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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悟道頌

만공선사(滿空禪師) 오도송(悟道頌)

by 산산바다 2015. 1. 25.

산과바다

덕숭산 수덕사에 위치한 만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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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선사 오도송(滿空禪師 悟道頌) (송만공 宋滿空 1871~1946)

 

空山理氣古今外 빈 산 이치가 옛 과 지금 밖이니

白雲淸風自去來 흰 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가노라

何事達摩越西天 달마대사는 무슨 일로 서천을 넘었는가

鷄鳴丑時寅日出 닭은 축시에 울고 해는 인시에 뜨나니

 

*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홀로 참선에 열중하다가 1895년 아산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滿空禪師 傳法偈 (전법게 - 후계자에게 법을 전함)

雲山無同別 (운산무동별구름과 산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고

亦無大家風 (역무대가풍또한 대가의 가풍도 없구나

如是無文印 (여시무문인이와같은 글자 없는 인()

分付惠菴汝 (분부혜암여혜암 너에게 주노라.

 

만공선사

 

滿空禪師(만공선사 1871~ 19461020)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로,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이다. 속세의 성은 송씨로, 송만공으로도 부른다.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 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또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본명은 도암(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며 만공은 법호이다.

1884(고종 20) 경허(鏡虛, 성우 1849 ~ 1912)의 인도로 서산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경허(鏡虛)를 계사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는 이후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홀로 참선에 열중하다가 1895년 아산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던 중 1904(광무 7) 스승 경허로부터 전법계를 이어받았다. 이후 예산군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며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그가 고명하다는 말을 듣고 궁궐에서 상궁과 나인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찾아오기도 했다. 하루는 만공이 그들에게 노래 하나를 불러주었다. '앞산에 딱따구린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 그 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 찾네.'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궁인들이 돌아가고 나자 상좌들은 그 뜻을 물으니 내가 부른 그 노래가 바로 법문이라 답하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상좌들은 나중에 은유적으로 풍자한 그 뜻을 이해하였다.

그는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고 간화선(看話禪)의 수행과 보급에 노력하였다. 제자들에게 무자화두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1940년대에는 덕숭산에 머무르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예산 전월사에서 입적했다. 경허(75) - 만공(76) - 전강(77)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춘성은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 만공 스님은 입적을 하기 전 열반송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거울 앞에서 자신과 나눈 마지막 독백이 지금껏 열반송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 년 동안 동고동락 해왔지만 오늘이 마지막 일세 그동안 수고했네. 그대와 나의 이승 인연이 다 되었네. 그럼 잘 있게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만공(76)-전강(77)-송담(78)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혜월(76)-운봉(77)-향곡(78)-진제(79)의 계보이다.

 

 

 

청계사 만공선사 부도탑

 

* 수덕사 경허와 만공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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