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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悟道頌

부휴선사(浮休禪師) 오도송(悟道頌)

by 산산바다 2015. 1. 23.

산과바다

海印, 松廣, 七佛, 百丈 네 곳에 부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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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휴선사 오도송(浮休禪師 悟道頌) (1543~1614)

 

天地心 하늘과 땅과 나의 한마음

秋山疎雨過(추산소우과) 가을 산중에 비가 지나갔나니

霜葉落庭苔(상엽락정태) 서리 맞은 잎이 앞뜰 이끼 위에 떨어지네.

白犬通消息(백견통소식) 하얀 개에게 소식을 전하고

罷禪御鶴來(파선어학래) 선정에서 깨어나 학()을 타고 오도다.

 

* 토굴에 함께 있던 개가 낙엽을 물고 오는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浮休禪師 涅槃頌 (부휴선사 1543~1614)

七十餘年遊幻海 칠십여년유환해칠십여년을 꿈과 같은 바다에서 노니다가

今朝脫却返初源 금조탈각반초원 : 오늘 아침 이 몸 벗고 근원으로 돌아가네.

廓然空寂本無物 곽연공적본무물 : 텅 비어 적적하여 본래 한 물건도 없나니

何有菩提生死根 하유보리생사근 : 어찌 깨달음과 나고 죽음이 따로 있을까 ?

 

 

浮休禪師 (부휴선사 1543~1614)

 

조선 중종 38(1543) 오수(獒樹 : 지금의 남원)에서 출생한 선사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뜬세상(浮世)이 매우 어두우니 출가하겠습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선사는 지리산 영원사 신명 장로에게 삭발염의하고 부용 영관 대사에게 수참하였다. 스승의 심법을 터득한 선사는 송광사, 쌍계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였다. 지리산에 토굴을 마련하고 정진하던 어느 해 가을 선사는 토굴에 함께 있던 개가 낙엽을 물고 오는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선사는 문자를 뛰어넘어 격외선도리(格外禪道理)를 종지로 삼아 참구했다. 선사의 활구는 이러했다. 제 몸뚱이도 잊고 간절히 의단(疑團 : 의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을 일으키니 화지일성(地一聲 : 땅 위에서 배를 끄는 소리)에 천지가 무너지거늘 어찌 북쪽 바다 남쪽 땅을 논의 할 것인가며 활구하였다. 선사께서는 남쪽이다, 북쪽이다 분별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생각에 따른 것일 뿐 광대무변한 허공계에는 그런 분별이 붙을 수 없다는 것임을 설파하였다. 또한 선사의 가르침은 일념회광(一念回光)하는 수행을 하면 활안(活眼)이 열리어 일체 망상이 부서져 본연의 심광이 반조하는 것이며 모든 것이 함께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성속(聖俗)의 한계를 뛰어넘어 비로소 번뇌의 불꽃이 맹렬한 사바 속에 있을지라도 청정한 자성이 결코 물들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선사께서는 수행에 있어 삼요(三要)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삼요란 대신근(大信根), 대의단(大疑團), 대분지(大憤志)이다. 대의단과 대분지를 중시해서 발분망신(發憤忘身)하고 절실히 의단을 일으켜서 사물을 응해서 현풍(玄風:,莊子學說) 떨쳐버려라.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비로자나의 정수리를 밟으면 연꽃이 불속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깨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모든 사물이 위험한 일에 직면하여 눈을 감아 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해야 만 된다고 설하였다. 마음이 죽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죽은 사람과 같고 산 정신으로 문제를 똑바로 보면 진상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상을 깨닫고 보면 두려울 것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무한대로 전진할 수 있다고 한 가르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 중생들에게도 지혜롭게 사는 양식이 되고 있다.

선사가 두류산에 주석할 때였다. 성지(性智 : 풍수설에 밝은 술객)의 무고로 제자 벽암과 함께 한성에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 때 옥사장이 선사를 보니 기개와 도량이 당당하고 언설도 또한 비범해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다음날 임금이 선사를 불러 법요를 물어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자란가사와 벽채장삼, 염주 등을 하사하고 선사를 대도사로 추대하는 큰 법회를 열었다. 이후 많은 민중들은 선사를 찾아 법을 구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찾아온 납자들도 7백여 명에 달했다.

부휴스님은 청허와 법형제이지만 나이가 청허보다는 23살 아래이고, 청허의 제자인 사명보다는 1살 많아서, 사명과는 형제처럼 지낸 반면 청허는 스승처럼 존경하였다. 청허와 사명이 왜병을 물리친 호국활동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것에 비해 스님은 탁월한 선지(禪旨)로 당시의 불교계를 이끌던 대종사였다. 스님은 그 법력과 덕망이 고매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귀의하고자 했던 고승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임진왜란 때는 승장(僧將)의 한 사람으로 전쟁터에 나아가 구국에 앞장서기도 했다. 사명의 글을 보면 스님의 법력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고 세상은 헛된 말만 좆아서 집착하니, 이때를 당하여 영산(靈山)이 어찌 평안하겠으며, 소림(少林)은 어느 날 생기를 되찾을 것인가. 지금은 오직 정안(正眼)을 가진 나의 형님(부휴선사)이 있을 뿐이니, 형님이 아니고서는 누가 이 종문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인가?”

선사는 광해 6(1614) 칠불암에서 “73년 동안 허깨비 바다에 노닐다가, 오늘 아침 껍질을 벗고 처음으로 돌아가네. 일체가 공적하여 원래 아무것도 없음이 확연하니, 어찌 깨달음과 생사의 뿌리가 있겠는가.” 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세수 72세 법랍 57세로 입적했다. 법명은 선수(善修), 법호는 부휴(浮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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