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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詩/悟道頌

영파성규(影波聖奎) 오도송(悟道頌)

by 산산바다 2022.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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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파성규(影波聖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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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파성규(影波聖奎오도송(悟道頌) (1728 ~ 1812)

 

 

불종성(佛鐘聲 : 종소리에서 나오는 부처님의 소리(法音))

七日關中亦有言(칠일관중역유언) : 7일 동안 관중에서 부처님의 법음소리 들었네.

威音雷若震乾坤(위음뢰약진건곤) : 위엄스런 우레소리 천지를 진동했다.

欲聆無說傳千古(욕영무설전천고) : 말없이 말한 천고의 진리를 알고 싶었는데

秋夜寒鐘掛寺門(추야한종괘사문) : 가을밤 찬 종소리 절문에 걸렸도다.

 

 

* 영파 성규(影波 聖奎, 1728~1812) 스님의 法名성규(聖奎)法號영파(影波)로서 함월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제자이고 환성 스님의 손자뻘 제자이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 인근 마을 출신이다. 영파스님의 자는 회은(晦隱)이고 성씨는 전() 씨로서 고려 옥산군(玉山君) 영령의 16대손이며 만기(萬紀)의 아들이다.

어머니 박씨는 꿈에 큰 별 하나가 품 안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잉태, 조선조 영조 4(1728) 기이한 골격을 갖춘 아이를 낳는다.

어려서부터 슬기로움이 뛰어나 학문에 통달하고 글씨도 뛰어났다.

15세 무렵 출가를 결심, 4년이 지난 뒤 용천사로 찾아가 환응(喚應) 장로에게 간청, 머리를 깎고 계율을 받아 수행의 길로 나선다.

이후부터 스님은 <화엄경>에 대한 공부를 본격화 30년 세월을 하루 같이 공부에만 전념한다. 영파 스님은 설파와 함월 두 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의 종지와 선교의 요령을 모두 터득한 뒤 함월 스님의 의발을 전해 받고 나서 영조 30(1754) 이래 등단 설법하다가 순조 12(1812) 생애를 마쳤다. 나이 85, 승랍 66세였다.

 

* 영파 성규(影波聖奎 1728~1812)는 화엄학과 선염불에 해박했던 사상가이자 대둔사 13대강사의 한 분이다. 은해사에 머물면서 경상도 지역에서 화엄종지를 펼쳤다.

그는 함월 해원涵月海源(1691~1770)의 법제자로 함월 해원과 설파 상언雪坡尙彦(1707~1799)에게 화엄종지와 선교의 요체를 이어받았으며, 황산 퇴은黃山退隱으로부터화엄경전질을 받아 30년 동안 연구하여 현리玄理와 묘오妙悟를 체득하였다. 선을 공부할 때에도화엄경을 탐독하였고, 이에 입각해 보현보살과 관음보살을 원불願佛로 삼기도 하였다.

생전의 명성에 걸맞게 영파선사의 진영은 김룡사 화장암, 통도사, 용문사, 은해사 등에 전하고 있다. 이 중 김룡사 화장암과 통도사의 진영은 얼굴 표정과 자세뿐만 아니라 채색 사용도 비슷하여 하나의 모본母本을 토대로 여러 본의 진영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용문사 영파 성규의 진영은 조선후기의 진영과 마찬가지로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틀고 가부좌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짙은 먹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입고 오른손에 장염주를, 왼손에 주장자를 쥐고 있다. 80세에 입적한 선사를 재현한 듯 이마와 입가에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있고 선사의 인자함을 느낄 수 있도록 눈가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인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김룡사 화장암이나 통도사 진영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인물 묘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는 후대에 진영을 새롭게 그리면서 원본의 섬세함을 살리지 못한 결과이다. 진영 오른쪽에는 영파 성규의 자찬自讚이 실려 있다. 자찬 끝에는 계미년에 영파 성규의 6세손인 설해 민정雪海珉淨이 고쳐 그렸다는 기록이 덧붙어 있다. 영파 성규의 자찬은 김룡사 화장암 진영에도 쓰여 있다. 진영을 그린 설해 민정은 19세기 후반에 하은 응상霞隱應祥과 함께 경상도에서 활동한 화승으로, 1874년에 김룡사와 가까운 대승사의 지장탱과 신중탱을 조성하였다.

화승의 법맥, 활동 지역과 사찰 등을 고려하면, 설해 민정은 김 룡사 화장암 진영을 이모해 용문사 진영을 제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설해 민정은 1884년에 용문사에 대규모 불사가 있자 하은 응상과 함께 응진전의 석가모니불탱과 16나한탱을 제작하였다. 따라서 제찬에 적힌 계미년은 용문사 불사가 있기 한해 전인 1883년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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