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용운(韓龍雲) 생가지에 가보다
2012. 10. 3.
산과바다는 선재님과 동행하여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위치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한용운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한국의 시인, 불교 승려, 작가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이고, 호는 만해(萬海)이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다.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자, 한용운은 최남선이라는 사람은(마음속으로) 이미 장례를 치러서 당신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유년기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때 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열네 살이 되던 해인 1892년에 전정숙과 결혼했다. 열여섯 살 되던 해인 1894년 부터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출가와 문학
백담사 경내의 만해기념관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했으며, 1908년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1913년 박한영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했고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 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몸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독립운동
3.1 만세 운동과 투옥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피신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한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사회단체 활동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만공·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단재 신채호의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사망
만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심우장)에서 중풍으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
푸른산빗을깨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떨치고 갓슴니다.
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微風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은 첫<키쓰>의追憶은 나의運命의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 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
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
한용운 시 http://blog.daum.net/domountain/6069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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