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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漢詩

한국한시 龍山(김득신) 외

by 산산바다 2006. 12. 13.

산과바다

 

 

 

                  龍山 용산

 

                                                                     金得臣 김득신

 

 古木寒炯裏 고목한형리   고목은 차가운 불빛 속에 서있고

 秋山白雨邊 추산백우변   가을의 산은 소나기 끝에 있네.

 暮江風浪起 모강풍랑기   저물어 가는 강변에 풍랑이 일고

 漁子急回船 어자급회선   어부들이 급히 배를 돌리네.

 

김 득신 金 得臣 1604 - 1684

본관 안동(安東). 자 자공(子公). 호 백곡(栢谷)· 귀석산인(龜石山人).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안풍군(安豊君)으로 습봉(襲封)되었다.

후에 화적(火賊)에게 살해되었으며, 당시 시명(詩名)이 있었다.

저서에 《백곡집(栢谷集)》 《종남총지(終南叢志)》 등이 있다.

 

 

 

 

           上元俚曲 상원이곡 

 

                                                                  金려 김려

 

 元宵月色劇淸圓 원소월색극청원   정월 보름날 밤 달빛은 지극히 맑고 둥근데

 先見生男古老傳 생견생남고노전   먼저 보면 아들 낳는다고 노인들이 전하네

 抵事南隣老處子 저사남린노처자   무슨 일로 저 남쪽 이웃 노처녀는

 背人無語淚泫然 배인무어루형연   사람들을 등지고 말없이 눈물만 흘리나


金 ?  김 려 1766 ~ 1822

본관 연안(延安). 자(字) 사정(士精). 호(號) 담정(稔庭). 1791년(정조 15) 생원이 되고, 이후 청암사(靑巖寺)·봉원사(奉元寺) 등에서 독서하다가, 1797년 강이천(姜彛天)의 비어(飛語)사건에 연루되어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가난한 농어민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갖게 되어, 이것이 이후 그의 문학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그곳의 부기(府妓)와도 어울리며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한 시를 지어, 필화(筆禍)를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지방의 자제들을 교육하여, 그들이 겉만 화려한 벌열(閥閱)보다 우수함을 강조하고 벌열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1799년 다시 필화를 당하였으며 이때 그의 저서가 대부분 분서(焚書)되는 화를 입었다.

1801년(순조 1) 강이천 비어사건의 재조사에서 천주교도와 교분을 맺은 혐의로 다시 진해(鎭海)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어민들과 지내면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지었다. 이는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와 더불어 어보의 쌍벽을 이룬다. 1806년 아들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려나, 1812년 의금부를 시작으로 정릉참봉(靖陵參奉)·경기전영(慶基殿令)·연산현감을 거쳐 함양군수 재직중 죽었다.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 문장의 대표적 인물로 이옥(李鈺) 등과 교유하였으며, 김조순(金祖淳)과 함께 《우초속지(虞初續志)》라는 패사소품집을 낸 바 있다. 저서에 《담정유고(潭庭遺稿)》 《담정총서(潭庭叢書)》《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창가루외사(倉可樓外史)》 등이 있다.

 

 

 

 

 

             蛇龍 사룡         용과 뱀

                                                                   金萬重 김만중

 

   有蛇啣龍尾 유사함용미    뱀이 있어 용의 꼬리를 물고

   聞過太山岑 문과태산잠    큰 산기슭을 지나갔다고 들었네.

   萬人各一語 만인각일어    모든 사람이 각자 한마디씩 하니

   斟酌在兩心 짐작재량심    두 가지 마음이 있으니 잘 살피리.

 

김만중 金萬重 1637 - 1692

본관 광산(光山). 자 중숙(重叔). 호 서포(西浦). 시호 문효(文孝).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 ·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대제학,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여기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한 뒤 병사하였다. 《구운몽》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16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저서에 《구운몽》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서포집(西浦集)》 《고시선(古詩選)》 등이 있다.

 

 

 

 

         題福州映湖樓 제복주영호누     복주 영호루에서

                                                                               金方慶 김방경

 

 山水無非舊眼靑 산수무비구안청   산도 물도 예전에 보던 그대로 푸르고

 樓臺亦是少年情 누대역시소년정   누대도 역시 어릴 적 생각케 하네

 可憐故國遺風在 가련고국유풍재   다행히도 고국의 풍습이 남아 전하니

 收拾絃歌慰我情 수습현가위아정   악기 잡고 노래하며 내 마음 달래보네

 

  參考事項- 眼晴(안청) : 기뻐하는 눈, 눈이 귀여움

 

金方慶 김방경 1212-1300

본관 안동(安東). 자(字) 본연(本然). 시호(諡號)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며, 음보(蔭補)로 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1248년(고종 35)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골의 침입으로 주민들과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농토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다. 1263년(원종 4) 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에 승진되고 후에 상장군(上將軍)으로 있다가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으나 곧 서북면병마사가 되었다.

형부상서(刑部尙書)·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1269년(원종 10)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元宗)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峻)을 세우자 원나라 세조(世祖)가 보낸 맹격도(孟格圖)의 2,000명의 군사와 협력하여 임연을 치려고 동경(東京)에 이르렀으나 왕이 복위된 것을 알고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갔다. 1270년(원종 11)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이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들어가 연안을 침범하자, 이듬해 몽골의 장군 흔도(熊都)·홍다구(洪茶丘) 등과 함께 진도를 함락시키고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耽羅)에 들어가서 항전하자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흔도 ·홍다구와 함께 또다시 삼별초를 쳐서 완전히 평정하였다. 1274년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합포(合浦:馬山)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정하여 2만 5000여 명의 여 ·원연합군(麗元聯合軍)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을 공략하고 일본 본토로 향하던 도중 규슈[九州]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1281년(충렬왕 7) 원나라가 다시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 도원수로서 종군하여 이키섬[壹岐島]을 공략하고 하카타[博多]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번에도 태풍과 전염병으로 실패하고 돌아와 벼슬을 사양하고,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삼중대광 ·첨의중찬 ·전리사판사 ·세자사로서 물러나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다. 충직하고 근검하였으나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하고 일본 정벌 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 등으로 상하 민심을 잃어, 89세로 병사하였을 때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고 고향 안동(安東)에서 장례를 지냈다. 충선왕(忠宣王) 때 다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추증되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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