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유관순사우와 생가를 들리다
유관순(柳寬順) 1902. 3. 15 충남 천안~1920 서울.
유관순사우(유관순기념관)위치-병천아우네장터에서 약 500m 거리
한국독립운동가, 고흥유씨, 충청남도출신자, 옥사한사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유관순(뒷줄 맨 오른쪽), 이화학당 ...
이화학당(梨花學堂) 재학 당시 3·1운동이 일어나자 아우내(竝川) 장터 시위를 주동하고 수감된 뒤에도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죽었다.
본관은 고흥(高興). 아버지는 중권(重權)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 뒤 총독부 임시휴교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 당하자 3월 8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향에서는 이종성(李鍾成)이 주동이 되어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예배가 끝난 뒤 조인원(趙仁元)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여 즉석에서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 목천, 연기, 청주, 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으로 선출되어 20일 동안 수백리를 왕복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고 의자를 집어던져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몸이 상했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 때문에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유관순동상.....
1920년 17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8·15해방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유관순열사생가 (사적 제230호)
건립일-1991년 12월 30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위치
유관순열사 생가는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모두 전소되어 빈터만 남아 있는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하였다.
생가 옆에는 기념비가 서 있고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생가의 오른쪽에 매봉교회가 위치해 있다.
생가 오른쪽 앞에 관리사가 위치해있다.
유관순 생가와 멀지 않은 같은 마을에 조병옥박사의 생가가 있다.
조병옥(趙炳玉) 생가를 둘러보고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위치
조병옥(趙炳玉)-한국 독립운동가 정치가
1894. 2. 15 충남 천안~1960. 2. 10.
호는 유석(維石). 충청남도 공주의 영명학교를 거쳐 1912년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연희전문학교, 191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킹스턴 시의 와이오밍고등학교를 거쳐 1922년 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23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1925년 동 대학원에서 〈한국의 토지제도〉라는 연구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시절 한인회(韓人會)·흥사단(興士團)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했고, 1925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으나 좌익 교수 배척을 명분으로 사임했다. 이후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이사와 비밀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창립위원과 재정총무를 역임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에 취임했으며, 1937년 수양동지회(修襄同志會) 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하고, 출감 후 협력을 바라는 일제의 요구를 일체 거부하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는 등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일제의 압력과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향리인 용두리로 내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소개(疏開)생활을 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김성수·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미군정 경무부장(警務部長)으로 재직하면서 치안유지와 좌익분자 색출에 진력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대통령특사와 국제연합 한국대표 등을 지냈고, 1950년 6·25전쟁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대구 방위전선에 진두지휘를 담당해 이 지역을 사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의 의견 충돌로 장관직을 사임하고, 독재화되어가는 자유당정권에 맞서 싸우는 데 앞장섰다. 1954년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5년 신익희·장면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의 최고위원, 1956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어 야당을 영도했다. 야당지도자 시절 여당과의 협상에서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草家三間)을 태울 수 없다"는 기본적인 자세를 견지, 야당 내에서 일부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협상과 타협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태도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신병 치료차 도미(渡美),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수술 받고 가료 중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민주주의와 나〉〈나의 회고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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