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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漢詩

한국한시 落梨花,洪原邑館(김구) 외

by 산산바다 2006. 12. 13.

산과바다

 

 

 

 

           落梨花 낙이화            떨어지는 매화꽃

                                                                      金坵 김구

 

      飛舞翩翩去却回 비무편편거각회

      倒吹還欲上枝開 도취환욕상지개

      無端一片粘絲網 무단일편점사망

      時見蜘蛛捕蝶來 시견지주포접래

 

      춤추듯 펄펄 날아 물러갔다 다시 오고

      아래에서 불면 다시 올라 와 가지에 꽃피네

      어쩌다 꽃잎 하나 거미줄에 달라붙으면

     때마침 거미가 나비인양 잡으려 오네 

 

      參考事項- 翩翩(편편) : 빨리 날아가는 모양   蜘蛛(지주) : 거미

 

 

 

        洪原邑館 홍원읍관        홍원에서

 

     地僻雲烟古 지벽운연고   골짜기 험하니 안개도 창연하고

     原低樹木平 원저수목평   언덕 아래로 나무들 줄지어있네.

     長安知幾至 장안지기지   장안에는 어느 때나 갈 수 있겠나

     回首不勝淸 회수불승청   고개를 돌려보니 하늘은 맑아라.

 

      參考事項- 勝淸(승청) ; 한없이 맑음

 

金坵 김구 1211 ~ 1278

본관 부령(扶寧: 전북 부안). 자(字) 차산(次山). 호(號) 지포(止浦). 시호(諡號) 문정(文貞). 초명 백일(百鎰).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제주판관이 되었다.

원종 때 유경(柳璥)의 천거로 예부시랑이 되어, 원나라에 대한 문서관계를 맡아보았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다녀온 후 《북정록(北征錄)》을 지었으며, 1263년(원종 4)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1274년 첨의부지사로 있다가 참문학사(參文學士)·판도사판사가 되어, 통문관의 설치 및 궁내의 연소자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도록 건의하였다.

이장용(李藏用)· 유경 등과 함께 신종 ·희종 ·강종 3대의 실록을 찬수하고, 충렬왕 때 《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 《지포집》이 있다.

 

 

 

 

          野莊 야장     들에 있는 장원

 

                                                              金九容 김구용

 

    閉門終不接庸流 폐문종부접용류

    只許靑山入我樓 지허청산입아루

    樂便吟  便睡 락편음아용편수

    更無餘事到心頭 갱무여사도심두

 

문을 닫아걸어 소인배와 접촉을 끊고

다만 푸른 산만 내 누각에 들기를 허락하네 편하고 즐거우면 시를 읊조리며 졸리면잠을자지

이 밖의 일로 마음에 오를 것은 없네.

 

  參考事項- 庸流 (용류)는 용렬한 무리 즉 옹졸한 자들을 이름.

 

金 九容 (김 구용 1338 - 1384)

본관 안동. 자 경지(敬之). 호 척약재(三若齋). 초명 제민(齊閔).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 그 뒤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主簿)를 거쳐 민부의랑(民部議郞) 겸 성균관직강(直講)이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자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성리학을 일으키고 척불숭유의 선봉이 되었다.

친명파로서 1375년(우왕 1) 삼사좌윤으로 있을 때, 이숭인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과 함께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1381년 풀려나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이듬해 대사성 ·전교시판사가 되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1384년에 행례사(行禮使)로서 명나라에 가던 중 요동에서 붙잡혀 난징[南京]으로 압송, 영녕(永寧)현에서 병사하였다. 사장(詞章)을 잘하였으며, 《동문선》에 8편의 시가 전한다. 문집에 《척약재문집》, 저서에 《선수집(選粹集)》 《주관육익(周官六翼)》 등이 있다.

 

 

 

 

 

      途中卽事 도중즉사       길을 가다 읊음

                                                          金克己 김극기

 

     一逕靑苔濕馬蹄 일경청태습마제  

     蟬聲斷續路高低 선성단속로고저

     窮村婦女猶多思 궁촌부녀유다사

     笑整荊 照柳溪 소정형차조류계

 

한 줄기 좁은 길의 푸른 이끼에 말발굽이 젖고

매미 소리 끊일 듯 이어지고 길은 울퉁불퉁하네.

궁색한 시골 아낙 오히려 생각이 넓어 

웃으며 비녀 고치고 냇물에 비춰보네. 

 

 參考事項- 荊  (형차)는 가시나무 비녀.

卽死 (즉사)는 어떤 사물을 대하고 즉흥적으로 읊다는 뜻

 

 

 

      鴨江道中 압강도중       압록강 길목에서

 

  年旅客兩依依 조년여객양의의   가는 세월에 나그네 마음 애달프고

 信馬行吟背落暉 신마행음배낙휘   위 말에서 읊으며 석양을 지고 가네.

 

 戍鼓一聲來遠路 수고일성내원로   변방의 북소리 들리니 멀리도 왔고

 行行征雁帖雲飛 행행정안첩운비   줄지은 기러기는 구름 속을 나네.

 

 參考事項-  年(조년) : 가는 세월(歲月).  依依(의의) : 마음이 설레는 모양.

                    戌鼓(술고) : 변방의 북소리.

 

 

 

        夜坐 야좌         밤에 앉아서

 

紙戶沈沈夜氣淸 지호침침야기청   종이 발린 문짝이 침침하여 밤기운은 맑고

圖書萬卷一燈明 도서만권일등명   수많은 책들로 등불 하나 밝히네.

噓噓石硯寒雲色 허허석연한운색   돌벼루에 호호 입김 부니 찬 구름 빛 일고

颯颯銅甁驟雨聲 삽삽동병취우성   구리 병에는 싸늘하게 소나기 오는 소리로다.

薄祿微官貧始重 박록미관빈시중   적은 봉록과 하찮은 벼슬이 가난하니 비로소 소중하고

浮名末利醉還輕 부명말이취환경  

뜬 이름과 하찮은 이익이 취중에 도리어 가볍구나.

通宵寒雁空南去 통소한비공남거   밤새도록 찬 기러기 속절없이 남쪽으로 날아가니

恨不歸家問死生 한불귀가문사생   집에 돌아가지 못함을 한탄하며 생사를 묻는다네.

 

 

金克己 김극기

고려 명종 때의 시인으로 생졸년 미상이다. 본관 경주. 호(號) 노봉(老峯).

어려서부터 문명(文名)이 높았고, 입을 열면 시가 나왔다고 한다. 문과(文科)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그대로 초야에 묻혀 시(詩)를 즐겼다.

명종 때 학행(學行)으로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었으나 얼마 후 죽었다.

고려 말엽에 간행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의하면 그의 문집이 150권이나 된다고 한다. 저서에 《김거사집(金居士集)》이 있다.

 

 

 

 

         題金海客舍 제김해객사        김해 객사에 부쳐

                                                                               金得培 김득배

 

 來官盆城二十春 내관분성이십춘   이 고을 벼슬살이 벌써 이십 년에

 當時父老半成塵 당시부로반성진   당시의 늙은 부모들 태반이 죽었고

 自從書記爲元帥 자종서기위원수   말단에서 원수가 되어 나아간 이

 屈指如今有幾人 굴지여금유기인   지금 손꼽아 헤아려보면 몇 이나 있는가.

 

 

  參考事項- 盆城(분성) ; 지금의 김해를 이름. 屈指(굴지) ; 손가락을 꼽아 셈.

                  如今(여금) ; 지금, 현재

 

金得培 김득배 1312 ~ 1362

본관 상주. 호(號) 난계(蘭溪).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이 되고, 강릉대군(江陵大君: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파면되었다. 1357년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추밀원직학사가 되었다.

1359년 겨울에 홍건적 침입으로 의주· 정주· 인주 등이 함락되자, 서북면도지휘사로서 도원수 이암(李灸), 부원수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방어하였다.

서경을 탈환하여 적을 압록강 밖으로 격퇴하였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1361년 홍건적 20만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와 삭주· 이성(泥城)에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방어하였으나, 안주에서 대패하여 개경까지 함락되었다. 이듬해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 10여 만을 죽이고 개경을 수복하였다. 이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의 위계로 정세운· 안우가 모살되자, 그도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梟首)되었다. 그의 문생인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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