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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漢詩

한국한시 寶泉灘卽事(김종직)외

by 산산바다 2006. 12. 14.

산과바다

백암산

 

 

한국한시

 

 

          寶泉灘卽事 보천탄즉사

          보천탄에서 읊음

                                                   金宗直 김종직

 

      桃花浪高幾尺許 도화랑고기척허  

      銀石沒頂不知處 은석몰정부지처

      兩兩  失舊磯 량량로자실구기  

      啣魚却入 蒲去 함어각입고포거   

 

      눈 녹은 물이 얼마나 불렀는가.

      흰 바위가 잠겨서 있던 곳을 알 수 없네.

      쌍쌍이 짝지은 물새는 옛 자리를 잃고

      물고기를 입에 물고 숲으로 들어가네.

 

 

 參考事項- 桃花浪 (도화랑)은 복사꽃 필 무렵에 눈이 녹아 불어난 물을 이름.

 

김 종직 金 宗直 1431 - 1492

본관 선산(善山). 자 계온(季渟)·효관(孝본). 호 점필재(米畢齋). 시호 문충(文忠). 경남 밀양 출생.

1453년(단종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교리(校理)·감찰(監察)·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米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瑜伽寺 유가사

                                                 김지대 金之岱

 

         寺在烟霞無事中 사재연하무사중  

         亂山滴翠秋光濃 난산적취추광농  

         雲間絶 六七里 운간절등육칠리  

         天末遙岑千萬重 천말요잠천만중 

         茶罷松 掛微月 다파송첨괘미월  

         講 風榻搖殘鍾 강란풍탑요잔종  

         溪流應笑玉腰客 계류응소옥요객  

         欲洗未洗紅塵  욕세미세홍진종  

         

         절은 안개 속에 평화로이 있고

         흩어진 산들은 가을빛이 짙어가네.

         구름 사이에 절벽 길 육칠리나 되고

         하늘과 이어진 산은 천만 겹이나 되네.

         차를 마시고 나니 달은 처마에 걸리고

         책을 읽고 나니 종소리가 들려오네.

         시냇물이 나비를 비웃고 있고

         티끌을 씻으려던 나비는 그대로 날아가네.

 

 參考事項- 積翠(적취) ;푸른 잎이 떨어짐. 玉腰(옥요) ; 나비

 

김지대 金之岱 1190 - 1266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초명 중룡(仲龍). 시호 영헌(英憲).선계(先系)는 김알지(金閼智)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일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아들 김은열(金殷悅)의 7세손, 고려 시중(侍中) 김여흥(金餘興)의 셋째아들이다. 고려 조정에서 오산군(鰲山君: 鰲山은 지금의 淸道)에 봉함에 따라 그의 후손들이 청도를 관향으로 삼았다. 1218년(고종 5)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되고, 이어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전라도안찰사 ·비서성소감(秘書省少監)·사재시판사· 동지공거(同知貢擧) 등을 지냈다. 1258년 몽골군이 북변을 침벌하자 추밀원첨서사(樞密院簽書事)로 승진되어 서북지방에 출진하여 서북 40여 성이 안정되었다.

1260년(원종 1) 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吏部尙書), 1261년 추밀원지사 ·지공거(知貢擧)를 지냈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로 올려 치사(致仕)하게 하고 오산군(鰲山君)에 봉하였다.

 

 

 

 

           訪俗離山 방속리산          

           속리산에 가서

                                                   김창흡 金昌翕

 

      江南遊子不知還 강남유자부지환  

      古寺秋風杖 閒 고사추풍장구한  

      笑別鷄龍餘興在 소별계룡여흥재  

      馬前猶有俗離山 마전유유속리산  

      

      강남의 나그네는 돌아올 줄 모르고

       옛 절의 가을바람에 지팡이 짚고 한가롭게 가네.

      웃으며 작별한 계룡산의 여흥이 남아있는데.

      말 앞에는 오히려 속리산이 보이네.

 

 

김창흡 金昌翕 1653 - 1722

본관 안동. 자 자익(子益). 호 삼연(三淵). 시호 문강(文康).

서울 출생. 영의정 수항(壽恒)의 셋째아들. 이단상(李端相)에게 수학하고, 1673년(현종 14) 진사가 되었으며, 1684년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진도(珍島)의 배소(配所)에서 사사되자 형 창집(昌集)·창협(昌協)과 함께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1721년(경종 1) 집의(執義), 다음해 세제시강원진선(世弟侍講院進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형 창협과 함께 이이(李珥)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된 형 창집이 사사되자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그 해에 죽었다.  1709년(숙종 35)부터 5~6년간이나 계속된 심성론(心性論)의 치열한 시비에서 호론(湖論)인 형과는 반대로 낙론(洛論)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역시 형과 함께 이황(李滉)과 이이를 절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죽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울진의 신계사(新溪祠), 강릉의 호해정영당(湖海亭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삼연집》, 저서에 《심양일기(瀋陽日記)》 《문취(文趣)》, 편서에 《안동김씨세보(安東金氏世譜)》가 있다.

 

 

 

             映湖樓 영호루        

             영호루에서

                                                  김흔

 

      十載前遊入夢淸 십재전유입몽청  

      重來物色慰人情 중래물색위인정  

      壁間奉繼嚴君筆 벽간봉계엄군필  

      堪咤愚我萬戶行 감타우아만호행  

      

      십 년 전에 놀던 일이 꿈 소에 선명한데

      돌아와 다시 보니 모든 것이 새롭네.

      벽에 받들어 써 둔 아버님 글 뜻을 이어받아

      못난 이 자식 벼슬길이 죄스럽네.

 

 

 參考事項- 嚴君(엄군) ; 아버지의 존칭. 엄부(嚴父) 萬戶(만호) ; 일만 가구가 사는 영지(領地)를 가진 제후(諸侯).

 

김흔(金?)  본관(本貫) 연안(延安). 자(字) 군절(君節). 호(號) 안락당(顔樂堂). 시호(諡號) 문광(文匡). 1468년(세조 14) 진사시에 장원, 1471년(성종 2)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에 등용되었다. 1478년 부교리가 되고 이듬해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으로 쓰시마섬[對馬島]에 이르렀으나 병이 나서 되돌아와 교리(校理)가 되었다. 1481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1484년 직제학에 승진되고, 1486년 시강관(侍講官)·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1490년 행부사과(行副司果)를 지냈다. 문집에 《안락당집》이 있다.

 

 

 

            奉使日本    봉사일본        

            일본으로 사신 가면서

                                                  羅興儒 나흥유

 

        千年古都三澣使 천년고도삼한사   

        萬里洪濤一葉舟 만리홍도일엽주  

        留滯東海驚歲暮 류체동해경세모  

        寂廖山月水明樓 적료산월수명누  

       

        천년의 오랜 나라 삼한의 사신이 되어

        수만리 거친 물결 작은 배에 몸을 실었네.

        바다에 머무는 사이에 벌써 한 해가 저물고

        산에 달이 걸리고 물 맑은 누각은 적적하여라.

 

 

參考事項- 三韓(삼한) ; 상고시대(上古時代)에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3부족사회(三部族社會).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말한다.

 

羅興儒 나흥유 본관(本貫) 나주. 호(號) 중순당(中順堂).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여 여러 번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서당을 열어 후진을 가르쳤다.

공민왕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영전도감판관(影殿都監判官)이 되어 공사를 잘 감독, 예의총랑(禮儀摠郞)이 되었다. 사재령(司宰令)을 거쳐 사농소경(司農少卿)이 되어 고려와 중국 지도를 만들고, 여러 왕조의 흥망과 국토 변천·연혁을 자세히 기록하여 왕에게 바쳤다. 고사(故事)에 밝아 이야기를 잘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374년(공민왕 23) 영전의 자재(資材)를 횡령한 혐의로 탄핵받고 파직되었다. 1375년(우왕 1) 전객시판사(典客寺判事)가 되어 자청하여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건너가, 왜구 출몰을 금하도록 요구하다 간첩 혐의로 구속되었다. 고려 출신으로 일본에 귀화한 승려 양유(良柔)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376년 일본 사신으로 파견된 양유와 함께 돌아왔다. 문집에 《중순당집》이 있다.

 

 

 

             警世 경세           

             세상 사람에 경계함

                                                  懶翁 라옹

 

       終歲役役走紅塵 종세역역주홍진  

       頭白焉知老此身 두백언지노차신  

       名利禍門爲猛火 명리화문위맹화  

       古今燒盡幾千人 고금소진기천인  

      

       세월이 다 가도록 힘겹게 이 세상 살아왔고

         머리가 희어짐을 어찌 알리 이 내 몸 늙어간다네

       이 세상 명예와 이익은 화가 되는 법이거니

       고금에 그 불길에 타 죽은 사람 얼마이던가.

 

 

 參考事項- 시인(詩人)은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로  인간의 삶이란 부귀(富貴)나 명리(名利)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교훈(敎訓)하고 있다.

 

懶翁 라옹 속성 아(牙). 초명 원혜(元慧). 호(號) 나옹(懶翁). 시호(諡號) 선각(禪覺). 영해(寧海) 출생.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서 득도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연경(燕京)의 고려 사찰인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견문을 더욱 넓히기 위해 중국 각지를 편력하며, 특히 평산 처림(平山處林)과 천암 원장(千巖元長)에게서 달마(達磨)로부터 내려오는 중국선(禪)의 영향을 받았다. 고려가 자주국가로서의 면모를 회복하고자 노력할 때, 나옹은 중국에서 선의 기개를 떨치고 1358년(공민왕 7) 귀국, 1361년 왕의 요청으로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사찰을 지켰는데, 그 뒤는 광명사(廣明寺)와 회암사(檜巖寺)에 머물렀다. 1371년 왕사(王師)가 되어 회암사에 있으면서, 1376년(우왕 2)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대혼란이 일자, 조정에서 밀양(密陽) 영원사(瑩源寺)로 이주하도록 하였는데, 가는 도중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죽었다.

 

 

 

               北征  북정            

               오랑캐를 치다.

                                                  남이(南怡)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 돌을 칼 가는데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을 말 먹여 다 없앴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 한다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말하리.

 

 

 

 

 

 參考事項- 대장부의 드높은 기상이 돋보이는 시이다. 이 시는 뒷날 예종 때에 유 자광에 의하여 무고 당하였다.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을 男兒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으로 고쳐서 모반을 도모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 때문에 남이는 28세의 나이에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유 자광과 그의 아들도 귀양가서 죽었다.

 

 

남이(南怡;1441-1468)  본관(本貫) 의령(宜寧). 시호(諡號) 충무(忠武). 태종의 외손(外孫)이다. 1457년(세조3) 약관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대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하자, 그에게 항상 질투를 느껴오던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모함하였다. 또한 남이가 여진토벌(女眞討伐) 때 읊은 시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속의 ‘미평국(未平國)’이란 글귀를 ‘미득국(未得國)’이라 하였다고 조작한 사실은 유명하다. 즉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 받아 영의정 강순(康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1818년(순조18)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西江寒食 서강한식       

             서강에서 한식을 맞으며

                                                    南孝溫 남효온

 

       天陰籬外夕烟生 천음이외석연생  

       寒食東風野水明 한식동풍야수명  

       無限滿船商賈語 무한만선상가어  

       柳花時節故鄕情 유화시절고향정  

      

        하늘이 흐리니 울 밖으로 연기 퍼지고

        한식이라 봄바람 불고 들에는 물도 맑네.

         배에 가득 물건 실은 장사치의 흥정소리 들리니

        고향의 버들잎 피어나는 모습 그립네.

 

            參考事項- 商賈語 (상가어) ; 장사치들이 지껄이는 소리.

 

南孝溫 남효온 1454 - 1492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 의령(宜寧). 자 백공(伯恭). 호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 시호 문정(文貞).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數汝昌)·김시습(金時習)·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478년(성종 9)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유랑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복위를 상소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였다. 만년에 저술한 《육신전(六臣傳)》은 빛을 못 보다가 숙종 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1713년(중종 8) 소릉이 추복(追復)되면서 신원(伸寃)되어 좌승지에 추증되고 1782년(정조 6)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 생육신의 창절사(彰節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추강집(秋江集)》《추강냉화(秋江冷話)》《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귀신론(鬼神論)》 등이 있다.

 

 

 

            碧亭待人 벽정대인      

            사람을 기다림.

                                                노수신 盧守愼

 

       曉月空將一影行 효월공장일영행 

       黃花赤葉正含情 황화적엽정함정 

       雲沙目斷無人問 운사목단무인문 

       倚遍津樓八九楹 의편진루팔구영 

      

       새벽달이 공허하게 그림자 하나와 가는데

         노란 국화와 단풍이 바야흐로 정을 함북 머금었네.

       구름 낀 모래 벌은 멀리 보이지 않고

         나루의 누각 기둥 여덟 아홉을 돌아가며 기대었네.

 

 

 參考事項- 碧亭 (벽정)은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노 수신 盧 守愼 1515 - 1590

본관 광주(光州). 자 과회(寡悔). 호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시호 문의(文懿)·문간(文簡). 1531년(중종 26) 이연경(李延慶)의 사위로 문하생이 되고,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1544년 시강원(侍講院) 사서가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大尹)으로서 정언(正言)이 되어 이기(李쉔)를 논핵, 파직시켰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이기와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그는 이조좌랑에서 파직, 1547년(명종 2)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가중처벌되어 진도(珍島)로 이배, 19년 동안 귀양살이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槐山)으로 옮겼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서 교리(校理)에 기용되어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나, 다음해 기축옥사 때 과거 정여립(鄭汝立)을 천거했다 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문장과 서예에 능하였고,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여 주자학파(朱子學派)의 격을 받았으며, 휴정(休靜)·선수(善脩) 등과도 교제하여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소재집》이 있다.

 

 

 

             宿水寺樓 숙수사루         

             수사루에 묶으며

                                                     魯璵 노여

 

       輕裝短帽一尋幽 경장단모일심유  

       蘭園依然十載遊 난원의연십재유   

       壁價幾年詩共重 벽가기년시공중   

       寺名千古水同流 사명천고수동류  

       寒堆岳色僧 戶 한퇴악색승경호  

       冷踏溪聲客上樓 냉답계성객상루  

       長嘯徘徊日云暮 장소배회일운모  

       倚欄回首起鄕愁 의란회수기향수  

       

       평상복에 짧은 모자 쓰고 경치 좋은 수사루를 찾아오니,

       사원은 십 년이 한결 같구나

       시 적힌 벽은 오랜 세월 시처럼 중하여 값지고,

       절 이름도 물과 함께 흐르네.

       산색이 차가워지니 스님은 문을 닫고,

       찬 물소리에 쓸쓸히 걸으며 객은 누각에 오르네.

       길게 읊조리며 여기 저리 걸어보니 날은 저물고,

        난간에 기대어 고개를 돌리면 문득 고향이 그립네.

 

 

          參考事項- 蘭院(난원) ; 절, 사원(寺院)

 

 

 

             寧越郡樓作 영월군누작  

             영월군의 누각에서 지은 시

                                                   단종 端宗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부궁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何奈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한 맺힌 한 마리 새가 되어 궁궐을 나와

       홀 몸 새 그림자 되어 산 속에 뭍혔네

       수많은 밤마다 잠을 설치고 잠 못 이루니

       어려움 겪는 원한의 세월 한이 그치지 않네

       울음도 그친 새벽에 달도 지려 하는데

       봄 골짜기에 피 흘러 떨어진 꽃도 붉어졌네.

       하늘은 귀먹어 원통한 한을 듣지도 못하니

       수심에 찬 사람의 귀만 밝음은 어찌 된 일인가

 

 

 參考事項- 聲斷曉岑(성단효잠): 소쩍새 소리가 새벽의 산에 끊어짐.

 

단종(端宗;1441-1457)  이름 홍위(弘暐). 문종(文宗)의 아들.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 비(妃)는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송현수(宋玹壽)의 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8년(세종 30)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다.

14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올랐는데, 그 전에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세자가 나이 어린것을 염려하여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세자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을 때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한편 집현전(集賢殿)의 학사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에게도 좌우협찬(左右協贊)을 부탁하는 유언을 내렸다. 그런데 1453년 그를 보필하던 황보 인 ·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제거당하자 수양대군이 군국(軍國)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14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重臣)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이 강요하여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은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1457년(세조 3) 12월 24일에 영월에서 죽었다.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성삼문 등의 6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 하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王位簒奪)을 분개하여 한평생을 죄인으로 자처(自處)한 김시습(金時習) 등 6명을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降封)은 200여 년 후인 1681년(숙종 7) 신원(伸寃)되어서 대군(大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단종이 목숨을 끊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이다.



 


            厭觸舍人廟 염촉사인묘     

            순교자(이차돈)의 사당

                                                 대각국사 大覺國師


       千里歸來問舍人 천리귀래문사인  

       靑山獨立幾經春 청산독립기경춘  

       若逢末世難行法 약봉말세난행법  

       我亦如君不惜身 아역여군불석신  

       

       천리 먼 길 돌아와 사람들에게 물으니

       청산에 나 홀로 여러 봄을 보냈다네.

       어려운 세상을 만나 불법을 행하기 어려우니

       나 또한 그대와 같이 이 한 몸 아끼지 않으리.


 

          參考事項- 厭觸 (염촉)은 신라(新羅) 불교(佛敎)의 순교자(殉敎者)인


 

이차돈(異次頓506-527)의 자(字) 자(字)를 염도(厭都)라고도 부르는데 또 다른 칭호는 거차돈(居次頓), 처도(處道)라고도 한다.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증손. 속성 박(朴). 법흥왕의 근신(近臣)으로서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벼슬은 내사사인(內史舍人)이었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재래의 토착신앙에 젖은

조신(朝臣)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신들의 의견에 반대, 불교의 공인(公認)을 주장하던 끝에, 527년 순교(殉敎)를 자청하고 나서 만일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異蹟)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그의 잘린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나 신하들도 마음을 돌려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산(北山)의 서령(西嶺:金剛山)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절이 창건되었다.  817년(헌덕왕 9) 국통(國統)·혜륭(惠隆) 등이 그의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대각국사 大覺國師-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 자(字) 의천. 시호(諡號) 대각(大覺). 이름 후(煦). 문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11살 때 왕사(王師) 난원(爛圓) 밑에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영통사(靈通寺)에서 난원으로부터 화엄(華嚴)의 교관(敎觀)을 배웠다. 1084년 미복(微服)으로 중국 송(宋)나라에 입국하여, 계성사(啓聖寺)에서 유성법사(有誠法師)에게 화엄 ·천태 양종의 깊은 뜻을 깨우친 뒤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공부하였다. 1086년 귀국하여 개경(開京)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송 ·요 ·일본 등에서 수집해 온 불경 ·유서(儒書) 등 4,700여 권을 교정 ·간행했다. 1095년(헌종 1)에는 화폐사용을 건의하여 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1097년 인예왕후의 원찰(願刹)인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자 주지가 되어 처음으로 천태를 강(講)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죽기 이틀 전에 국사(國師)에 책봉되었다. 고려의 불교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당시에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역설하고, 화엄종인 규봉(圭峰)의 학설로 고려의 교종을 통일한 후, 선종의 교리에 입각, 천태종을 개창하여 선종의 종파를 통합하고 원효(元曉)의 중심사상인 일불승(一佛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에 입각하여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 한국 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유학(儒學)에도 정통하였다. 저서에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석원사림(釋苑詞林)》《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등이 있다.


                                            출처 :http://www.ok-hanmun.net/newhome/main-hansi.html 한시감상 싸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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