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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漢詩

한국한시 東宮春帖, 甘露寺次韻(김부식) 외

by 산산바다 2006. 12. 13.

산과바다

 

 

 

 

            東宮春帖 동궁춘첩    동궁의 봄주련

                                                                            金富軾 김부식

 

 曙色明樓角 서색명루각    새벽빛은 다락집 모서리에 밝고

 春風着柳梢 춘풍착유초    봄바람은 버드나무 끝에 부네

 鷄人初報曉 계인초보효    계인은 막 새벽을 알리고 나서

 已向寢門朝 이향침문조    침문에 조회하러 이미 떠났네.

 

  參考事項- 鷄人(계인) ; 궁중에서 날이 밝아 잠 깨우는 일을 맡은 사람.

 

 

 

        甘露寺次韻 감로사차운     감로사의 운을 따서

 

 俗客不到處 속객부도처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

 登臨意思淸 등림의사청   발길 따라 마음이 맑아지네.

 山形秋更好 산형추경호   가을 산의 모양은 더욱 아름답고

 江色夜猶明 강색야유명   강 빛은 밤에도 한결 해맑네.

 白鳥高飛盡 백조고비진   갈매기 하늘 아득히 날아가도

 孤帆獨去輕 고범독거경   외로운 배는 홀로 멀리 사라지네.

 自 蝸角上 자참와각상   옹색한 내 삶을 부끄러워하며

 半世覓功名 반세멱공명   반평생을 벼슬 쫓아 헤매었네.

 

  參考事項- 次韻(차운) ; 앞에 지어진 시(詩)의 운(韻)을 따라 시(詩)를 짖는 것을 이름.  벼슬길에 연연하여 무엇인가를 잃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부끄러워하는 시(詩)이다.

 

김 부식 金 富軾

본관(本貫) 경주. 자(字) 입지(立之). 호(號) 뇌천(雷川). 시호(諡號) 문열(文烈).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근(覲)의 셋째 아들. 네 형제가 모두 과거로 진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부일(富佾)· 부식 ·부철(富轍)은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날렸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였다. 1130년 정당문학 겸 수국사로 승진하였고, 이어 검교사공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1132년에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에 묘청(妙淸)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으며, 출정하기 전에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鄭知常)· 김안(金安)· 백수한(白壽翰) 등을 죽였다.

장기전을 벌이면서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그 결과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 겸 태자태보 (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事上柱國兼太子太保)에 승진하였다. 1138년에 검교태사 ·집현전대학사·태자태사(檢校太師集賢殿太學士太子太師)를 더하였다. 이어 함께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燎)와 개인적인 불화가 생겨 그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아냈다가 뒤에 사면되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1142년에 사직하였다.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면서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號)를 더하여 내렸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史論)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한림원에 있을 때에는 사륙변려문체(四六폿儷文體)에서 당 ·송 시대의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려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은 그를 고금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박학강식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후에 봉하고 《인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죽은 후 1153년 중서령이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 20여 권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倒影軒 도영헌      도영헌에서

                                                                       金芙蓉 김부용

 

 殘日掛巫峽 잔일괘무협    지는 해가 무협에 걸리고

 群陰盡向東 군음진향동    그림자는 모두 동으로 향하네.

 

 欄邊移酒席 난변이주석    난간 가로 술자리를 옮기니

 身在碧波中 신재벽파중    내 몸이 푸른 물결 속에 있네.

 

 

  參考事項- 도영헌(倒影軒)은 '그림자가 거꾸로 보이는 집'이라 풀이되는데 연못가에 지은 정자로 추측된다.

 

 

 

 

           觀樂 관락       기생의 춤을 보며

 成都紅妓碧羅裳 성도홍기벽라상    성도의 붉은 기생이 푸른 비단 치마를 입고

 幅幅春風步步香 폭폭춘풍보보향    치마폭마다 봄바람 일고 걸음마다 향기롭네

 黃鶴金獅迎起舞 황학금사영기무    황학 금사자를 맞아서 춤을 추니

 降仙樓上降仙娘 강선루상강선낭    강선루 위에 선녀들이 하강하였네.

 

김 부용 金 芙蓉

성명 김부용(金芙蓉), 호(號)는 운초(雲楚)이다. 김이양(金履陽)의 소실(小室). 평북(平北) 성천(成川)의 명기(名妓)로서 가무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김 이양에게 의탁, 시와 거문고로 여생을 보냈다.

문집《부용집》에 수록된 시 30여 수는 규수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작품에《유회(遺懷)《대황강노인(待黃岡老人)》《오강루소집(五江樓小集)》《억가형(憶家兄)》《증별금영(贈別錦營)》《삼호정만조(三好亭晩眺)》증령남노기(贈嶺南老妓)》 《부용당시집》 등이 있다.

 

 

 

     江陵送安上人之楓岳 강릉송안상인지풍악

     강릉에서 풍악으로 가는 안상인을 보내며

                                                                               김부의 金富儀

 

江陵日暖花先發 강릉일난화선발   강릉에는 날이 따뜻하여 꽃이 먼저 피는데

楓岳天寒雪未消 풍악천한설미소   풍악은 아직 추워 눈이 녹지 않았으리.

飜笑上人山水癖 번소상인산수벽   우스운 스님의 산수 즐기는 성벽이여

未能隨處作逍遙 미능수처작소요   간 곳마다 어디서나 소요하지 못하누나.

 

  參考事項- 風樂(풍악) : 금강산(金剛山)

                 逍遙(소요) : 이리저리 거님, 유유자적(悠悠自適)함

 

김부의(金富儀 1079 - 1136)

본관 경주. 자 자유(子由). 초명 부철(富轍). 시호 문의(文懿).부식(富軾)의 동생. 1097년(숙종 2) 19세로 문과에 급제,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111년(예종 6) 서장관(書狀官)으로 추밀원부사 김연(金緣)을 따라 송나라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돌아와 감찰어사가 되었다. 1117년 금나라 사신이 와서 형제국(兄弟國)이 되기를 청하자, 금나라를 회유하기 위하여 화의하자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재상의 저지로 왕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첨사부사직(詹事府司直)이 되어 문학으로 우대를 받았고, 1123년(인종 즉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특진하였다.

1124년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성과 이부·호부 ·예부의 상서(尙書)를 거쳐 한림학사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134년 묘청(妙淸)의 주장을 김부식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였다. 이듬해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평서십책(平西十策)을 올리고 좌군수(左軍帥)· 추밀원사가 되어 출정하였으며, 평정하고 돌아와 금대(金帶)를 하사 받았다. 형부상서 ·보문각대학사 ·추밀원지사 ·지제고(知制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수사공 ·상서좌복야 ·정당문학 ·판상서예부사 ·수국사 ·주국(守司空尙書左僕射政堂文學判尙書禮部事修國史柱國)이 추증되었다. 시문에 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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