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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漢詩

한국한시 江陵東軒(송인)외 偶吟, 峽口所見(송한필) 震澤集(신광하) 鏡浦別

by 산산바다 2006. 12. 15.

산과바다

 

 江陵東軒 강릉동헌   강릉 관사에서

                                   宋 寅 송 인

 客程容易送餘年 객정용이송여년 

 獵盡江城雪滿天 엽진강성설만천 

 歸夢共雲常過嶺 귀몽공운상과영 

 宦愁如海不知邊 환수여해부지변 

 濤聲動地來喧枕 도성동지래훤침 

 蜃氣浮空望似煙 신기부공망사연 

 鏡浦臺空茶竇冷 경포대공다두냉  

 更於何處擬逢仙 갱어하처의봉선  

 

나그네 여행길이라 남은 해를 보내기 쉽고

섣달 끝의 강성에는 폭설이 내렸네.

고향의 꿈은 구름과 항상 고개를 넘나들고

벼슬살이 수심은 바다같이 끝이 없네.

물결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여 베개머리 울리고

공중에 솟은 신기루는 뿌연 연기 같구나

이곳 경포대 찾는 이 없어 차 대접할 일도 없으니

다시 그 어느 곳에서 신선을 만나 볼까.

 

 參考事項- 蜃氣(신기):신기루(蜃氣樓). 광선과 수증기의 관계로 해변 또는 사막의 상공에 산천이나 성곽 등이 나타나는 현상.

 

宋 寅 송 인

본관 여산(礪山). 자 명중(明仲). 호 이암(燎庵)·녹피옹(鹿皮翁). 시호 문단(文端). 1526년(중종 21) 중종의 셋째 서녀(庶女)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책봉되었다.

의빈부(儀賓府)·충훈부(忠勳府)·상의원(尙衣院) 등에서 요직을 역임한 후,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의 석학(碩學)들과 교유했고,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을 맡았다. 글씨에도 능하여 해서(楷書)를 잘 썼으며 수많은 글을 짓고 썼다. 필적은 모간(摸刊)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글씨에 〈덕흥대원군신도비(德興大院君神道碑)〉(楊州) 〈송지한묘갈(宋之翰墓碣〉(楊州)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南原) 〈김석옥묘비(金錫沃墓碑)〉(扶安) 〈김공석묘갈(金公奭墓碣)〉(驪州) 〈영상한효원비(領相韓效元碑)〉(楊州) 〈영상홍언필비(領相洪彦弼碑)〉(南陽) 〈좌참찬심광언비(左參贊沈光彦碑)〉(廣州)가 있고, 문집 《이암집(燎庵集)》이 있다.

 

 

 

    偶吟 우음   우연히 시를 짓다

                                  宋 翰弼 송 한필

 

 花開昨夜雨 화개작야우     지난 밤 비에 꽃이 피더니

 花落今朝風 화락금조풍     오늘 아침 부는 바람에 꽃이 지네

 可憐一春事 가련일춘사     가련하구나 하루 봄날의 일들이

 往來風雨中 왕래풍우중     비와 바람 가운데 오고 가는구나.

 

 參考事項- 春事(춘사):일 년의 봄 일

 

 

 

    峽口所見 협구소견  골짜기 입구에서

 

 靑裙女出木花田 청군녀출목화전  

 見客回身立路邊 견객회신립로변  

 白犬遠隨黃犬去 백견원수황견거  

 雙還却走主人前 쌍환각주주인전  

 

푸른 치마 입은 아낙이 목화밭에서 나오다

나그네를 보고 몸을 돌려 길가에 서네.

흰둥이가 멀리서 누렁이를 따라가다

쌍을 이루어 주인 앞으로 되돌아 달려오네.

 

신광수 申光洙 1712 - 1775

본관 고령(高靈). 자 성연(聖淵). 호 석북(石北)·오악산인(五嶽山人).음보(蔭補)로 참봉(參奉)에 등용되고, 1764년(영조 40)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탐라(耽羅)에 건너가서 그곳의 풍토 ·지리 ·해운 등 상황을 조사, 《부해록(浮海錄)》을 지었다. 그 후 연천(漣川)현감을 지냈으며, 1772년 기로정시(耆老庭試)에 장원하여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오르고, 1775년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효성은 지극하였으나 오랜 관직생활에도 노모(老母)를 모실 집이 없는 사실이 알려져 왕으로부터 집과 노비를 하사 받았다. 서화, 특히 과시(科詩)에 능했고 그 중 《관산융마(關山戎馬)》는 대표작으로 널리 애송되었다. 문집에 《석북집(石北集)》이 있다.

 

 

 

 震澤集 진택집

                                      申 光河 신광하

 

 君不見崔北雪中死       

 貂? 白馬誰家子       

 汝曹飛揚不憐死         

 北也卑微眞可哀         

 北也爲人甚精悍         

 自稱畵師毫生館         

 軀幹短小 一目         

 酒過三酌無忌憚         

 北窮肅愼經黑朔         

 東入日本過赤岸         

 貴家屛障山水圖         

 安堅李澄一掃無         

 索酒狂歌始放筆         

 高堂白日生江湖         

 賣畵一幅十日飢         

 大醉夜歸臥城隅         

 借問北邙塵土萬人骨     

 何如北也埋却三丈雪     

 嗚呼 北也身雖凍死名不滅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최북이 눈 속에서 죽은 것을

초구 입고 백마를 탄 사람은 뉘 집 자제인가?

너희들 멋대로 거들먹거리다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최북은 비천하나 정말로 애닯도다

최북은 사람됨이 날카롭고 사나와서

스스로 화사 호생관이라 했지

작은 몸집에 한 눈이 멀고

술이 석 잔이 넘으면 거리낌이 없도다

북쪽으로 숙신까지 갔었고 흑삭도 거쳤으며

동쪽으로 일본에 들어가 적안을 지났다네

귀한 집 병풍의 산수도에서

안견과 이징을 모두 쓸어 없애 버렸네

술 찾아 마시며 미친 듯 노래하고 비로소 붓을 놀리면

높은 마루 밝은 해에 강과 호수가 생겨나네

열흘 동안 굶주리다 그림 한 폭을 팔고는

몹시 취해 밤길 가다 성 모퉁이에 쓰러졌다네

묻노라, 북망산의 진토된 만인의 뼈

어찌하여 최북은 세 길의 눈 속에 묻혔는가?

아아, 최북의 몸은 비록 얼어죽었지만 이름은 사라지지 않으리.

 

 ☞ 崔 北 최 북

 본관 무주(茂朱). 자 성기(聖器)· 유용(有用).  호(號) 성재(星齋)· 기암(箕庵)· 거기재(居其齋)· 삼기재(三奇齋). 호생관(毫生館). 초명 식(植).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金得臣) 등과 교유하고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 불렸다.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술을 즐겼고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하였다.  주유 중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적도 있다.  시에도 뛰어났으며 작품에 《수각산수도(水閣山水圖)》 《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등이 있다.

 

 

 

   鏡浦別墅次韻 경포별서차운  경포 별장에서

                                         신광한 申光漢

 

 沙村日暮시柴  사촌일모구시비

 夕露微微欲濕衣 석로미미욕습의

 江路火明聞犬吠 강로화명문견폐

 小童來報主人歸 소동래보주인귀

 

물가 마을에 해 저물어 사립문을 두드리는데

가늘게 내리는 저녁 이슬이 옷깃을 적시네.

강 둑 길에 불 밝히고 개 짖는 소리 들리니

작은아이가 와서 주인이 돌아왔다 알리네. 

 

 

신광한 申光漢 1484-1555

본관 고령(高靈). 자 한지(漢之)·시회(時晦). 호 기재(企齋)·낙봉(駱峰)·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 시호 문간(文簡). 문장에 능하고 필력이 뛰어나 1507년(중종 2) 사마시를 거쳐 3년 뒤 식년문과에 급제,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 전교(典校)가 되었다.

1518년 신진사류(新進士類)로서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대사성(大司成)에 발탁되었으나 기묘사화에 연좌, 관직이 삭탈되었다.

1519년 만에 다시 등용, 이조판서로 홍문관 제학(提學)을 겸임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 우참찬(右參贊)으로 소윤(小尹)에 가담, 대윤(大尹)의 제거에 힘써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고, 같은 해 우찬성(右贊成)으로 양관(兩館)의 대제학을 겸임, 영성(靈城)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550년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3년 뒤에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에 《기재집(企齋集)》 《기재기이(企齋記異)》가 있다.

 

 

 

 子規啼 자규제

                                  신위 申緯

 

 梨花月白五更天  이화월백오경천  

 啼血聲聲怨杜鵑  제혈성성원두견  

 진覺多情原是病  진각다정원시병   

 不關人事不成眠  불관인사불성면         

 

배꽃에 달은 밝고 시각은 오경인데

피를 토하며 우는 소리는 두견새 울음이라네.

다정도 병인 것을 조금은 깨닫겠으니

세상사와 관계없는 데도 잠 못 이루네.

 

 參考事項-子規(자규):두견새

 

 

 

 

      觀劇詩-1 관극시   춘향전 공연을 보고

                                                신위 申緯

 

 春香扮得眼波秋 춘향분득안파추  춘향이 추파의 눈길로 분장하니

 扇影衣紋不自由 편영의문부자유  부채 그림자 옷 무늬가 부자유스럽네

 何物龍鐘李御史 하물용종이어사  어인 인물 못생긴 이어사인가

 至今占斷劇風流 지금점단극풍류  지금까지 연극 풍류를 독점하고 있네.

 

 

 

      觀劇詩-2 관극시    공연장을 보고

                                  신위 申緯

 

 激賞時時一聲哄 격상시시일성홍  

 廣庭人海疊人山 광정인해첩인산  

 今宵莫漫勤添炬 금소막만근첨거  

 早有雲頭掛月彎 초유운두괘월만  

 

몹시 상찬하다 때때로 한 번씩 소리쳐 대니

넓은 마당엔 인산 인해

오늘밤 부지런히 홰를 더해 게을리 말라

일찍부터 구름 머리에 초승달 걸려있다.  

 

 

 

      閏六月十五夜月極明  윤육월십오야월극명       

      윤유월 십오일 달밤

                                  신위 申緯

 

 明月尋人直入房 명월심인직입방 

 原無約束絶商量 원무약속절상량 

 那堪睡熟更深後 나감수숙경심후 

 獨轉廻廊過短墻 독전회랑과단장 

 

밝은 달이 사람을 찾아서 바로 방에 들어왔으나

원래 약속이 없어 생각도 못했소

어쩔 수 있겠소? 잠 깊이 들고 또 깊어 진 뒤

혼자서 회랑 돌아 낮은 담 지나가는 것을    

 

 

 

        紅燭淚 홍촉루   촛불의 눈물

                                                 신위 申緯

 

房中紅燭爲誰別방중홍촉위수별  방안에 타는 촛불 누구와 이별하고

風淚汎瀾自不禁풍루범란자부금  바람결에 흐르는 눈물 그칠 줄 모르네

 

畢竟怪伊全似我필경괴이전사아  필경은 이상함이 나와 꼭 같아

任情灰盡寸來心임정회진촌내심  본래의 속마음 다 타도록 버려두네  

 

 

 

      春日山居 춘일산거  산중에 살며

                                                신위 申緯

 

 縣市人心惡 현시인심악     도시는 인심이 사납고

 山村物性良 산촌물성량     산골은 물성이 후하네.

 茅柴三四屋 모시삼사옥     띠 지붕에 사립문 있는 서너 집

 鷄犬盡羲皇 계견진희황     닭과 개도 다 성인이네.      

 

 

신위(申緯;1769-1847) 

본관 평산(平山). 자 한수(漢戒). 호 자하(紫霞)· 경수당(警脩堂). 신동으로 소문이 나서 14세 때 정조(正祖)가 궁중에 불러들여 칭찬을 하였다.

1799년(정조 23) 문과에 급제, 벼슬은 도승지를 거쳐 이조 ·병조 ·호조의 참판에 머물렀으나, 당시 시(詩)·서(書)·화(畵)의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후세의 시인들도 그의 작시법(作詩法)을 본받았다. 필법(筆法)·화풍(畵風)도 신경(神境)에 이르렀으며, 아들 명연(命衍)이 부친의 유고를 거두어 문집을 엮었다.

저서로는 《경수당전고(警脩堂全藁)》 《분여록(焚餘錄)》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 등이 있다

 

 

 

   적川寺過方丈英禪師 적천사과방장영선사  영선 스님에게

 

                                         신유한 申維翰

 

掃石臨流水 소석림류수   돌을 쓸고 흐르는 물가에 닿아서

問師何處來 문사하처래   어느 곳에서 왔는지 스님에게 묻네.

師言無所住 사언무소주   머무는 곳이 없고

偶與白雲回 우여백운회   막연히 흰 구름과 더불어 돌아다닌다 하네.

 

 

신유한 申維翰 1681 - ?

본관 영해(寧海). 자 주백(周伯). 호 청천(靑泉).1713년(숙종 39) 문과에 급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통신사(通信使) 홍치중(洪致中)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다. 그후 벼슬이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에 이르렀으며, 문장에 능하고 걸작시(傑作詩)가 많다.저서에 《청천집(靑泉集)》 《분충서난록(奮忠降難錄)》 외에 일본을 다녀왔을 때의 기행문인 《해유록(海遊錄)》이 있다.

 

 

 

       木橋 목교   외나무다리

                                   신천 辛천

 斫斷長條跨一灘 작단장조과일탄  

 천霜飛雪帶驚瀾 천상비설대경란   

 須臾步步臨心意 수유보보림심의  

 移向功名宦路看 이향공명환로간   

 

긴 나무 찍어다가 여울물에 걸쳐놓으니

흩뿌리는 서릿발 눈보라에 세찬 물결을 띠네.

잠시 결으면서 마음 깊이 생각해보니

공명으로 향하는 벼슬길을 보는 듯하네.    

 

 參考事項- 驚瀾(경란):무섭게 밀려오는 큰 물결. 노도(怒濤). 須臾(수유):잠시, 조용한 모양

 

 

 

    塞下曲 새하곡     변방의 노래

                                     신흠 申欽

 

 沙적침침朔氣來  사적침침삭기래

 玉門關外是龍堆  옥문관외시룡퇴

 居人莫吹更羌笛  거인막취갱강적

 雁盡遼天客未廻  안진료천객미회

 

모래벌 어둡고 북방의 기운이 삭풍에 묻어 오는데

옥문관 밖의 이곳이 용퇴이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다시 오랑캐의 피리를 불지 마라

기러기 다 날아가버린 먼 하늘로 객들은 아직도 돌아가지 못했네.

 

 

 參考事項- 玉門關(옥문관)은 서역으로 통하는 중국의 국경관문

 

신흠 申欽 1566 - 1628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시호 문정(文貞).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인수(宋麟壽)의 딸이다. 어릴 때 소인수와 이제민(李濟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85년 진사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1593년 이조좌랑, 이듬해 이조정랑 사복시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올랐다. 그 후 형조참의 ·이조참의 ·예조참의 ·병조참의 ·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 ·병조참판 ·홍문관부제학 ·성균관대사성 ·도승지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판윤이 되었다. 1613년 계축화옥이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 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1616년 춘천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 즉위와 함께 예문관 ·홍문관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해 우의정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란하였으며,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1651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편서로는 《상촌집》 《야언(野言)》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낙민루기(樂民樓記)》《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有感 유감   느낌이 있어

                                 安裕 안유

 

 香燈處處皆祈佛 향등처처개기불   

 絲管家家競祀神 사관가가경사신   

 惟有數問孔子廟 유유수문공자묘     

 滿庭秋草寂無人 만정추초적무인   

 

여기저기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기원하고

집집마다 다투어 굿거리 장단이라네.

내 오직 공자묘를 물어보니

뜰 가득 가을 풀만 무성하고 사람은 없네

 

 參考事項- 絲管(사관):사죽(絲竹). 거문고와 퉁소. 현악기와 관악기

           夫子(부자):공자(孔子)의 존칭.

 

 

 

         思親 사친  친정 생각

                                 申師任堂 신사임당

 

 千里家山萬疊峯 천리가산만첩봉  

 歸心長在夢魂中 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孤輪月 한송정반고윤월  

 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鷺恒聚山 사상백로항취산  

 波頭漁艇各西東 파두어정각서동  

 何時重踏臨瀛路 하시중답임영로  

 綵服斑衣膝下縫 채복반의슬하봉   

 

천리 먼 고향 산은 만 겹 봉우리로 막혔으니

가고픈 마음 오래도록 꿈속에 있네

한송정 가에는 둥근 달이 둘이요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이로다

모래밭엔 백로가 늘 모였다 흩어지고

파도 위엔 고깃배가 각각 서쪽 동쪽으로 가는구나

어느 때 고향 길을 다시 밟아서

색동옷 입고 어머님 곁에서 바느질할까?     

 

 參考事項- 夢魂中(몽혼중):꿈길에서

 

 

 

 泣別慈母 읍별자모   어머님과 눈물로 이별하고

                                  申師任堂 신사임당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身向長安獨去情 신향장안독거정   

 回首北村時一望 회수북촌시일망   

 白雲飛下暮山靑 백운비하모산청   

 

늙으신 어머니는 백발 되어 강릉에 계시고

이 몸 서울로 홀로 떠나가네.

고개 돌려 때때로 북촌을 바라보니

흰 구름 날아 내리고 저녁산은 푸르기만 하네.

 

 

 

 參考事項- 鶴髮(학발):백발(白髮).

 

申師任堂 신사임당

본관(本貫)은 평산(平山)이고, 호(號)는 사임당(師任堂:思任堂:師妊堂)· 시임당(媤妊堂)·임사재(任師齋)이다.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이며,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침공(針工)·자수(刺繡)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漢詩)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화풍(畵風)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山水)·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작품으로 시(詩)에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사친(思親)》 등이 있고, 그림에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초충도(草蟲圖)》《노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등이 있다.

 

 

 

      哈爾濱歌 합이빈가   하르빈의 노래

                                       안중근 安重根

 

 丈夫處世兮 蓄志當奇 장부처세혜 축지당기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시조영웅혜 영웅조시

 北風其冷兮 我血卽熱 북풍기냉혜 아혈즉열

 慷慨一去兮 必屠鼠賊 강개일거혜 필도서적

 凡我同胞兮 無忘功業 범아동포혜 무망공업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세만세혜 대한독립

 

 대장부가 이 세상을 살아감이여 뜻을 모아 뛰어나게 대처하네

 시대이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이 시대을 만드네

 북풍이 그렇게 차기도 함이여 나의 피는 뜨겁다네

 의분 강개하여 한 번 떠남이여 반드시 쥐 같은 도적을 도살하리

 모든 나의 동포들이여 반드시 해야하는 일을 잊지마오

 영원하라 영원하라 외침이여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이여

 

안중근(安重根;1879-1910) 

본관 순흥(順興)이며, 아명 안응칠(安應七)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출생했다.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商)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인수,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鏡浦泛舟 경포범주  경포에 배 띄우고

                                安軸 안축

 雨晴秋氣滿江城 우청추기만강성 

 來泛片舟放野情 래범편주방야정 

 地入壺中塵不到 지입호중진부도 

 天遊鏡裏畵難成 천유경리화난성 

 烟波白鷗時時過 연파백구시시과 

 沙路靑驢緩緩行 사로청려완완행 

 爲報長年休疾棹 위보장년휴질도 

 待看孤月夜深明 대간고월야심명 

 

비 개니 강 언덕엔 가을 기운 완연하고

이 곳에 와서 조각배 띄우고 시골 정취 마음껏 누리네.

둘러싸고 있는 산이 호수에 잠기니 먼지도 일지 않고

구름이 거울 같은 호수에 비치니 그림으로 그리기 어렵네.

자욱한 물안개 위로 갈매기 날아가고

나귀는 느릿느릿 모래 사장을 가고 있네

늙은 사공 생각하여 빨리 노 젓지 말라 하고

홀로 뜬 달 비친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네.

 

 參考事項- 壺中(호중):항아리 속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호수의 한가운데를 이름.

 

 

 

登州古城懷古 등주고성회고  등주 엣 성에서 지난날을 회고함

                                              安軸 안축

 

 暮天懷古立城頭 모천회고립성두   

 赤葉黃花滿目秋 적엽황화만목추   

 不覺蕭墻藏近禍 불각소장장근화   

 惟憑海島作深謀 유빙해도작심모   

 百年丘? 無情草 백년구롱무정초   

 十里風煙有信鷗 십리풍연유신구   

 遙望朔方空歎息 요망삭방공탄식   

 一聲江笛使人愁 일성강적사인수   

 

날 저물어 옛일 생각하며 성 위에 올라서니

붉은 잎 노란 꽃이 눈에 가득 가을이네

쓸쓸한 집안에 숨은 가까운 근심 모르고

넓은 바다 섬에 의지해 깊은 꾀만 찾았네

백년 오랜 언덕엔 무정한 풀만 우거지고

십리 긴 바람 부는 안개 속을 백구가 나네

아득히 북방을 바라보며 부질없이 탄식하니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내 마음 서러워라.

 

 參考事項- 蕭墻(소장):군신(君臣)이 회견하는 곳에 쌓은 담.

 朔方(삭방):북방(北方).

 

安軸 안축 1287-1348

본관 순흥(順興). 자 당지(當之). 호 근재(謹齋). 시호 문정(文貞).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금주사록(金州司錄)·사헌규정(司憲糾正)·단양부주부(丹陽府注簿)를 거쳐,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성균학정(成均學正)·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가 되어 이때 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를 지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되었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고, 그뒤 내시(內侍)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 1344년(충혜왕 5) 밀직사지사에 이어 첨의찬성사, 1347년 정치도감판사(整治都監判事)로 양전(量田)에 관여하였다. 뒤에 민지(閔漬)가 만든 《편년강목(編年綱目)》을 개찬(改撰), 충렬 ·충선 ·충숙 3조(朝)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겨 문명(文名)을 날렸다

 

 

                                        출처-http://www.ok-hanmun.net/newhome/main-hansi.html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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