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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漢詩

한국한시 贈醉客, 江臺卽事, 自恨, 春思(매창) 외

by 산산바다 2006. 12. 14.

산과바다

 

한국한시

               嶺南樓 영남루

 

 영남루에서

                                                     도원흥 都元興

金碧樓明壓水天 금벽누명압수천

昔年誰構此峯前 석년수구차봉전

一竿漁夫雨聲外 일간어부우성외

十里行人出影邊 십리행인출영변

入檻雲生巫峽曉 입함운생무협효

逐波花出武陵煙 축파화출무릉연

沙鷗但聽陽關曲 사구단청양관곡

那識愁心送別筵 나식수심송별연

 

고운 색채의 화려한 누각이 물에서 하늘로 솟아

지난날 어느 누가 이 봉우리 앞에 세웠는가.

지난날 어느 누가 이 봉우리 앞에 세웠는가.

어부는 낚싯대 하나 드리우고 밖에는 빗소리 들리고

먼 길 가는 행인은 산그늘 저 속이네.

밀려오는 구름은 험한 골짜기로 흘러들고

물결에 꽃잎이 무릉계곡 안개 속에 드는구나

모래톱의 저 갈매기 이별의 노래 양관곡을 들어도

수심 담은 송별의 자리인 줄 어찌 알아주리.

 

 參考事項- 陽關曲(양관곡) ; 원이(元二)가 안서(安西)로 사신갈 왕유(王維)가 지어부른 시(詩)로 서출양관무고인 (西出陽關無故人)이란 시(詩).

 

 

 

 

 贈醉客 증취객     취객에게 주다.

                                                            梅窓 매창

 

 醉客執羅衫 취객집나삼    취한 님 비단 옷소매를 잡았고

 羅衫隨手裂 나삼수수열    옷소매는 손길 따라 찢어졌네.

 不惜一羅衫 불석일나삼    비단옷이야 조금도 아까울 것 없으나

 但恐恩情絶 단공은정절    다만 정이 끊길까 두려워하네.

 

          參考事項- 但恐(단공) ; 다만 ~이 두렵다.

 

 

 

 江臺卽事 강대즉사       즉흥시

                                                         梅窓 매창

 

 四野秋光好 사야추광호 사방의 들녘에 가을빛이 좋아

 獨登江上臺 독등강상대 홀로 강 위의 대에 오르네.

 風流何處客 풍류하처객 풍류를 아는 나그네는 어디에서 왔는가.

 携酒訪余來 휴주방여래 술을 들고 나를 따라오네.

 

 

 

 自恨 자한          스스로 한탄함

                                                                 梅窓 매창

 

東風一夜雨 동풍일야우  봄바람 속에 밤새도록 비가 내리니

柳與梅爭春 유여매쟁춘  버들과 매화가 서로 싱그러움을 자랑하네.

對此最難堪 대차최난감  이 봄을 대하고 감당하기 가장 힘겨운 것은

樽前惜別人 준전석별인  술동이 앞에 놓고 사람을 이별하는 것이라네.

 

 

 

 春思 춘사             봄날의 생각

                                                           梅窓 매창

 

東風三月時 동풍삼월시  봄바람 부는 삼월이면

處處落花飛 처처락화비  곳곳에 꽃이 떨어져 날리네.

綠綺相思曲 록기상사곡  거문고로 상사곡을 타보지만

江南人未歸 강남인미귀  강남에서는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네.

 

 參考事項- 綠綺 (녹기)는 고대 중국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소유했던 거문고의 이름이다. 사마상여(司馬相如 BC179 - BC117)는 자는 장경(長卿).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 출생. 처음에 재물을 관에 기부하고 시종관이 되어 경제(景帝)를 섬기고 무기상시(武騎常侍)가 되었으나, 가끔 경제의 아우인 양(梁)나라 효왕(孝王)이 문인 추양(鄒陽)·매승(枚乘)·엄기(嚴忌) 등을 거느리고 사신으로 왔는데, 그것을 부러워하여 관직을 내놓고 손님으로서 양나라로 갔다. 얼마 안 되어 효왕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하고 궁한 생활을 하며 《자허부(子虛賦)》를 지었다.

 뒷날 《자허부》가 무제(武帝)의 상찬(賞讚)을 받은 것이 동기가 되어 시종관으로서 다시 무제를 섬기게 되었다. 그 뒤로 사부(辭賦)를 지어 바쳐, 동방삭(東方朔)·매고(枚皐)·엄조(嚴助) 등과 함께 무제의 사랑을 받았다. 무제가 서남을 개발할 때 진언하여 인정을 받아, 중랑장(中郞將)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때 실직한 일도 있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효문원령(孝文園令)이 되었다. 그가 지은 부(賦)는 본디 29편이었다고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기재되어 있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자허부》를 비롯하여 부 3편, 《유파촉격(喩巴蜀檄)》 등 4편이 있다.

 그 밖에 위작의 의심이 드는 《장문부(長門賦)》《미인부(美人賦)》 등이 있고,《사마문원집(司馬文園集)》(司馬長卿集이라고도 한다) 1권이 있다.

 그의 문학은 부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 초사(楚辭)를 조술(祖述)한 송옥(宋玉)·가의(賈誼)·매승(枚乘) 등에 이어 '이소재변(離騷再變)의 부(賦)'라고도 일컬어진다. 특징은 사물을 따르기보다 오히려 상상의 분방(奔放)함에, 간결하기보다 오히려 다변적(多辯的)인 데에 있다. 어휘는 세련되고, 구절은 균제(均齊)를 존중하고 화려하다. 대표작 《자허부》 및 그 후편 《상림부(上林賦)》는 자허(子虛), 오유선생(烏有先生), 망시공선생(亡是公先生) 등 세 명의 가공 인물의 사(辭)를 빌어 천자제후(天子諸侯)의 원유(苑駱), 수렵의 호화로움을 논하고, 끝으로 군주 절검(節儉)에 유의하여야 함을 설명하여 풍간(諷諫)의 뜻을 내포하는데, 그 풍간은 덧붙임일 뿐 '풍(諷) 백(百)에 대하여 권(勸)은 하나'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이 대화적(對話的) 형식에는 선례가 있지만, 그 수사존중(修辭尊重)의 풍(風)이 육조문학(六朝文學)에 끼친 영향은 크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탁문군(卓文君)과의 연애 사건이다. 고향에서 곤궁에 처해 있을 무렵 쓰촨성 린충[臨뱝]의 부호 탁왕손(卓王孫)에게 초대된 자리에서, 그 딸인 문군을 보자 연정을 품게 되어 청두로 사랑의 도피를 하였다. 두 사람의 생활은 극도로 가난하고 궁하여 수레와 말을 팔아 선술집을 차렸다. 문군이 술을 팔고, 상여는 시중에 나가 접시닦이 일을 하였다고 한다. 훗날 재산을 분양 받아 부유해진 상여는 정치적 야심은 없었다고 한다. 또, 그는 일찍부터 소갈증(消渴症)을 앓아, 만년에는 산시성[陜西省] 마오링[茂陵]에 칩거하였다. 무제에게 봉선(封禪)에 관하여 권한 《봉선문(封禪文)》은 유고(遺稿)로 남겨진 것이라고 한다.

 

梅窓 매창

성(姓) 이(李), 본명 향금(香今). 자 천향(天香), 호 매창(梅窓)·계생(桂生)·계랑(桂娘).부안(扶安)의 명기로서 가사(歌詞)·한시(漢詩)·시조(時調)·가무(歌舞)·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 다능한 여류 예술인이었다. 작품으로는 가사와 한시 등 70여 수 외에도 금석문(金石文)까지 전해지고 있으나, 작품집인 《매창집(梅窓集)》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1668년(현종 9)에 구전(口傳)하여 오던 작자의 시 58수를 모아 판각(板刻)한 것이 있다

 

 

 

送河南王使廓檢校 송하남왕사곽검교

왕사 곽 검교를 하남으로 전송하며

                                                       朴尙衷 박상충

 

分政河南獨摠戎 분정하남독총융

中興諸將盡趨風 중흥제장진추풍

乾坤整頓分高下 건곤정돈분고하

江海朝宗有會同 강해조종유회동

任重誰知伊尹志 임중수지이윤지

時危自許孔名忠 시위자허공명충

君歸好贊平南策 군귀호찬평남책

靑史應傳不世功 청사응전불세공

 

 나누어 다스리던 하남 땅을 홀로 지배하면

일어난 여러 장수 모두 다 굴복하네

천하를 평정하고 상하 질서를 세우면

이 세상 제후들 조공하려 모여든다네

맡은 일 막중하나 누가 이윤의 뜻을 알아주리

때가 위태하니 스스로 공명의 충성을 맡았네

이기고 돌아올 때 모두가 그대 하남평정책을 칭찬하면

세상의 뛰어난 공적 역사에 전하리

 

朴尙衷 박상충

본관(本貫) 반남. 자(字) 성부(誠夫). 시호(諡號) 문정(文正).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정랑(正郞)에 올라 향사(享祀)의 법식을 정리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성균관의 초기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자 신진 유생(儒生)으로서 친명파(親明派)에 가담하여,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親元派)에 대항하였다. 전교시판사 재임시에는 북원(北元)의 사신이 오자, 간관(諫官) 이첨(李詹) 등 친명파와 함께 북원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이인임 등의 사형을 주장하다가 도리어 친원파에 의하여 귀양갔으며, 그 도중에 죽었다. 경사(經史)·역학(易學)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다.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은 《사전(祀典)》을 썼다.

 

 

 

 訪曺處士隱居 방조처사은거

 조처사를 방문하여

                                                                                    朴淳 박순

 醉睡山家覺後疑 취수산가각후의

 白雲平壑月침時 백운평학월침시

 소然獨出脩竹外 소연독출수죽외

 石徑공音宿鳥知 석경공음숙조지

 

산 집에서 술 취해 한잠 자다 문득 깨어나니

흰 구름이 떠가고 달빛은 은은하네.

서둘러서 홀로 대숲을 빠져나가니

자갈길 대지팡이 소리에 새가 나네.

 

         參考事項-소然(소연):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 모양.

 

 

 

 

 

 送退溪先生南還 송퇴계선생남환

 귀향하는 퇴계선생을 따라서

 

 三十年來返故鄕 삼십년래반고향

 人亡宅廢又村荒 인망댁폐우촌황

 靑山不語春天暮 청산불어춘천모

 杜宇一聲來杳茫 두우일성래묘망

 一行兒女窺窓紙 일행아녀규창지

 鶴髮隣翁問姓名 학발인옹문성명

 乳號方通相泣下 유호방통상읍하

 碧天如海月三更 벽천여해월삼경

 

 삽 십 년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허물어지고 또 마을도 황폐하네

 청산은 말이 없고 봄날은 저물어가니

 뻐꾸기 울음소리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네

 줄지어 몰려온 아이와 여자들은 창문 뚫어 엿보고

 백발의 이웃 노인이 이름을 물어보네

 어릴 적 이름으로 겨우 알아보고 서로 눈물 흘리니

 푸른 하늘은 바다 같아 달은 삼경을 흘러가네.

 

 

 

 題二養亭壁 제이양정벽

 정자의 벽에 쓰다

 

 谷鳥時時聞一箇 곡조시시문일개

 匡床寂寂散群書 광상적적산군서

 可憐白鶴臺前水 가련백학대전수

 재出山門便帶  재출산문편대어

 

골짜기에는 새소리마저 때때로 들리고

침상은 적막하고 책들은 흩어져 있네.

가엾서라 백학대 앞을 흐르는 물이여.

이 산문을 나서면 바로 흙땅물이 되는 것을...

 

朴淳 박순

본관(本貫) 충주. 자(字) 화숙(和叔). 호(號) 사암(思菴). 시호(諡號) 문충(文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1553년(명종 8)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수찬(修撰)·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1555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그 뒤 한산군수(韓山郡守)·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14년간 재직하였다. 극심한 동서당쟁(東西黨爭) 속에서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편들다가 서인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하였다. 시(詩)· 문(文)· 서(書)에 모두 뛰어났으며, 시는 당시풍(唐詩風)을 따랐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사암문집》이 있다.

 

 

 

 舟中夜吟 주중야음           밤에 배에서 읊다

                                                        朴寅亮 박인량

 

 故國三韓遠 고국삼한원  고국인 삼한 땅은 아득히 멀고

 秋風客意多 추풍객의다  가을 바람에 나그네는 시름에 겹네.

 舟中一夜夢 주중일야몽  외로운 배에 실은 하룻밤 꿈길에

 月落洞庭波 월락동정파  달은 지고 동정호에 물결이 이네.

 

                參考事項- 중국(中國)에서 고국을 그리며 지은 시(詩)이다.

 

 

 

 

 伍子胥廟 오자서묘           오자서의 묘에서

 

 掛眼東門憤未消 괘안동문분미소

 碧江千古起波濤 벽강천고기파도

 今人不識前賢志 금인불식전현지

 但問潮頭幾尺高 단문조두기척고

 

동문에 걸린 눈알은 분이 삭지 않아

푸른 강은 그 넋인양 지금도 물결이네.

오늘날 사람들 선현의 뜻 알지 못하고

다만 물결 높이만 얼마인가 물어보네.

 

 參考事項- 이 시(詩)는 중국(中國)의 춘추시대(春秋時代) 협객(俠客) 오자서(伍子胥)의 고사(故事)를 내용으로 하여 지은 시(詩)이다.

 

朴寅亮 박인량 본관(本貫) 죽산. 자(字) 대천(代天). 호(號) 소화(小華). 시호(諡號) 문열(文烈).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다. 1075년(문종 29) 요(遼)나라가 압록강 동쪽을 국경선(國境線)으로 확정하려고 하자, 그 부당성을 지적한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요나라 왕이 그 문장의 훌륭함에 감탄하여,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뒤에 우부승선(右副承宣)·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1080년 유홍(柳洪)· 김근(金覲) 등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시문(詩文)으로 크게 찬탄을 받았으며, 중국인이 김근의 글도 곁들인 《소화집(小華集)》을 발간하기까지 하였다. 귀국하여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및 중추원동지사(同知事)를 지내고, 숙종 때 우복야참지정사(右僕射參知政事)에 이르렀다. 문장이 우아 미려하여,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다. 《고금록(古今錄)》 10권과 신라의 설화를 모은 《수이전(殊異傳)》 등이 있다.

 

 

 

 以烏 遣容齋 이오궤견용재        책상을 보내며

                                                        박은 朴誾

容齋寥落無長物 용재요락무장물

唯有平生萬卷書 유유평생만권서

獨倚烏皮對聖賢 독의오피대성현

晩風晴日鳥聲餘 만풍청일조성여

 

서재는 낡았으나 다른 물건은 없고

오직 평생을 읽어온 책만 가득하네.

홀로 책을 펴고 성현을 대하면

바람 부는 맑은 저녁에 새 소리도 여유롭네.

 

參考事項- 容齋 (용재)는 이 행(李 荇)을 가리킴 (이행 인물정보 참조)

 

박은 朴誾 1479 - 1504

본관 고령(高靈). 자 중열(仲說). 호 읍취헌(獵翠軒).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하여 15세 때 대제학 신용개(申用漑)의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진사가 되고 이듬해 17세로 문과(文科)에 급제,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승문원(承文院)에 발탁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수찬(修撰)을 역임하고 경연관(經筵官)으로 5년간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성준(成俊)·이극균(李克均)의 죄상을 연산군에게 직고했다가 그들의 모함으로 투옥되고 파직 당했다. 이 때부터 자연을 벗삼아 문학과 술로써 소일하며 독서에 열중하였고 1504년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 당했다. 조선시대에 으뜸가는 한시인(漢詩人)으로 꼽힌다.

1506년 신원(伸寃)되고 도승지(都承旨)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읍취헌유고》가 있다.

 

 

 

 

 曉坐書懷 효자서회          땅을 파 황금을 얻고

                                                                   朴齊家 박제가

 

 掘地得黃金 萬斤空餓死 굴지득황금 만근공아사

 入海採明珠 百斛換狗矢 입해채명주 백곡환구시

 狗矢尙可糞 明珠其奈何 구시상가분 명주기내하

 陸貨不通燕 海賈不輸倭 륙화불통연 해가불수왜

 譬如野中井 不汲將自渴 비여야중정 비급장자갈

 安貧不在寶 生理恐日拙 안빈부재보 생리범일졸

 太儉民不樂 太 民多竊 태검민불락 태구민다절

 

만 근이 되는 데도 부질없이 굶어 죽네

바다에 들어가 명주를 캐고 백 섬이나 되는 데도 개똥과 바꾸네

개똥은 오히려 거름으로 줄 수 있지만 명주는 그 어찌 하리요

육지의 재화는 연경과 통하지 않고 바다 장사꾼은 왜의 물건을 실어오지 않네

비유하자면 들판의 연못과 같고 긷지 않아 스스로 말라 버리려 하네

안빈낙도는 보물에 있지 않다고 하고 살아가는 이치가 날로 졸렬해질까 두렵네

지나친 검소 백성들 즐거워 않고 지나친 가난 백성들 훔침이 많네

 

 參考事項- 利用厚生學派(이용후생학파)에 속했던 박제가는 교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과 노력을 지적하고 있다. 타국과의 교역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함을 들판의 우물을 긷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는 비유를 통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물건을 잘 쓰지 않으면 그 물건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져 버려서, 결국 경제가 옹색해진다는 논리의 비유로 여겨진다.

 

 

 

 夜登平壤城 야등평양성       밤에 평양성에 오르다.

                                                朴齊家 박제가

 

長波夜動練光亭 장파야동련광정

白白城根倒亂星 백백성근도란성

冷月升空烟降地 랭월승공연강지

櫓鳴如織樹蒼靑 로명여직수창청

 

긴 물결이 밤에 연광정을 움직이고

물 속으로 하얗고 하얀 별들이 어지러이 거꾸로 박혀있네.

차가운 달은 하늘로 오르고 안개는 땅으로 내리는데

노 젖는 소리는 삐거덕거리고 숲은 울창하여 푸르네.

 

 

朴齊家 박제가

본관(本貫) 밀양(密陽). 자(字) 차수(次修)· 재선(在先)· 수기(修其). 호(號) 초정(楚亭)· 정유(貞)· 위항도인(葦杭道人).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 2)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 <내외편(內外篇)>을 저술, 이듬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그 뒤 진하사(進賀使)·동지사(冬至使)를 수행,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4년 춘당대(春塘臺) 무과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1798년 《북학의》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하고, 1801년(순조 1) 사은사를 수행,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저서에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貞詩稿)》 《유정집(亭集)》이 있다.

 

 

 

      元朝對鏡 원조대경       정월 초하룻날 아침 거울을 보며

                                                                     朴趾源 박지원

 

 忽然添得數莖鬚 홀연첨득수경수  갑자기 흰 수염이 여러 올 생겨났고

 全不加長六尺軀 전불가장육척구  내 몸은 여섯 자 키에 변함이 없네.

 鏡裏顔容隨歲異 경리안용수세이  거울 속의 얼굴은 해마다 달라지나

 穉心猶自去年吾 치심유자거년오  어릴 적 마음은 오히려 벼함이 없네.

 

 參考事項- 數莖鬚 (수경수) : 몇 개의 수염.

 

 

 

 極寒 극한       매우 추움

                                                          朴趾源 박지원

 

 北岳高戍削 북악고수삭  북악은 높아 깎아지른 듯하고

 南山松黑色 남산송흑색  남산의 소나무는 검은 빛이네.

 준過林木蕭 준과림목소  매가 지나가자 나무들이 움츠리고

 鶴鳴昊天碧 학명호천벽  학은 넓은 하늘의 푸름 속에서 우네.

 

 

朴趾源 박지원

본관(本貫) 반남(潘南). 자(字) 중미(仲美). 호(號) 연암(燕巖).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埋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題寒雲曉月圖 제한운효월도      그림에 씀

                                     박팽년 朴彭年

 

 紛紛衆卉覺芳辰 분분중훼각방신

 誰向窮陰風雪親 수향궁음풍설친

 植物無知猶爾許 식물무지유이허

 西山獨有採薇人 서산독유채미인

 

분분한 뭇 풀들도 꽃피는 봄을 아는데

누가 겨울의 눈바람과 친하겠는가?

풀과 나무는 오히려 알지 못하나

서산에 홀로 고사리 캐는 사람은 아네.

 

 參考事項- 芳辰 (방진)은 꽃피는 봄철 窮陰 (궁음)은 겨울의 끝자락 즉 섣달을 이름.

採薇人(채미인)은 고사리 캐는 사람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킴. 백(伯)과 숙(叔)은 장유(長幼)를 나타낸다. 본래(本來)는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 河北省 昌黎縣 부근)의 왕자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다. 그 무렵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멸하여 주왕조를 세우자, 두 사람은 무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서우양산[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박팽년 朴彭年 1417 - 1456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본관 순천. 자 인수(仁戒). 호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 형조판서 중림(中林)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集賢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김질(金綢)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아버지, 동생 대년(大年), 아들 3형제도 사형 당하였다. 그 뒤 과천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고, 숙종 때 복권되고 영조 때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글씨에《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이 있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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