 후반>
태조는 무학을 매우 신임하였다. 1393년 회암사에 역질이 돌자 무학의 건강을 염려하여 광명사로 옮기도록 하였고 1397년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 또한 태조 자신도 왕위를 물려준 뒤 회암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그 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이가 소원해진 태조와 태종 부자의 화해를 위해 여러번 함흥과 한성을 오갔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태조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무학은 조선 태종 2년(1401)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1405). 사망 후 태종의 명으로 무학대사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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