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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歸去來辭)幷序 - 도연명(陶淵明)

by 산산바다 202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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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거래사(歸去來辭)幷序 - 도연명(陶淵明)

                 귀거래사

 

 

중국 동진시대 시인 도연명 (陶淵明, 365년 ~ 427년)의 자는 원량(元亮), 본명은 잠(潛), 자는 연명(淵明)이다. 오류(五柳) 선생이라고 불리며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심양 사람으로 동진 초기의 군벌의 대인물 도간(陶侃)의 증손이라 하는데, 부조(父祖)의 이름은 분명치 않다. 하급 귀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일찍 사망했다. 젊어서부터 입신양명해 백성을 구제하자는 뜻을 품어 29세 관직에 나갔고 그 후 10여 년간 지방 관리로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마지막 관직은 팽택령(彭澤令)으로 80일간 근무한 후 향리로 돌아갔다. 41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지은 명작이 바로 귀거래사(歸去來辭)다.

 

귀거래사(歸去來辭)는 관직을 버리고 은자로서의 생활로 들어간다는 선언의 의미를 가진 작품으로 지금까지의 관리생활은 마음이 형(形=육체)의 역(役=노예)으로 있었던 것을 반성하고 전원에 마음을 돌리고 자연과 일체가 되는 생활 속에서만이 진정한 인생의 기쁨이 있다고 주장한다. 전체적으로 영탄적 어조가 강하나 그려진 자연은 선명하고 청아한 풍이 넘친다. 짧으면서도 구성과 표현이 정연한 연명의 대표작이다.

 

도연명은 은거하며 농사를 지으며 많은 전원시를 남기고 명성을 얻어 도화원기, 음주, 의고, 독삭해경 등을 남겼다 그의 시는 현재 4언시 9수, 5언시 120수 정도가 남아 있다. 전원에서의 은사의 생활, 자적(自適)의 심경을 토로한 것, 지방관리와의 증답시(贈答詩), 영사(詠史), 의고(擬古) 등이 주요 내용으로 소박하고 자연스럽고 진실한 감정을 담아 그의 작품은 친근감을 느끼게 하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도연명(陶淵明)이 동진(東晋) 왕조의 심양도(潯陽道) 팽택현(澎澤縣)의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 벼슬살이가 성미에 맞지 않아, 정(程)씨 누이동생 상사(喪事)에 간다는 핑계로 사직을 하고 이 시를 지었다. 당시 이 시를 지을 때 작가의 심경(心境)을 피력한 서(序)가 있다.

 

 

幷序

餘家貧, 耕植不足以自給. 幼稚盈室,無儲粟, 生生所資, 未見其術. 親故多勸餘爲長吏, 脫然有懷, 求之靡途. 會有四方之事, 諸侯以惠愛爲德, 家叔以餘貧苦, 遂見用於小邑. 於時風波未靜, 心憚遠役. 彭澤去家百里, 公田之利, 足以爲酒, 故便求之. 及少日, 眷然有歸輿之情. 何則質性自然, 非矯厲所得. 飢凍雖切, 違己交病. 嘗從人事, 皆口腹自役. 於是悵然慷慨, 深愧平生之志. 猶望一稔, 當斂裳宵逝. 尋程氏妹喪於武昌, 情在駿奔, 自免去職. 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

“ 나는 집이 가난하다. 농사는 지으나 자급에는 족하지 못하였다. 방안에는 애들이 가득하고 독에는 모아놓은 곡식조차 없는 데, 먹을거리를 얻고자 했어도 그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친구들이 나에게 장리(長吏)가 되기를 권해서 급히 그렇게 하리라고 마음을 먹었어도 그것도 구할 길이 없었다. 이따금 여기저기서 일이 있을 때면 제후(諸侯)의 신세를 지곤 했다. 숙부가 가난으로 고생하는 나를 돌봐 작은 고을에서 일하게 했다. 풍파(風波)가 아직 진정되지 않은 때라 집에서 백여 리나 떨어져 있는 먼 팽택(彭澤)에서 일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공전(公田)에서 나오는 이(利)로써 술잔 마시기에는 족하겠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을 지나다 보니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성질이 생긴 그대로라 교려(矯勵)하는 일은 하지 못하니, 기한(飢寒)이 아무리 심해도 내 뜻에 맞지 않는 일에는 이래저래 골치만 아프다. 인사(人事)를 쫓는 일이 다 배 채우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 이를 개탄하고, 내 평생의 지조에 비추어 깊이 부끄러워한다. 이제 벼가 익을 때도 되었으니 옷을 챙겨 저녁에라도 가려고 한다. 게다가 정(程)씨의 누이가 무창(武昌)에서 상사(喪事)가 나, 바삐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 스스로 사직하고 가려고 결심했다.

중추(中秋)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관(官)에 있기 팔십여 일, 일과 마음을 따라 편(篇)에 명(命)하여 귀거래사(歸去來辭)라 하였다. 을사년(乙巳年: 405년) 11월이다.”

 

 

歸去來辭 原文

歸去來兮,田園將蕪胡不歸!旣自以心爲形役,奚惆悵而獨悲?悟已往之不諫,知來者之可追。實迷途其未遠,覺今是而昨非。

舟遙遙以輕颺,風飄飄而吹衣。問征夫以前路,恨晨光之熹微。乃瞻衡宇,載欣載奔。僮僕歡迎,稚子候門。三徑就荒,松菊猶存。攜幼入室,有酒盈樽。引壺觴以自酌,眄庭柯以怡顔。倚南窗以寄傲,審容膝之易安。園日涉以成趣,門雖設而長關。策扶老以流憩,時矯首而遐觀。云無心以出岫,鳥倦飛而知還。景翳翳以將入,撫孤鬆而盤桓。

歸去來兮,請息交以絶遊。世與我而相違,复駕言兮焉求!悅親戚之情話,樂琴書以消憂。農人告餘以春及,將有事於西疇。或命巾車,或棹孤舟。旣窈窕以尋壑,亦崎嶇而經丘。木欣欣以向榮,泉涓涓而始流。善萬物之得時,感吾生之行休。

已矣乎!寓形宇內復幾時,曷不委心任去留?胡爲乎遑遑欲何之?富貴非吾願,帝鄕不可期。懷良辰以孤往,或植杖而耘耔。登東皋以舒嘯,臨淸流而賦詩。聊乘化以歸盡,樂乎天命复奚疑!

 

 

 

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兮(귀거래혜) : 돌아가야지

田園將蕪胡不歸(전원장무호불귀) : 전원이 묵게 되었으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旣自以心爲形役(기자이심위형역) : 이 몸이 몸소 일을 하기로 마음을 정했으니

奚惆悵而獨悲(해조장이독비) : 어찌 근심하며 홀로 슬퍼만 하랴.

悟已往之不谏(오이왕지불간) : 지나간 일이야 고칠 수 없으니

知来者之可追(지래자지가추) : 이를 쫓아 앞으로는 틀리지 않으리라!

實迷途其未遠(실미도기미원) : 실로 길을 헤매었으나 그리 멀지 않은 데에서

覺今是而昨非(각금시이작비) : 어제는 틀렸고 지금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舟搖搖以輕殤(부요요이경상) :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나아가고

風飄飄而吹衣(풍표표이취의) : 바람은 표표히 옷자락을 날리네

問征夫以前路(문정부이전로) : 나그네에게 앞길을 물어서 가자니

恨晨光之熹微((산신광지희미) : 희미한 새벽빛이 한스럽구나

乃瞻衡宇(내첨형우) : 허름한 집 처마를 보고는

栽欣載奔(재흔재분) : 기쁜 마음에 달려간다.

童仆歡迎(동복환영) : 어린 동자가 반가워하고

稚子候門(치자후문) : 어린 아들이 문에서 기다린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 우리 집 정원의 삼경4)은 황폐해졌어도

松菊猶存(송국우존) : 소나무길과 국화길은 아직도 남아있다.

攜幼入室(휴유입실) : 어린 아들 손잡고 집안에 들어가니

有酒盈樽(유주영존) : 술이 가득찬 단지가 있어

引壺觴以自酌(인아상이자작) : 단지를 당겨 술잔에 따라 자작하고

眇庭柯以怡顏(묘정가이이안) : 정원의 나뭇가지 바라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倚南窗以寄傲(의남창이기오) : 남창에 기대어 여유롭게 앉아있는데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 간신히 무릎이나 세울 수있는 방이 편안하기만 하구나!

園日涉以成趣(원일섭이성취) : 날마다 장원을 걸으니 풍취를 이루고

門雖設而常關(문수설이상관) : 문을 달았으나 항상 닫친 채로 두고

策扶老以流憩(책부노이유게) : 늙은 몸 지팡이에 기대어 아무데나 쉬어가고

時矯首而遐觀(시시수이가관) : 때로는 머리 들어 여기저기 둘러본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 무심한 구름은 산골짜기를 돌아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 새도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안다.

景翳翳以將入(경예예이장입) : 이윽고 햇볕은 어둠속으로 들어가면서

撫孤松而盤桓(무고송이반환) : 고송을 어루만져 그 주위를 맴돈다.

 

 

歸去來兮(귀거래혜) : 이제 돌아왔구나!

請息交以絕遊(청식교이절유) : 교제도 끊고 놀이도 그만두리다.

世與我而相遺(세여아이상유) : 세상과 나를 서로 잊어버리자

複駕言兮焉求(복가언혜언구) : 다시 수레에 오른들 무엇을 얻으랴?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 친척과의 정담 즐거이 듣고

樂琴書以消憂(락금서이소우) : 가야금과 책으로 우수를 달래리라!

農人告餘以春兮(농인고여이춘혜) : 농부가 봄이 왔다고 알려오면

將有事乎西疇(장유사호서주) : 서쪽 밭에 나가 일을 하고

或命巾車(혹명건거) : 혹은 건거를 타거나

或棹孤舟(혹도과주) : 작은 배를 저어서

既窈窕以尋壑(기요조이심학) : 깊은 산골을 구불구불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역기구이경구) : 높고 낮은 오르막길 언덕을 지나

木欣欣以向榮(목흔흔이향영) : 수목은 푸르러 기꺼이 꽃을 피우고

泉涓涓而始流(천연연이시류) : 샘물은 솟아나 넘치려 하고

羨萬物之得時(선만물지득시) : 세상 만물 때를 만나 즐기고 있는데

感吾生之行休(감오생이행휴) : 갈수록 내 인생이 끝이 나고 있음을 알겠다.

 

 

已矣乎(이의호) : 이젠 다 끝이로구나!

寓形宇內複幾時(우형우내복기시) : 세상에 머물고 있는 내 육체 얼마나 가랴?

何不委心任去留(하불위심임거류) : 가고 머무는 것은 자연에 맡길 일인데

胡爲惶惶欲何之(호위황황욕하지) : 어디를 바삐 또 가고자 하랴?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 : 부귀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나

帝鄉不可期(제향불가기) : 선계는 기약할 수 없으니

懷良辰以孤往(회양신이고왕) : 좋은 딴 세상 기대하고 혼자 가리라!

或執杖而耘耔(혹집장이운자) : 지팡이를 세워놓고 밭김매고 흙 돋우고

登東坳以舒嘯(등동유이서소) :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

臨清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 맑은 냇가에서 시를 지어 노래하며

聊乘化以歸盡(요승화이귀진) : 조화에 따르다가 돌아가련다.!

樂夫天命複奚疑(락부천명복해의) : 천명을 즐기면 될 일인데 다시 또 무엇을 의심하랴?

 

 

* 을사(乙巳) : 동진(東晋)의 안제(安帝) 의희(義熙) 원년(405)으로 도연명(陶淵明)의 나이 41세 때다. <晉書 陶淵明傳>에 「군(郡)이 독우(督郵)를 파견하여 현(縣)에 이르렀는데, 아전(衙前)이 속대(束帶)하고 나와서 영접하라고 전했다. 잠(潛)이 탄식하여 가로되, ‘내 오두미(五斗米) 때문에 허리를 꺾어 향리(鄕里)의 소인 앞에 나아갈 수 없다.’ 하고는, 즉일로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사직하고서 귀거래(歸去來)를 부(賦)했다.」고 했다.

* 무(蕪) : 풀이 무성하여 전답(田畓)이 해를 묵다.

* 이왕지불간(已往之不諫) : 지난 일은 고칠 수 없다.

* 삼경(三径) :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 정권 때 연주(兗州)자사를 지내던 장후(蔣詡)가 관직을 사직하고 귀향한 후 자신의 정원에 작은 산책길을 내고 각각의 길에 송(松), 죽(竹), 국(菊)을 심은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 건거(巾車) : 건(巾-헝겁)으로 가린 수레. 의거(衣車)라고도 한다.

 

<歸去來辭>는 도연명이 41살 때 마지막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가는 소회를 운문으로 쓴 작품이다. 초사체(楚辭體)의 형식을 따른 전문은 모두 240여 자(字)이며, 각운(脚韻)이 다른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거래혜(歸去來兮, 돌아가노라)"로 시작되는 첫째 장은 관리생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었고, 둘째 장은 집에 도착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셋째 장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느낀 철학을 담고 있으며, 마지막 장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겨 살아가려 한다는 자신의 다짐과 소감을 드러내고 있다. "歸去來兮"라는 감탄사가 중간에 반복되면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흐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작품 해설 <歸去來辭>는 노장 사상(老莊思想)의 영향을 바탕으로 전원생활에서 느끼는 자유와 평안을 노래한 시다. 입신과 양명에 눈이 멀어 권력에 아부하고 금권을 좇아 타락하는 관료 사회에 대한 염증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원에서 자연을 접하는 아름다움과 섭리에 따라 살아가는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후 도연명의 대표작으로 꼽히면서 6세기 초 남조(南朝) 양(梁)의 소명태자(昭明太子)가 편찬한 시문선집(詩文選集)인 <문선(文選)>에 수록되었고, 송나라 말 원나라 초에 뛰어난 시문을 모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이후 한문학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전해 내려왔다. <고문진보>는 14세기에 조선에도 전해져서 조선의 선비들이 문장을 사숙하는 교본이 되었다.

 

 

陶淵明(365~427)은 강주(江州) 심양군(尋陽) 출생으로 그 지방에서 뿌리를 내린 시골 선비 집안 출신이다. 그는 은둔 생활을 하던 아버지의 외동아들이었는데 29세 때 고향 강주의 좨주(祭酒, 교육장)로 관료생활을 시작했으나 선비의 감성과 기개가 있어 틀에 박힌 관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사임했다. 35세 때에는 장군 유뢰지(劉牢之)의 참모가 되었으나 역시 곧 그만두었고, 한두 해 뒤에 형주(荊州)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가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사직했다. 이후 팽택(彭澤) 현령(縣令)을 지내다가 41세 때 사퇴하고 은둔 생활에 들었다. 현령이 된 지 80일 쯤 되어, 현의 관리를 감찰하는 독우(督郵)에 앞서 독우의 부하에게서 자신을 마중 나오도록 연락을 받자, "내가 어째 오두미(五斗米, '쌀 다섯 말'의 뜻으로 얼마 안 되는 녹봉을 뜻함) 때문에 허리를 굽히겠느냐(我豈能爲五斗米折腰)"라고 일갈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 직후 남긴 글이 <歸去來辭>이다.

 

陶淵明은 이후 향후 20여 년 동안 이어지는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은거한 지 3년 만에 고향을 떠나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만년을 보냈다. 그는 술을 좋아하여 가세가 곧 기울었지만 그곳에서 왕홍(王弘), 은경인(殷景仁), 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이들은 이후 송나라의 장관과 문단의 지도자가 되어 도연명의 이름과 작품이 후세에 전해지는데 공을 세웠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 5언시 115,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80수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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