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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漢詩

한국한시 書大同江船窓(권한공) 외

by 산산바다 2006. 12. 13.

산과바다

 

 

 

書大同江船窓 서대동강선창   대동강 선창에서

 

                                                                             權 漢功 권한공

 

 

 

磯邊綠樹春陰薄 기변록수춘음박 물결 부딪치는 강변에 파릇한 나무는 봄기운에 촉촉하고

 

江上靑山暮色多 강상청산모색다 강 위의 푸른 산은 석양에 짙게 물드네

 

宛在水中迷遠近 완재수중미원근 굽이진 물 속에 어려서 멀고 가까움이 애매하고

 

第洲何處竹枝歌 제주하처죽지가 꽃 같은 섬 어디선 죽지가가 들려오네.

 

 

  參考事項- 磯邊(기변) ; 물가. 磯(기)는 바다나 호수 등의 물가에 돌에 부딪치는 곳.

 

 竹枝歌(죽지가) ; 가사(歌詞)의 한 체(體). 남녀의 정사 또는 지방의 풍속을 읊은 노래.

 

 

權漢功 권한공 ? - 1349

 

본관 안동(安東). 호 일재(一齋). 시호 문탄(文坦). 충렬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을 지내고, 1294년(충렬왕 20)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후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거주하였으며,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밀직부사(密直副使)·첨의평리를 역임하였고,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인사권을 장악하여 많은 뇌물을 받았다. 이에 이사온(李思溫)·김심(金深) 등의 탄핵으로 한때 투옥된 일이 있었으나 곧 석방되고, 오히려 이사온 등이 유배되었다. 충숙왕(忠肅王) 초 삼사사(三司使)·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충선왕이 양위한 후 원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에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독서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후에 충숙왕에 의하여 구금되고, 이어 장류(杖流)되었으나 원제(元帝)의 명으로 풀려나와 그 복수로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옹립하고, 충숙왕을 폐위시키려고 획책하였으나 원나라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집에 《일재일고(一齋逸稿)》가 있다.

 

 

 

 

 

浮碧樓 부벽루

 

 

 

                                                                   奇 大升 기대승

 

 錦繡山前寺  금수산전사      금수산 앞에 영명사가 있고

 

 大同江上樓  대동강상루      대동강 위에 부벽루가 솟아 있네.

 

 江山自古今  강산자고금      강과 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往事幾春秋  왕사기춘추      지나간 세월 얼마나 변하였는가.

 

 粉壁留佳句  분벽류가구      부벽루 벽에는 좋은 싯귀가 남아 있고

 

 蒼崖記勝遊  창애기승유      이끼 낀 벼랑에는 사람 이름 새겨져 있네

 

 舟不迷路  경주부미로      조각배는 배길 따라 갈 길을 헤매지 않으니

 

 余亦沂淸流  여역기청류      나 역시 물 따라 맑게 흘러가리라.

 

 

 

  參考事項- (경주) ; 배의 노.  留佳句 (류가구) ; 좋은 글귀를 써 놓음.

 

 

奇大升 기대승 1527-1572

 

본관 행주(幸州). 자(字) 명언(明彦). 호(號) 고봉(高峰)·존재(存齋). 시호(諡號) 문헌(文憲). 전남 나주(羅州) 출생. 1549년(명종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이 되었다.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주서(注書)를 거쳐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영수(領袖)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삭직(削職)되었다가, 1567년(명종22)에 복직되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 해 선조가 즉위하자 집의(執義)가 되고,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로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다가, 1570년(선조3) 대사성(大司成) 때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 당했다. 후에 대사성에 복직되었는데 이듬해 부제학이 되어 사퇴하고, 1572년 다시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통달하여 31세 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3권)을 편찬할 만큼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 호남의 석유(碩儒)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선학(先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다. 특히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는데, 이 논변의 왕복서한은 《양 선생 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 2권에 남아 있다.

 

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사후 1590년(선조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追錄)되었고 덕원군(德原君)·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요저서에는 《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

 

 

 

 

 

 述志 술지       내 속마음은

 

                                                                                      吉再 길재

 

 

 

 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시냇가에 초가집 지어 홀로 한가하게 살아가니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 넉넉한 즐거움이 있네.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부래산조어  손님은 오지 않아도 밖에서 산새들이 지저귀고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대밭에 평상을 놓고 드러누워 책을 보노라.

 

 

 

 

 

  

 

 

 

 卽事 즉사  즉흥시

 

 

 

 水淸泉冷 관수청천랭      샘물에 손 씻으니 얼음처럼 차고

 

 臨身茂樹高 임신무수고      굽어보니 나무는 높이 뻗어있네.

 

 冠童來問字 관동내문자      글배우는 아이들이 와서 물으니

 

 聊可與逍遙 요가여소요      가히 쓸쓸한 밤을 달래주네.

 

 

 

  參考事項- 盥水(관수) : 대야의 물, 손을 씻음 聊可(료가) ; 가히.

 

 

吉再 길재 1353 ~ 1419

 

본관(本貫) 해평(海平). 자(字) 재부(再父). 호(號)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諡號)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出生).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 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書懷 서회  회포를 쓰다

                                                                             金宏弼 김굉필

 

 

 處獨居閑絶往還 처독거한절왕환  홀로 한가하게 왕래를 끓고 살아가니

 

 只呼明月照孤寒 지호명월조고한  단지 밝은 달을 보며 가난을 달래네

 

 憑君莫問生涯事 빙군막문생애사  그대여 세상일은 묻지 마오

 

 萬頃烟波數疊山 만경연파수첩산  안개 속 깊은 산 속에 사는 나이니.


參考事項- 孤寒(고한) ; 한없이 쓸쓸하고 가난 함.

 

 

 

 

 

 

 寫牧丹 사목단  목단을 그릴 것을

 

                                                                               김굉필 金宏弼

 

 

 

 雲裏寒梅雨後蘭 운리한매우후란   구름 속의 차가운 매화나무와 비 온 후의 난초는

 

 看時容易畵時難 간시용이화시난   볼 때에는 쉬운 듯 하여도 그리기는 어렵네.

 

 早知不入詩人眼 조지부입시인안   일찍이 시인의 눈에 쉽게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면

 

 寧把臙脂寫牧丹 영파연지사목단   차라리 물감으로 목단을 그렸으리.

 

 

 

 

 

 

 

김굉필(金宏弼;1454-1504)

 

본관 서흥(瑞興). 자(字) 대유(大猷). 호(號) 사옹(蓑翁)·한훤당(寒喧堂).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동자’라 지칭되었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로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학문경향은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 ·이장곤(李長坤)· 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 조광조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 《가범(家範)》 등이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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