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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좋아**/국내 여행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by 산산바다 2009. 7. 29.

산과바다

 


온달관광지

2009.7.18

온달관광지 둘러봄(오서리 래프팅 후 )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한강 남쪽에 위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온달(溫達, 559? ~ 590년)은 고구려(高句麗)의 장군이다. 살림이 구차하여 구걸로 어머니를 봉양했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다녔기 때문에 바보 온달로 불리었다.

 


뒤에 평원왕(平原王)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를 찾아온 평강공주(平岡公主)와 결혼한 후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해마다 음력 3월 3일(삼짇날)에 열리는 사냥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올렸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요동을 거쳐 고구려에 침입하자 선봉에 나서 승전하여 제1의 전공자가 되고, 대형(大兄) 작위를 받았다.

 


영양왕(嬰陽王) 1년(590년) 신라(新羅)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 땅을 탈환하고자 출정하여 아단성(阿旦城)에서 적병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온달설화(溫達說話, 바보온달설화, 전설)


 

온달(559~590)에 얽힌 인물전설.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다. 고구려 평원왕 때 외모는 누추하나 마음은 명랑한 바보 온달이라는 거지가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걸해서 눈 먼 어머니를 봉양했다.

 

당시 평원왕에게 울보인 딸(평강공주)이 있어서 늘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놀렸다.

 

공주가 자라서 상부 고씨에게 출가하라는 부왕의 명을 어릴 때의 농담을 들어 거역하자 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내쫓는다.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서 온달 모자를 설득하여 결혼을 한다. 몸에 지니고 나온 금팔찌로 병든 국마를 사서 잘 길러 준마를 만들고 그 말로 온달이 무술을 연마하게 했다.

 

고구려에는 매년 3월 3일 군신 및 5부의 병사들이 낙랑언덕에서 사냥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온달이 사냥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평원왕을 놀라게 한다.

 

온달은 후주(後周)와의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워서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大兄)의 벼슬에 오른다.

 

590년 온달은 임금에게 신라에 빼앗긴 한수 이북의 땅을 회복하겠으니 군사를 달라고 자청하여 신라군과 아단성에서 싸우다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했다.

 

장례를 지내려는데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쓰다듬으며 생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돌아가라 하자 관이 움직여 장사지냈다 한다.

 

 


온달설화〉에 관해서는 역사와 문학분야 등에서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우부현녀(愚夫賢女) 주제로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다. 즉 현명한 아내가 어리석은 남편을 개발시켜 성공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는 가부장제하에서 억눌려 살아가던 여인들에게 대상기능(代償機能)을 담당했으리라고 보는 심리학적인 해석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온달설화〉는 동일 유형의 구전설화를 통해서 볼 때 가장 심도있는 의미파악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민담 가운데는 아버지와 다투고 집에서 쫓겨난 딸이 숯구이 총각을 만나서 생금장(生金藏)을 발견해 부자가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숯구이 총각의 생금장'·'내복에 산다' 등의 제목이 붙은 이 구전 민담은 〈삼국사기〉의 온달전, 〈삼국유사〉의 〈무왕설화〉 등과 함께 '쫓겨난 여인 발복(發福)' 설화라는 한 유형으로 묶일 수 있다.

 

발복설화 유형의 핵심은 부녀의 분리와 전도된 입장에서의 재결합을 통한 통과의례과정과 금(金)이라는 요소이다.

 

발복설화가 신화적 연원을 가졌으리라고 보는 관점에서 원형을 탐색하면 발복설화의 원형은 경제적인 주도권을 놓고 아버지와 다투고 집을 나온 부신(富神)의 기능을 가진 여인이, 자신보다 문화단계가 낮은 남자를, 생금장을 녹이는 야장(冶匠)으로 변모시키면서 획기적인 번영을 이룩한 사실의 반영이며, 철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문화신화라고 보는 것이다.

 

야장과 샤먼이 사회의 최고위 신분이던 원형에서, 주인공의 금패물로 말을 사서 남편을 장수로 만든다.

 

이는 공주가 자신보다 세력이 약한 집단의 남자와 결합해서 남편을 군사귀족으로 출세시킨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방대한 영역에 걸쳐 있었던 고구려의 국가체제가 토착세력과의 연계를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지방토족과 중앙귀족과의 결합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발복설화는 몽골의 〈조홍마(棗紅馬) 이야기〉, 일본의 〈숯구이 고고로 이야기〉 등과 같은 유형으로 이 이야기가 우리와 문화적 연관성이 깊은 여러 지역에서 전승되었다는 사실은 그 원형이 문화신화였을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해준다.  

 

 

천추태후 드라마 촬영기념관을 둘러보고 시간이 없어 산성과 동굴을 둘러보지못하는 아쉬움을 남긴채.........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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