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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漢詩

한국한시 山中雨(설손) 외 도衣詞, 漁艇, 漁父, 途中. 賦絶命詩, 首陽薇

by 산산바다 2006. 12. 14.

산과바다

 

         山中雨 산중우     

         산에는 비 내리고

                                         설손(薛遜)

 

 一夜山中雨 일야산중우      밤새도록 산 속에 비 내리고

 風吹屋上茅 풍취옥상모      바람이 불어 띠 지붕을 들썩이네

 不知溪水長 부지계수장      개울에 물 불어나는 줄 몰랐는데

 只覺釣船高 지각조선고      문득 낚싯배 두둥실 떠오르네. 

 

 參考事項-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친 다음날의 고요한 전경을 노래한 시(詩)이다.

 

 


 

 擣衣詞 도의사  다듬이질 노래

                                          설손(薛遜)

 

 皎皎天上月 교교천상월    하늘의 달빛은 교교한데

 照此秋夜長 조차추야장    가을의 기나긴 밤 환히 비치네.

 悲風西北來 비풍서북래    소슬한 바람은 서북에서 불어오고

실솔鳴我床 실솔명아상     귀뚜라미 침상에서 울고 있네.

 君子遠行役 군자원행역    임께서는 머나먼 전쟁터에 가시고

 賤妾守空房 천첩수공방    나만 홀로 외로이 빈방을 지키네.

 空房不足恨 공방부족한    홀로 빈 방 지킴은 한될 것이 없으나

 感子寒無裳 감자한무상    추운데 임께서 입을 옷이나 있으신지.

 

 參考事項-(도의):다듬이 皎皎(교교):매우 희고 밝음. (실솔):귀뚜라미

 

설손(薛遜) 

명 백료손(百遼遜). 원나라 고창(高昌)에서 살던 위구르인으로 설련하(乾輦河)에서 살았으므로 성을 설(乾)이라 했고, 고조(高祖) 위래티무르[嶽璘帖穆爾]가 원나라에 귀화한 후 대대로 벼슬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강서행성 우승(江西行省右丞)을 지냈다. 원나라 순제(順帝) 때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한림 응봉문자(翰林應奉文字)· 선정원 단사관(宣政院斷事官) 등을 지냈고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가 되어 황태자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그후 승상(丞相) 함마(轝麻)의 시기로 지방관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에 원나라에 가 있을 때 알게 되었고, 한동안 대령(大寧)에 있다가 1358년(공민왕7)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에 귀화했고, 왕의 후대를 받았다. 그후 고창백(高昌伯)에 봉해지고 다시 부원후(富原侯)에 책봉되어, 부원(富原)에 토지를 받았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시인(詩人)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며, 아들 장수(長壽)도 문명이 높았다.

 

 

 

           漁艇 어정

                                      설장수 설長壽

 

 撒網群魚急 살망군어급    그물을 치니 고기떼가 놀라고

 回舟一棹輕 회주일도경    배를 돌리니 노질이 가볍네.

 却從紅蓼岸 각종홍료안    풀 우거진 강 언덕을 따라 돌아올 때

 齊唱竹枝聲 제창죽지성    어부들은 합창하며 즐겨하네.      

 

參考事項- 竹枝聲 (죽지성)는 죽지가(竹枝歌) 혹은 죽지사(竹枝詞)라 불리며 남녀의 사랑이나 지방의 민요의 일종임.

 

설장수 설長壽 1341 - 1399

본관 경주(慶州). 자 천민(天民). 호 운재(芸齋). 시호 문량(文良).

원나라 고창(高昌) 출생. 원래 위구르인(人)으로 1359년(공민왕 8) 아버지 손(遜)을 따라 귀화했다. 1362년 문과에 급제하고,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 있을 때 왜구에 대한 방어책을 피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어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이 되었다. 1387년(우왕 13)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388년(창왕 즉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우왕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공양왕 2)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승진했다. 이듬해 정난공신(定難功臣)이 되고,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개국에 참가하여 9공신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정몽주(鄭夢周)가 죽은 뒤 그 일당으로 몰려 해도(海島)로 귀양갔다. 조선 초 태조에 의해 등용되어 1396년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되고, 계림(鷄林: 慶州)을 본관으로 하사 받아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398년 정종이 즉위하자 계품사(計稟使)로 명나라에 가던 도중 명나라 황제가 죽어,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베이징[北京]에 갔다가 다음해에 돌아왔다.

시와 글씨에도 능했고 전후 8차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漁父 어부

                                   成侃 성간

 

 數疊靑山數谷烟 수첩청산수곡연 

 紅塵不到白驅邊 홍진부도백구변 

 漁翁不是無心者 어옹불시무심자 

 管領西江月一船 관령서강월일선         

 

첩첩 쌓인 청산에 골짜기마다 연기 오르고

세상과 닿지 않는 강변에 갈매기 날고

늙은 어부에게 어찌 감동이 없다 하겠는가

서강에 뜬 달빛을 배에 싣고 오네.

 

 參考事項- 管領(관령):거느려 다스림. 속세를 떠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선비의 모습을 노래했음.

 

 

 

       途中   도중

       길가는 중에

                                      成侃 성간

 

 籬落依依半掩     라락의의반엄경

 斜陽立馬問前程    사양립마문전정

 소然細雨蒼烟外    소연세우창연외

 時有田翁叱犢行    시유전옹질독행

 

울타리는 무너지고 사립문은 반이나 열려있어

기우는 해에 말을 세우고 길을 물어보네.

갑자기 가랑비 내리고 푸른 연기 피어오르니

때마침 늙은 농부가 송아지를 재촉하여 지나가네.

 

 參考事項- 소然(소연)은 빠른 모양.

 

成侃 성간 1427 - 1456

본관 창녕(昌寧). 자 화중(和仲). 호 진일재(眞逸齋). 1441년(세종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53년(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수찬(修撰)을 지냈다. 집현전(集賢殿) 박사(博士)로 문명(文名)과 서예(書藝)에 뛰어났으나 요절했다. 특히 시부(詩賦)에 뛰어나 《궁사(宮詞)》 《신설부(新雪賦)》등의 작품이 전하며 패관문학(稗官文學)에 속하는 《용부전(黛夫傳)》을 지었다고도 한다. 저서로 《진일재집(眞逸齋集)》을 남겼다.

 

 

 

      賦絶命詩 부절명시    

      죽음을 앞두고 지은 시

                                     성삼문 成三問

 

 擊鼓催人命 격고최인명    북소리 울려서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西風日欲斜 서풍일욕사    서쪽으로 부는 바람에 해가 지려하네

 黃泉無客店 황천무객점    황천길엔 주막도 없다고들 하는데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오늘밤에는 뉘 집에서 잘꼬?  

      

參考事項-日欲斜 (일욕사) ; 해가 지려고 함.

 

 

 

     首陽薇 수양미        

     백이 숙제의 지조를 부끄러이 여김

                                   성삼문 成三問

 

 當年叩馬敢言非 당년고마감언비 

 大義堂堂日月輝 대의당당일월휘 

 草木亦霑周雨露 초목역점주우로 

 愧君猶食首陽薇 괴군유식수양미 

 

말고삐를 잡고서 감히 잘못을 말하니

큰 뜻 당당함이 일월과 같이 빛났네.

풀과 나무 또한 주나라의 비와 이슬을 먹고사니

나 오히려 수양산의 고사리 먹음을 부끄러워하네.

 

 參考事項- 백(伯)과 숙(叔)은 장유(長幼)를 나타낸다.  본래는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 河北省 昌黎縣 부근)의 왕자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다.  그 무렵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멸하여 주왕조를 세우자, 두 사람은 무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서우양산[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성삼문(成三問;1418-1456) 

본관 창녕(昌寧). 자 근보(謹甫)·눌옹(訥翁).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사육신의 한 사람. 1438년(세종 20)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집현전 학사 ·수찬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신숙주 ·하위지 ·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 ·신숙주 ·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등과 함께 랴오둥[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하여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케 했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아버지 승(勝)· 박팽년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협의했으나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金綢)이 성사가 안 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밀고, 이개 · 하위지 · 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車裂)의 극형을 받았다.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 삼고(三顧)·삼성(三省) 세 동생과, 맹첨(孟詹)·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676년(숙종 2)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綠雲書院), 1681년 육신묘(六臣墓)가 있는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외에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의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6신과 함께 제향,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送僧之楓岳 송승지풍악

       금강산으로 가는 스님을 보내며

                                              성석린 成石璘

 

 一萬二千峰 일만이천봉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

 高低自不同 고저자불동    높고 낮음이 각기 다르구나

 君看初日出 군간초일출    그대는 보았는가 해가 솟아오름을

 何處最先紅 하처최선홍    그 어느 곳이 가장 먼저 붉어지는가

 

 參考事項- 日輪上(일륜상):해가 솟음. 금강산(金剛山)의 일출(日出)을 노래한 시이다.

 

 

 

       在固城寄舍弟 재고성기사제 

       고향에 대한 그리움

                                 성석린 成石璘

 

 擧目江山深復深 거목강산심복심  

 家書一字抵千金 가서일자저천금  

 中宵見月思親淚 중소견월사친누  

 白日看雲憶弟心 백일간운억제심  

 兩眼昏花春霧隔 양안혼화춘무격  

 一簪華髮曉霜侵 일잠화발효상침  

 春風不覺愁邊過 춘풍불각추변과  

 綠樹鶯聲忽滿林 록수앵성홀만임  

 

눈을 들어 바라보니 강산이 깊고 깊어

집에서 온 편지 글자마다 천금이네

한밤중에 달을 보며 부모 생각에 눈물짓고

한낮엔 구름을 보니 동생 생각이 나네.

두 눈은 침침하게 봄 안개가 가리고

비녀 꽂은 흰머리에 새벽 서리 덮쳤네.

봄바람이 불연듯 근심을 스쳐 지나가니

푸른 나무 꾀꼬리 소리 홀연히 숲에 가득하네.

 

 參考事項-華髮(화발):흰 머리, 노년(老年)을 일컬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시이다.

 

성석린(成石璘;1338-1423) 

본관 창녕(昌寧). 자 자수(自修). 호 독곡(獨谷). 시호 문경(文景).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한 후 학유(學諭)·전리총랑(典理摠郞)을 지냈다. 신돈(辛旽)과 대립,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좌천되고, 1384년(우왕 10)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수 양백연(楊伯淵)과 출전하여 적을 격퇴하고, 수성좌리공신(輸誠佐理功臣)이 되었다. 그 후 양백연의 옥사에 연좌되어 함안(咸安)의 수졸(戍卒)로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다.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공양왕을 내세운 공으로 찬화공신(贊化功臣)이 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이색(李穡)· 우현보(禹玄寶) 일파로 추방되었다. 그 후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 등을 거쳐 좌정승에 오르고,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진 후, 1415년 영의정이 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초서(草書)를 잘 써서 당대의 명필로 유명하였다.

 

 

 

          贈僧 증승               

          스님에게

                                            성혼 成渾

 

一區耕鑿水雲中 일구경착수운중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암자를 짖고

萬事無心白髮翁 만사무심백발옹  욕심 없이 신선처럼 살아가시네.

睡起數聲山鳥語 수기수성산조어  산새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杖藜閒步 花叢 장려한보요화총  지팡이 짚고서 꽃밭을 돌아보네. 

 

 參考事項-耕鑿(경착):밭을 갈고 샘을 파서 물을 마심.

 

 

 

       挽朴相國思庵 만박상국사암 

       제상 박 사암을 애도함

                                    성혼 成渾

 

 世外雲山深復深 세외운산심복심  

 溪邊草屋已難深 계변초옥이난심  

 杜鵑窩上三更月 두견와상삼경월  

 曾照先生一片心 증조선생일편심  

 

세상 밖 구름 낀 깊고 깊은 산 속

개울가의 초가집 찾기도 어렵네.

지붕 위의 두견새 우는 깊은 밤의 달이

일찍이 선생의 일편단심 비춰주고 있었네.

 

 

 

              偶吟 우음          

              우연히 읊다

                                  성혼 成渾

 

 四十年來臥碧山 사십년래와벽산   

 是非何事到人間 시비하사도인간   

 小堂獨坐春風地 소당독좌춘풍지   

 花笑柳眠閒又閒 화소류면한우한   

 

사십 년 동안 벽산에 머물러 살고 있고

옳건 그르건 무슨 일이 사람을 기만하든

조그만 집에 홀로 앉아있어도 봄바람 불고

꽃은 웃고 버들에 조수가 쉬니 끝없이 한가하네.

 

 

성혼(成渾)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源). 호 우계(牛溪)·묵암(默庵). 시호 문간(文簡).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 ·정철(鄭澈)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황신(黃愼)·이귀(李貴)·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602년 전일에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1523년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15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 《우계집》과 저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위학지방(爲學之方)》등이 있다.

 

 

 

         題尙左相畵안軸 제상좌상화안축

         기러기 그림에 붙여서

                                      소세양 蘇世讓

 

 蕭蕭孤影暮江  소소고영모강심  

 紅蓼花殘兩岸陰 홍료화잔량안음 

 漫向西風呼舊侶 만향서풍호구려 

 不知雲樹萬重深 부지운수만중심            

 

꽃은 웃고 버들에 조수가 쉬니 끝없이 한가하네.

붉은 여귀꽃은 지고 강변 언덕은 어두워지네.

서쪽을 향하여 옛 벗을 불러보나

구름 덮인 숲이 깊어 알지 못하네.

 

 

소세양 蘇世讓 1486 - 1562

본관 진주(晉州). 자 언겸(彦謙). 호 양곡(陽谷)· 퇴재(退齋)·

퇴휴당(退休堂). 시호 문정(文靖). 1504년(연산군 10) 진사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다. 정언(正言)을 거쳐 수찬(修撰) 때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했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 후에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다. 그후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에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기용되었다.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때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형조 ·호조병조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고, 1538년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 봉안했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내다가 사직, 익산(益山)에 은퇴했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양곡문집(陽谷文集)》, 글씨에 (楊州) 이 있다.

 

 

 

          金剛山 금강산   

                                               송시열(宋時烈)

 

 山與雲俱白 산여운구백     봉우리마다 흰 구름 덮여서

 雲山不辨容 운산불변용     구름과 산을 구분할 수 없네.

 雲歸山獨立 운귀산독립     구름이 돌아가고 산이 홀로 서있으면

 一萬二千峰 일만이천봉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라.         

   

 參考資料- 운山(운산):구름이 산에 덮여 있음.

 

송시열(宋 時烈)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심경석의(心經釋義)》 《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滿月 만월               

          보름달

                                   송익필 宋翼弼

 

 未圓常恨就圓遲 미원상한취원지  

 圓後如何易就虧 원후여하역취휴  

 三十夜中圓一夜 삼십야중원일야  

 世間萬事摠如斯 세간만사총여사              

 

둥글지 않을 때는 항상 둥글기를 한하고

둥글어진 후에는 어찌 그리도 쉬 이지러지는가

한 달 삼십일 중에 둥근 날은 하루 저녁인 것을

세상사 모든 일이 다 이와 같구나.

 

 

          山行 산행              

          산길을 걸으며

                                    송익필 宋翼弼

 山行忘坐坐忘行 산행망좌좌망행

 歇馬松陰聽水聲 헐마송음청수성

 後我幾人先我去 후아기인선아거

 各歸其止又何爭 각귀기지우하쟁 

 

산길 가면 앉기를 잊고 쉬었다가는 갈 일을 잊고

소나무 그늘에 말을 매고 물소리에 귀 기울이네.

나는 이 길을 몇 번이나 오갔는가

각기 죽음으로 돌아가는데 왜 다투며 사는가.

 

 參考事項- 歸其止(귀기지):무덤으로 돌아 간다는 뜻.

 

송익필(宋翼弼;1534-1599)

본관 여산(礪山). 자 운장(雲長). 호 구봉(龜峰)·현승(玄繩). 시호 문경(文敬). 서출(庶出)이라 벼슬은 못하였으나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학문을 논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통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백광홍(白光弘)·최립(崔酌)· 이순인(李純仁)·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고양(高陽)에서 후진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정엽(鄭曄)· 서성(徐敵)· 정홍명(鄭弘溟)· 김반(金槃)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지평(持平)이 추증되었으며, 문집에 《구봉집》이 있다.

 

                                       출처-http://www.ok-hanmun.net/newhome/main-hansi.html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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