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雪岑禪師 悟道頌 (설잠선사 매월당 김시습 1435~1493)
선등(禪燈)
一點孤燈烱(일점고등형) 한점의 외로운 등불 빛나는 것은
登床杜口時(등상두구시) 세상에 올라 입을 다문 그 때이네.
機鋒似林臨(기봉사임림) 심기(心氣)는 번뇌망상과 비슷한데
濟奧契希夷(제오계희이) 오묘한 이치는 희이(希夷:돈오)로 어루어 졌으나
始覺浮生幻(시각부생환) 부생(浮生)이 환상임을 비로소 깨치니
多慙宿嶪癡(다참숙업치) 전생업이 어리석어 부끄럼 많다.
禪心與禪大(선심여선대) 선심(禪心)은 선행(禪行)보다 더 큰데
相照幾人知(상조기인지) 그 비침을 누가 알리요.
선월(禪月)
滿庭秋月白森森(만정추월백삼삼) 뜰에 가득한 가을 달 흰빛이 창창한데
人靜孤燈夜已深(인정고등야이심) 사람 없어 고요하고 외로운 등(燈) 밤은 깊었다.
風淡霜淸不成夢(풍담상청불성몽) 바람 담담하고 서리 맑아서 꿈 못 이루는데
紙窓簾影動禪心(지창염영동선심) 종이ㆍ창ㆍ발그림자에 선심(禪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구나.
雪岑禪師 (설잠선사 매월당 김시습 1435~1493)
매월당(梅月堂) 설잠(雪岑, 1435-1493)스님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속명은 김시습(金時習)이고, 본관은 강릉이며,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스님은 유가(儒家)로 시작, 불가(佛家)에서 생을 끝냄으로써 ‘불심유관(佛心儒冠)’, ‘심유천불(心儒踐佛)’, ‘적불반광(跡佛伴狂)’ 등 보는 사람에 따라 다각도로 평가되는 삶을 살았다. 조선 성리학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는 용납하기 힘든 파격적 삶을 산 그이지만, 승려로서는 뛰어난 저술을 통하여, 득통기화(得通己和) 이후 이렇다할 고승과 고승의 저술이 없었던, 불교 암흑기의 적막을 깨뜨린 걸출한 고승이었다.
불교 암흑기 적막 깨뜨린 걸출한 고승인 스님은 성장 후 대부분의 생을 승려로서 살았다. 그는 뛰어난 자질로 유학에 통달했으나, 본인의 성품에 맞지 않는 현실세상을 뛰쳐나와 결국 불법으로 깨달음을 얻고 거침없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선문(禪門)이 이단시 되던 당시 스님의 이와 같은 삶은 특히 유학자들에게는 괴기하다던지 희화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등 평가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스님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동(神童)이라 불릴 만큼 천품이 영민하였다. 3세에 ‘꽃이 난간 앞에서 웃고 있으나 그 소리 들리지 않고/ 새가 수풀에서 울고 있으나 눈물은 보기 어렵구나’ 등의 시를 남겼고, 5세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여 ‘오세신동(五歲神童)’으로 불렸다.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은 당시 옆집에 살던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뛰어난 재주를 보고 지어준 것이라 전한다.
다음의 일화는 그가 얼마나 뛰어난 천품을 지녔는지를 보여준다. 세종이 오세신동의 소문을 듣고 궁궐로 그를 불러 시험을 했다. 스님을 보고 먼저 “네 이름으로 글을 지어보겠느냐”고 묻자 스님은 바로 “올 때 강보에 싸여 있던 시습입니다(來時襁褓金時習)”라고 답했다. 세종이 신기해하며 다시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을 가치키며 시를 지어보라고 하자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小亭舟宅何人在)”라는 시로 답하여 세종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세종은 아이가 커서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크게 기용하겠다고 신하들에게 말하고는 비단 30필을 하사했다. 그리고 무거운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는 가 시험해보고자 스스로 가져가라고 하니 시습은 비단을 풀어 매듭을 묶고는 허리에 매어 끌면서 밖으로 나갔다고 전한다.
설잠의 글을 보면 그의 나이 18세에 송광사에서 함허의 제자인 선승 준상인(峻上人)과 함께 하안거를 보내면서 참선지도를 받았다고 하므로 그때부터 이미 출가인(出家人)으로 자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스님은 21세 때 경전공부와 무술연마를 위해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갔다. 여기서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3일간 통곡한 끝에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불명은 설잠(雪岑)이라 지었다.
출가 후의 득도와 수행과정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으나 세상에 대한 울분을 술과 시로 풀며 전국을 방랑하던 그는 설악산으로 들어가 오세암을 짓고 그곳에 머무르다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느 날 오도(悟道)하고 말하기를 “선리(禪理)가 자못 깊어 5년을 공들인 끝에 투관(透關)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출가 후 전국을 떠돌던 설잠은 29세가 되던 해(세조 9년) 책을 구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가 효령대군의 부탁으로 내불당에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을 돕게 되었다. 서울에 머물던 당시 설잠은 세조 개인에 대해서는 반감을 표하지 않았던지 세조의 숭불사업을 찬송한 시문을 여러 편 남겼다. 이후, 세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떠나 31세 때 경주 남산(일명 금오산) 금오산실에 정착한 설잠은 그곳에서 7년간 머물면서 [금오신화]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37세가 되던 해 성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10여 년간 머물렀다. 이후 47세가 되던 해 환속을 하고 안씨를 아내로 맞았으나 그녀가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출가 해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설잠이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은 충남 부여 무량사인데, 스님은 이곳에서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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