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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漢詩

한국한시 桃園圖(김상한)외

by 산산바다 2006. 12. 14.

산과바다

 

 

              桃園圖 도원도

                                            金翔漢 김상한

 

 石瓦朱蘭玉洞天 석와주란옥동천    

 桃花亂落一溪烟 도화난락일계연    

 至今世上荒唐說 지금세상황당설    

 都在漁人好事傳 도재어인호사전    

 

기와집 붉은 난간 옥 같은 동천에

복숭아 꽃 어지러이 떨어져 온 개울 자욱하고

지금까지도 못 믿을 이야기가

어부들의 좋아하는 이야기로 전하여 오네.

 

 

 桃園(도원)

동진(東晉) 때의 시인 도잠(陶潛:자는 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한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을 가다 보니  물 위로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오는데 향기롭기 그지없었다. 향기에 취해 꽃잎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앞에 커다란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양쪽으로 복숭아꽃이 만발하였다.

수백 보에 걸치는 거리를 복숭아꽃이 춤추며 나는 가운데  자세히 보니 계곡 밑으로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그 동굴은 어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더니, 별안간 확 트인 밝은  세상이 나타났다. 그 곳에는 끝없이 너른 땅과 기름진 논밭,  풍요로운 마을과 뽕나무, 대나무밭 등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두리번거리고 있는  어부에게 그 곳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 모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부가 그들에게 궁금한 것을 묻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우리는 조상들이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식구와 함께  이 곳으로 온 이후로 한번도 이 곳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입니까?” 어부는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몇일 간을 머물렀다. 어부가 그 곳을  떠나려 할 때 그들은 당부의 말을 하였다.“우리 마을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그러나 어부는 너무 신기한 나머지 길목마다 표시를 하고  돌아와서는 즉시 고을 태수에게 사실을 고하였다. 태수는 기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곳을 찾으려 했으나  표시해 놓은 것이 없어져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유자기라는 고사(高士)가 이 말을 듣고 그 곳을 찾으려  갖은 애를 썼으나 찾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 곳을 찾으려 하지 않고, 도원경은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서양의 유토피아는 없는 곳이란 뜻이다.

도연명도 이상향으로 도원경을 그리며 인간이 찾을 수 없는  곳이라 말하고 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도 한다.

 

 

 

       路傍塚 노방총          

       길가의 무덤

                                       金尙憲 김상헌

 

 路傍一孤塚 로방일고총       길가에 있는 외로운 무덤 하나

 子孫今何處 자손금하처       자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惟有雙石人 유유쌍석인       오직 한 쌍의 석상이 있어

 長年守不去 장년수불거       긴 세월 떠나지 않고 지키네.

 

 

김 상헌 金 尙憲 1570 - 1652

본관 안동. 자 숙도(叔度). 호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어려서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하였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 ·시강원사서(司書)·이조좌랑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 선조 말년에는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모함할 때 같이 연루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의 외직으로 전보되었다.

광해군 대에도 북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그다지 뚜렷한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격렬히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폐모론(廢母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데다 광해군 말년에는 연이어 부모상을 맞아 물러나 있어야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나가 대사간 이조참의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은 5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도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1638년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면서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에 분연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 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 차례 은퇴의 뜻을 밝히면서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야인담록(野人談錄)》 《독례수초(讀禮隨褻)》 《남사록(南?寢?)》 등이 있고, 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이 간행되었다.

 

 

 

 述樂府辭 술악부사

                                             金守溫 김수온

 

十月層氷上 십월층빙상     시월의 두꺼운 얼음 위에

寒凝竹葉棲 한응죽엽서     댓잎으로 이부자리 삼아

與君寧凍死 여군영동사     그대와 내가 얼어죽을지언정

遮莫五更鷄 차막오경계     새벽 닭아 울지 말아다오.

 

 

 參考事項- 遮莫(차막) ; 훼방하지 말라. 고려 속요 이상곡(履霜曲)을 한역한 것으로 사랑을 노래했다.

 

金 守溫 김수온 1410 - 1481

9본관 영동(永同). 자 문량(文良). 호 괴애(乖崖)·식우(拭渡). 시호 문평(文平). 1438년(세종 20)에 진사가 되고,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있을 때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集賢殿)에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였으며, 1445년(세종 27)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서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에 참여하고,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을 때는 《석가보(釋迦譜)》를 증수(增修)하였다. 1449년(세종 31)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고, 1451년(문종 1) 전농시소윤(典農寺少尹)이 되었으며, 1457년(세조 3)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가 되었다. 1459년 한성부윤(漢城府尹),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하였고, 같은 해에 실시된 등준시(登俊試)에 다시 급제하여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에 오르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어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74년(성종 5)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서거정(徐居正)·강희맹(姜希孟) 등과 문명(文名)을 다투었으며,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고,《명황계감(明皇誡鑑)》을 국역(國譯)하는 등 국어 발전에 힘썼다. 세종 ·세조 등 불교를 숭상하는 임금을 도와 불경(佛經)의 국역(國譯)과 간행(刊行)에도 공이 컸다.

문집에 《식우집(拭渡集)》이 있다.

 

 

 

 

 

         山行卽事 산행즉사      

         산길에서

                                        金時習 김시습

 

兒捕蜻蜓翁補籬 아포청정옹보리
小溪春水浴鸕鶿 소계춘수욕로자
靑山斷處歸程遠 청산단처귀정원
橫擔烏藤一箇枝 횡담오등일개지

 

 아이들은 잠자리 잡고 늙은이는 울타리를 고치고

 

 작은 봄 물가에는 물새가 한가롭게 노니네.

 

 푸른 산이 길을 막아 돌아갈 길 멀고

 

 검은 등나무 가지 꺾어 어깨에 걸쳐 매네.

 

 

 

       乍晴乍雨 사청사우       

       개었다가 다시 또 비 내리네

 

    乍晴乍雨雨還晴 사청사우우환청 

    天道猶然況世情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예아편시환훼아 

    逃名却自爲求名 도명각자위구명 

    花開花謝春何管 화개화사춘하관 

    雲去雲來山不爭 운거운래산불쟁 

    寄語世人須記認 기어세인수기인 

    取歡無處得平生 취환무처득평생 

 

 잠시 개었다, 비 내리고 다시 개었다가 비 내린다.

 

 하늘도 이러한데 하물며 세상인심임에랴!

 

 나를 기리던 이 곧 도리어 나를 헐뜯으니

 

 명예를 외면하던 이 도리어 공명을 구하네.

 

 꽃이야 피든 지든 봄이야 무근 상관이랴!

 

 구름이 오고 가도 산이야 다투지 않네

 

 세상 사람에 이르노니 모름지기 알아두소

 

 기쁨을 얻어도 평생토록 누릴 곳은 없다는 것을

 

 

 參考事項- 猶然(유연):오히려 그렇다. 逃命(도명):이름을 숨기고 도피함.

 

 

 

         有客 유객        

         나그네

 

 有客淸平寺 유객청평사   청평사에 들린 나그네

 春山任意遊 춘산임의유   봄 산에서 한가로이 노닌네

 鳥啼孤塔靜 조제고탑정   고요한 탑에서 새는 울고

 花落小溪流 화락소계류   흐르는 냇물에 꽃잎이 흘러간다네

 佳菜知時秀 가채지시수   좋은 나물 때를 알아 돋아나고

 香菌過雨柔 향균과우유   향긋한 버섯 비 맞아 부드럽네

 行吟入仙洞 행음입선동   시를 읊조리며 선동에 들어서니

 消我百年憂 소아백년우   나의 백년 근심이 사라지네.

 

 

 參考事項-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죽음으로 현실에 좌절감을 느낀  시인이 정처 없이 산 속을 방랑하는 모습을 그린 시이다.  고요한 탑 위에서에서 산새는 울고 흐르는 냇물에 꽃잎이 흘러가는 곳 좋은 나물과 향기로운 버섯이 돋아나는 곳 이러한 곳에서야말로 자신의 깊은 시름을 사라지게 한다는 뜻을 노래했다.

 

 

 

       盆城贈別 분성증별       

       헤어지며 주다.

                                        金安國 김안국

 

  燕子樓前燕子飛 연자루전연자비 

  落花無數惹人衣 낙화무수야인의 

  東風一種相離恨 동풍일종상이한 

  腸斷春歸客又歸 장단춘귀객우귀 

 

 연자루 앞에 제비는 날고

 떨어지는 꽃잎은 무수히 사람의 옷에 나부끼네

 봄바람이 한 번 이별의 한을 심어 놓으니

 애끊는 봄이 가고 그대마저 또 돌아가네.

 

 

 參考事項- 盆城(분성):김해의 옛 이름

 

金安國 김안국

본관(本貫) 의성(義城). 자(字) 국경(國卿). 호(號) 모재(慕齋). 시호(諡號) 문경(文敬).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사림파(士林派)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0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부수찬 ·부교리 등을 지내다가 150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장령(掌令)·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거쳐, 1517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성리학의 실천 ·보급에 주력하여 각 고을의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보급하고, 각종 농서와 의서(醫書)도 널리 간행하여 향촌민들을 교화시키는 데 힘을 썼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성리학의 실천적 입장을 중시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실각하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37년 재등용되어 이후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천문과 병법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닥나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드는 방법도 연구하였다.

성리학을 이념으로서만이 아닌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의미를 중시한 학자였으나, 조광조와 같은 급격한 정치개혁에는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인종(仁宗)의 묘정에 배향되고, 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 이천(利川) 설봉서원(雪峰書院),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모재집》, 편서에 《창진방(瘡疹方)》 등이 있다.

 

 

 

      賀新承宣李公老 하신승선이공로

      새 승선 이공로를 축하함 

                                          金仁鏡 김인경

   千里書回一雁天 천리서회일안천

   新承宣代舊承宣 신승선대구승선

   不才見 雖堪愧 부재견빈수감괴

   猶向皇朝賀得賢 유향황조하득현

 

 멀리 답신을 보내는데 하늘에는 한 마리 기러기 날고

 새로 오는 승선이 옛 승선을 대신하네.

 재주 없는 나는 비록 부끄러움을 참고 인도하지만

 오히려 조정을 향해 어진 사람 얻은 것을 칭송하리.

 

 

 參考事項- 李公老 (이공로 ? - 1224) 본관 단산(丹山:丹陽). 자 거화(去華).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안변판관(安邊判官)으로 사재를 털어  민부(民賦)를 대신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어 사의서승(司儀署丞)이  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219년(고종 6) 의주(義州)의 한순(韓恂)이 반란을 일으키자 선무사(宣撫使)가 되었으며, 1222년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변려문(폿儷文)이 뛰어났다.

 

金仁鏡 (김인경 ? - 1235)

본관 경주. 시호 정숙(貞肅). 초명 양경(良鏡).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고종 초에 조충(趙只)이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을 토벌할 때, 판관(判官)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예부낭중(郞中)·추밀원우승선(右承宣)을 거쳐, 1227년(고종 14) 수찬관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撰修)하였다. 그해 동진(東眞)이 쳐들어오자, 중군병마지사가 되어 의주(宜州:德源)에서 싸우다 패전, 상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얼마 뒤 형부상서, 한림학사에 오르고, 추밀원지사 ·상서좌복야(樞密院知事尙書左僕射) 등을 역임하였다. 1232년 강화로 천도한 이듬해 왕경유수병마사(王京留守兵馬使)가 되고, 정당문학 ·이부상서 ·감수국사(政堂文學吏部尙書監修國史)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문무를 겸하였으며, 일반 행정에도 뛰어났다. 특히 시에 능하고 예서(隸書)를 잘 썼다.

 

 

 

 

 

       題 庵詩卷 제충암시권

       충암의 집에서

                                            金麟厚 김인후

 

   來從何處來 래종하처래     오기는 어디에서 오고

   去向何處去 거향하처거     가기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

   去來無定  거래무정종     가고 오는 길을 모르니

   悠悠百年計 유유백년계     백년의 계획이 아득하네.

 

 

 參考事項 - 庵 (충암)은 김 정(金 淨)의 호(號).

 

김인후 金麟厚 1510-1560

본관 울산.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담재(澹齋). 시호 문정(文正).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龍宮閑居次金蘭溪得韻培  용궁한거차김난계득배운

     용궁촌에서 난계 김덕배의 시에 화답하여           

                                                元發 김원발

 

 江闊修鱗縱 강활수린종     강은 넓어 고기 떼 지어 오락가락하고

 林深倦鳥歸 임심권조귀     숲은 깊어 지친 새들 날아드네

 歸田是吾志 귀전시오지     시골로 돌아가는 것이 나의 마음이고

 非是早知機 비시조지기     세상 일 괴로운 줄 알고 있었네.

 

 

 

 韓山客館 한산객관

                                              김자수 金自粹

 

 東國文章集大成 동국문장집대성  우리나라 문장가는 그 누구인가

 稼亭父子冠群英 가정부자관군영가정 부자가 그 중에서도 뛰어나네.

 山川盈秀今猶古 산천영수금유고  산천은 그때나 다를 바 없는데

 且問何人從姓名 차문하인종성명  그 뒤를 이을 사람 그 누구인가?

 

 

 參考事項- 한산에서 출생(出生)한 이 곡과 이 색 부자의 뛰어난 문장을 기린 시이다.

 

김자수 金自粹

본관 경주. 자 순중(純仲). 호 상촌(桑村).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우왕 때 왜적 격퇴의 전공으로 포상을 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대해 회교(回敎)를 작성하라는 왕명을 받고, 이를 거절한 죄로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전교부령(典校副令)·사재시판사(司宰寺判事)에 이르고, 공양왕 때 대사성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숭불(崇佛)의 폐해를 지적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 중지를 상소하였다. 뒤에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좌상시(左常侍)·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종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려가 망한 것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卽事 즉사          

           즉흥시

                                                                                   金淨 김정

 

 落日臨荒野 락일림황야     황량한 벌판에 해가 지는데

 寒鴉下晩村 한아하만촌     굶주린 까마귀가 저무는 마을에 내리네.

 空林煙火冷 공림연화랭     빈 숲에 밥짓는 연기 차갑고

 白屋掩柴門 백옥엄시문     오두막집은 사립문 닫혀있네.

 

 參考事項- 寒鴉 (한아)는 굶주린 까마귀.  煙火 (연화)는 인가에서 나는 연기 즉, 밥짓는 연기  白屋 (백옥)은 띠 집 혹은 가난한 집.

 

김 정 金 淨 1486 - 1520

본관 경주. 자 원충(元只). 호 충암(只菴). 시호 문간(文簡). 10세 전에 사서(四書)에 통하고,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에 합격,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순창군수 등을 지냈으며,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폐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고자 상소하였으나 각하되고 유배당하였다. 1516년(중종 11) 다시 등용되어, 부제학(副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미신타파·향약(鄕約) 시행 등에 힘썼으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뒤에 사사(賜死)되었다.시화(詩畵)에 능하였다. 문집에 《충암문집》, 저서에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등이 있다

 

 

 

         途中 도중            

         송도 가는 길에

                                                                    金正喜 김정희

 

   山山紫翠幾書堂 산산자취기서당  

   籬落句連碧澗長 이락구연벽간장   

   野笠卷風林雨散 야립권풍림우산  

  人蔘花發一村香 인삼화발일촌향   

 

     산마다 자취의 서당이 몇개인가

     울타리에 시 읽는 소리 푸른 냇물 같이 기네.

     들 삿갓에 바람 불고 숲에는 비가 오는데

     인삼 꽃 피어 한 마을이 향기롭네.

 

 參考事項(참고사항) 紫翠(자취) ; 자주빛과 비취색 籬落(리락) ; 울타리.

 

 

 

          秋庭 추정          

          가을 뜰

 

 老人看黎席 노인간려석    노인은 기장 널린 멍석을 지켜보고

 滿屋秋陽明 만옥추양명    집 안 가득 가을볕이 밝네

 鷄逐草蟲去 계축초충거    닭은 풀벌레를 뒤쫓아 다니고

 菊花深處鳴 국화심처명    국화는 깊은 곳에서 울어대네.

 

 

김정희 金正喜

본관(本貫) 경주. 자(字) 원춘(元春). 호(號)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 다수가 있다. 충남 예산 출생. 1809년(순조9) 생원이 되고, 1819년(순조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서화(書畵)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 ·서 ·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1840년(헌종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다.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寄無說師 기무설사            

        무설사에게 보냄

                                                김제안 金齊顔

 

世事紛紛是與非 세사분분시여비    부질없는 세상은 어지러운 시비 뿐이고

十年塵土汚人衣 십년진토오인의    십 년 벼슬 길에 이 몸 때만 묻었네.

花落啼鳥春風裏 화락제조춘풍이    꽃 지고 새 우는 봄바람 속에

何處靑山獨掩扉 하처청산독엄비    청산 어딘가에 난 홀로 살고 싶네.

 

 

 參考事項- 紛紛(분분): 어지러움, 의견이 많은 모양

 

김제안(金齊顔?-1368) 

본관 안동. 자(字) 중현(仲賢). 명장(名將) 방경(方慶)의 증손이다.

문과에 급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 등과 사귀었다. 1364년(공민왕 13) 좌정언(左正言)으로 있을 때 변공(邊功)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특진한 한휘(韓暉)·이구수(李龜壽)의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다가 왕명으로 서명하고 파직되었다. 1366년 군부좌랑(軍簿佐郞)으로 전녹생(田祿生)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하남왕(河南王) 쿼쿼티무르[擴廓帖本兒]에게 국서(國書)를 전달한 공으로 대언(代言)에 임명되려 했으나, 신돈(辛旽)의 저지로 좌천된 후 전(前)밀직부사(密直副使) 김정(金精) 등과 함께 신돈을 모살(謀殺)하려다가 잡혀 죽었다.

 

 

                                             출처 : http://www.ok-hanmun.net/newhome/main-hansi.html 한시감상 싸이트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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