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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여행이 좋아**/문화유적

해미읍성에 가보다

by 산산바다 2007. 11. 3.

산과바다 

 

            海美邑城(해미읍성)에 가보다. 

2007.10.28

동반하여 나들이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소재한 조선시대의 읍성.

 

해미읍성 정문, 충남 서산시 ...


태종14년(1413)에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덕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성종22년(1491)에 성벽이 완성되었다. 1974년 동문과 서문이 복원되었다.

 

 북동쪽의 낮은 구릉을 의지하여 넓은 평지를 에워싸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해미읍성(海美邑城)은 둘레가 6 630척 높이가 13척 치성(雉城)이 둘 우물 6개에 성벽 바깥으로 깊은 해자(垓字)를 팠던 자국이 남아 있다.

 

성벽은 대체로 가공한 화강암으로 쌓되 아랫부분부터 위로 오르며 돌의 크기가 작고 성문은 무사석축(武砂石築)으로 쌓았는데 남문(南門)은 홍예문(虹예門)이 되고 동문(東門)과 서문(西門)은 사각문(四角門)이다.


 

수구문(水口門)이 서문 옆에 있으며 치성(雉城)이 두 개이고 성벽 바깥으로는 남문인 진남루는 홍예를 올려 문을 삼고 그 위에 3칸 2층 누각을 세웠다.


서문과 동문은 있으나 북문은 원래 없었다. 이 곳은 조선시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인 35세 때 젊은 나이에 훈련원교관으로 부임해 전라도로 전임될 때 까지 10 개월간 근무(1579년 선조12년)한 곳이다.


해미읍성 정문인 진남문의 누각에서 바라본 해미읍 시가지 모습...

 

고종(高宗) 3년(1866)에 천주교(天主敎)를 탄압하면서 교도들 천여명을 처형했다. 사적116호로써 조선시대 축성된 읍성 중 원형 보존이 전국에 있는 성중에서 가장 잘 된 5백년 풍파를 이겨온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해미읍성충청남도 서산시 해미읍에 있는 성으로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1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건축된 성 중에서는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한 성으로, 서산시에서는 해미읍성을 이용한 축제와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있으며, 매년 6월에 해미읍성 역사체험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곳은 선조 12년(1578) 충무공 이순신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간 근무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은 원래 왜구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축되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이 성에 주둔한 것도 그때문이다.

  

세조때에 군사 제도가 진관체제 개편되면서도 이 역할은 여전하여 충청도 지역의 주요 군사거점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효종이 병마절도사를 청주로 이전한 뒤로는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서 지방 행정 중심지역할을 하게 된다. 해미읍성이란 명칭도 이때 개명된 것으로 본래는 해미내상성(內廂城)이었다. 


사적 제116호.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도 덕산(德山)으로부터 충청도병마절도사영(忠淸道兵馬節度使營)이 옮겨온 곳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한 1651년(효종 2)까지 군사적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어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3,172척, 높이가 15척, 성 안에는 3개의 유물과 군창이 설치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6,630척으로 보(步)로 계산하면 2,219보가 되고 높이는 13척, 치성(雉城)은 382첩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에 문이 있다고 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볼 때 해미읍성의 규모가 훨씬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에 이 성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의 표본으로 삼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수공사를 하는 한편, 성 안팎에 무질서하게 자리잡은 민가를 철거·이전시키고 종합적인 보존계획을 세웠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으며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관아 터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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