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토정 이지함(李之驪)의 묘소를 둘러보며
토정 이지함(李之驪)(1517∼1578)은 본관 한산(韓山). 자 형백(馨伯)·형중(馨仲). 호 수산(水山)·토정(土亭). 시호 문강(文康).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이다.
묘소는(충남 문화재자료 제320호)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 27-3에 있고, 묘의 앞에는 묘비·상석 등이 있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다음 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박순(朴淳)·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유했으며, 당대의 일사(逸士) 조식(曺植)은 마포로 그를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이지함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도가적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도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金繼輝)의 질문에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토정 이지함 선생의 토정집에 나오는 대인(大人)에 관한 단상이다
"사람에게는 네가지 원함이 있다.
안으로는 신령스럽고 굳세기를 원하고
밖으로는 富하고 貴하기를 원한다.
귀하기는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더 귀함이 없고
부하기는 욕심내지 않는 것보다 더 부함이 없으며
굳세기는 다툼이 없는 것보다 더 굳셈이 없고
신령스럽기는 알지 않는 것보다 더 신령 스러움이 없다.
그러나 알지도 않고 신령하지도 않음은
어둡고 어리석은 者가 그러하고
다투지도 않고 굳세지도 않은 것은
나약한 者가 그러하며
욕심내지도 않고 부하지도 않은 것은
빈궁한 者가 그러하고
벼슬하지도 않고 귀하지도 않은 자는
미천한 者가 그러하다.
알지 못해도 신령하며
다투지 아니해도 능히 굳쎄고
욕심내지 않아도 능히 부하며
벼슬하지 않아도 능히 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大人만이 그러 할 수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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