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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淵明의 生涯와 作品

by 산산바다 2021.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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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陶淵明의 生涯와 作品


도연명 陶淵明(365~427)
중국의 대표적 시인. 이름은 도잠(陶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字는 원량(元亮) 혹은 연명(淵明)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九江]) 시상현(柴桑縣:지금의 싱쯔 현[星子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陶淵明이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259~334)은 동진 초에 장사군공(長沙郡公)·대사마(大司馬:최고군사령관)까지 승진했고, 할아버지 도무(陶茂)도 무창(武昌)의 태수(太守)로 재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막료장)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딸이었다. 도연명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의 첫 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참모)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지금의 장링[江陵])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 3년 상을 치렀다. 이후 강주자사·참군 및 팽택(彭澤) 현령(縣令) 등의 관료생활은 고향에서 가까운 심양군 안에서 지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 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 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 歸去來辭〉·〈귀전원거육수 歸田園居六首〉이다.
이리하여 도연명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 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陶淵明(Tao Yenming)의 作品
도연명의 작품으로 가장 특색 있고 후세까지도 중시되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5言 詩이다.
우선 5言 이라는 형태는 육조시대를 통해 시인들이 특히 애호한 보편적인 형식이었고 그의 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시가 특히 주목되고 애송되는 까닭은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읊조림과 멀리 세속의 티끌을 넘어서서 맑고 깊은 운치를 칭송하는 시의 경지 때문이다. 예부터 특히 유명한 〈음주이십수 飮酒二十首〉 중의 제5수를 예로 들어보자.
"마을 안에 엮어 놓은 오두막집, 그래도 시끄러운 수레소리 들리지 않네/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가요? 마음이 멀면 사는 곳도 외진다오./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드니 그윽이 보이는 남산(南山)/산기운이 석양에 아름답고 나는 새들도 무리지어 돌아가누나./이 가운데 있는 참뜻, 설명하려고 하나 이미 말을 잊었도다."
여기에서는 자연의 경치와 하나로 융합되는 마음속에서 대자연의 진실 가운데로 침잠하는 도연명의 담담한 자태를 엿볼 수 있다.
시의 표현에 있어서도 당시 궁정 문단에서 유행하던 화려한 기교와는 정반대로 거의 기교라고 할 만한 것 없이 자기의 감회를 자연스럽게 읊조리고 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표현을 지향하며 자연스러움과 순박함을 동경한 도연명의 문학은 그의 시에서만 표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귀거래사 歸去來辭〉·〈도화원기 桃花源記〉·〈오류선생전 五柳先生傳〉 등의 산문도 역시 같은 표현방식으로 지어진 주옥같은 작품들이다. 이들 산문 가운데 특히 〈오류선생전〉은 후세에 도연명 상(像)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전적인 작품이다.

 

도연명의 시문에는 확실히 고요하고 맑은 심경을 읊조린 작품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을 초월한 작품이 그의 시문 전부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편수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후세에 그렇게 유명한 작품이 되지는 못했어도 그의 시문 가운데에는 쇠락한 운명의 슬픔을 읊은 것이라든가 가난한 생활의 괴로움을 호소한 것, 행복한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한 것, 죽음의 공포를 두려워한 것 등 세속적인 작품도 적지 않다. 도연명이 그 생애를 통해서 스스로 정신생활의 이상으로 여긴 것은 앞에 들은 〈음주이십수〉의 시에도 나오는 '진'(眞)의 경지였다.
이 '진'이라는 개념은 도연명의 경우 철학적·사상적인 것이라기보다 문학적·감성적 색채가 강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내용적으로는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하는 '순'(淳)이라든가 '박'(朴)이라는 개념으로 바꿔도 좋을 것이다. 더욱 구체화해서 말하면 하늘 높이 자유로이 나는 '새'나 깊은 물 밑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의 경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지교'(智巧)나 '대위'(大僞)와는 정반대의 개념이기도 하다. 요컨대 도연명이 말하는 '진'은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며, 복희(伏羲)·신농(神農)이 다스리던 이상적 상고시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도연명은 중국 역사상 거의 유일한 본격적인 은일시인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매우 높다.
그의 친구였던 안연지의 〈도징사뢰 陶徵士誄〉는 그의 고결한 인품을 칭찬한 것이었고, 〈송서〉 은일전을 비롯한 각 정사(正史)에 있는 도연명의 전기와 양(梁)나라 소통(簫統)의 〈도연명전 陶淵明傳〉 등도 마찬가지였다. 또 이상하게도 화려한 남조 문학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궁체'(宮體)의 시종(詩宗)이었던 양나라의 간문제(簡文帝:503~551)도 형인 소통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도연명 숭배자였다.

 

도연명의 인품과 시문은 이미 육조시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양나라 강엄(江淹:444~505)이 한(漢)부터 진송(晉宋)까지의 시인 30명의 시를 모방해서 지은 〈잡체시 雜體詩〉 30수에서는 도연명을 조식(曹植)·육기(陸機) 등의 유명한 시인과 나란히 열거하고 있다. 같은 양나라 사람 종영(鍾嶸)의 〈시품 詩品〉에서도 도연명의 5언시에 중품(中品)의 품격을 매겨놓고 또 "고금 은일시인의 으뜸"이라고 판정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도연명을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라고까지 절찬하여 결정적으로 높이 평가한 사람은 북송(北宋)의 위대한 시인 소식(蘇軾:1037~1101, 호는 東坡)이었다. 이렇게 하여 은일의 성자(聖者), 세속을 초월한 대시인으로서의 이상적 도연명 상은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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