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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송강사(鄭松江祠)에 가보다

by 산산바다 2011. 12. 26.

산과바다



정송강사(鄭松江祠)에 가보다

2011. 12. 26.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위치

송강 정철(1536∼1593)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정철의 시 보러가기

 

 

 

훈민가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몸이 살았으랴

하늘같은 은덕을 어디에다 갚을가

 

 

 

 

 

 

 

 

 

 

 

 

 

 

 

 

정철(鄭澈) 1536(중종 31)~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1536∼1593)은 국문학사에서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명종 17년(156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선조 17년(1584)에 대사헌이 되었다.

1585년 양사(兩司)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했다. 이후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면서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특배되어 최영경의 옥사를 다스렸다. 1590년(선조 23) 좌의정이 되고, 인성부군(寅城府君)이 되었다. 1591년 이산해의 배후책동에 빠져 건저(建儲)를 하려 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리고 '대신으로서 주색(酒色)에 빠졌으니 국사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가 빗발쳐 파직된 뒤에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유배생활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석방논의를 해 5월에 풀려났다. 평양에 있는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했다. 관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다가 1593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강화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주 근처 관동(寬洞)에 산소와 사당이 있다. 묘는 송강사 남쪽 1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래 고양군(현 고양시) 원당면에 있던 것을 조선 현종 6년(1665)에 송시열 선생이 현 위치에 묘자리를 정하고 후손 정양이 이장하였다.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 정철(鄭澈)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沉)이다.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된 누이를 보러 동궁(東宮)에 자주 드나들어 명종(明宗)과 친했다. 1545(인종 1)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부친은 유배를 당했다가 1551(명종 6)에 풀려났다. 이후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았다. 양응정·임석천·김인후·송순·기대승 등에게 수학하고, 이이·성혼·송익필 등과 교유했다. 1562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명종으로부터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으나 처남을 살해한 경양군(景陽君)의 처벌문제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자세를 고집하여 명종의 뜻을 거슬려 말직에 머무르다 1567년에 지평이 되었다. 이어 곧 북관어사가 되었으며 1568년에는 이이와 같이 독서당(讀書堂)에 피선되고 수찬·좌랑·종사관·교리·호남어사 등을 지냈다. 1571년 부친상을, 1574년 모친상을 당하고 주로 경기도 고양에서 지냈다.

1575년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일로부터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분쟁에서 서인의 편에 가담했다. 분쟁에 휘말려 고향인 전라도 창평에 내려와 있다가 1578년에 조정에 다시 나와 장악원정·직제학·승지 등을 지냈다.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행뢰사건(行賂事件)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탄핵을 입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강원도에 1년 동안 머무르면서 관동별곡과 시조 16수를 지었다. 1581년에 병조참지·대사성을 지내다 노수신에의 비답(批答)이 논핵(論劾)에 가깝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 창평으로 돌아갔으나 곧 전라도관찰사를 제수받아 1582년까지 1년간 역임했다. 도승지·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그곳의 시폐(時幣)를 상소로 올렸다.

1583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기주실의'(嗜酒失儀)하고 '강편기극지인'(剛偏忌克之人)이라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가 올려지는 등 논핵을 당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584년에 대사헌을 제수받고 총마(寵馬)를 하사받아 총마어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1585년 양사(兩司)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했다. 이후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면서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등을 지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특배되어 최영경의 옥사를 다스렸다. 1590(선조 23) 좌의정이 되고, 인성부군(寅城府君)이 되었다. 1591년 이산해의 배후책동에 빠져 건저(建儲)를 하려 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리고 '대신으로서 주색(酒色)에 빠졌으니 국사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가 빗발쳐 파직된 뒤에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유배생활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석방논의를 해 5월에 풀려났다. 평양에 있는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했다. 관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다가 1593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강화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주 근처 관동(寬洞)에 산소와 사당이 있다. 문집으로 송강집7책과 송강가사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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