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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禪師들의 禪詩

圓鑑國師, 圓鑑沖止(원감국사, 원감충지)의 禪詩(선시) (81)~(88)

by 산산바다 2022.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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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선시 

 

 

 

                  圓鑑國師, 圓鑑沖止(원감국사, 원감충지) (1226~1292)禪詩 (81)~(88)

 

 

圓鑑國師, 圓鑑沖止, 釋圓鑑(원감국사, 원감충지, 석원감) (1226~1292. 高麗 . 俗名 魏元凱(위원개). 本貫 長興. 諡號(시호) 圓鑑國師. 定安 <現在長興人. 처음 法名法桓. 沖紙. 自稱 號宓庵이라 함)

 

*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12261292)

고려시대 선승(禪僧). 수성사(修禪社) 6(). 성은 위(). 속명은 원개 (元凱). 본래의 법명은 법환(法桓), 뒤의 법명은 충지. 자호는 복암(宓庵). 전 라남도 장흥출신.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호소(號紹)이며, 어머니 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선림(禪林) 에 나아가 득도하기를 원하였지만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지 오래지 않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하였 는데, 이는 항상 도를 얻고자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닌 <화엄경> 속의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본받고자 함이었다.

1266(원종 7) 여름에 원오국사의 교유(敎諭)와 조지(朝旨)로 인하여 부득이 경상남도 김해군의 감로사(甘露寺) 의 주지가 되었다. 1269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다시 3년 후에는 감 로사를 떠나 승주군의 수선사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보조국사(普 照國師)로부터 시작된 수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을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선 ()보다는 교()에 치중하였다.

128311월에는 대중을 거느리고 조계산을 출발하여 원오국사가 선원사에서 수선(修繕)하여 수선사로 옮기던 거란본대 장경을 도중에 맞이하여 나누어 지고 왔고, <단본대장경경찬소(丹本大藏經慶 讚疏)>와 시를 지었다. 1284년 수선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 로 옮겨 선정을 닦고 있던 중 12862월에 원오국사가 그를 수선사의 사주 (社主)로 추천하는 장문(狀聞)을 왕에게 올리고 입적하였다. 장문을 받은 충 렬왕은 원외시랑(員外侍郞) 김호담(金浩淡)을 시켜 그로 하여금 616일에 개당(開堂)하게 함에 따라 수선사의 제6세가 되었다.

불교의 삼장(三藏)에 이 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사림(詞林)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과 시는 당대의 유림에서도 추앙을 받았다. 도를 닦음에 있어서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오 조(五祖) 홍인(弘忍)에게서 법을 인가받은 파강이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부 끄러워하였지만, 수선사 제1세였던 지눌의 순수선시대와는 달리 유학사상과 상교(相交)하는 선풍(禪風)을 풍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유사(儒士)들처럼 천 명을 믿고 운명에 안주하는 유선조화(儒禪調和)의 사상조류를 보였고, 상제상 천(上帝上天)의 신앙을 통하여 유도이교(儒道二敎)를 불교속에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선풍은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았고, 지관(止觀)의 수행문 중 지()를 중시하였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지눌의 종 풍(宗風)을 계승하였다.

1292110일 삭발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 (門人)들에게 "생사(生死)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는 말을 남겼다. 정오가 지나자 분향하고 축원을 올린 뒤 선상(禪床)에 앉아 '설본무설(說本無說)'이라 설하고, 문인들이 청하는 바에 따라 "돌아보니 세상살이 67년인데, 오늘 아침 모든 일을 마쳤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탄연하여 평탄하고, 노두가 분명하니 어찌 길을 잃으랴. 손에는 겨우 하나의 대지팡이뿐이지만, 가는 길에 다리가 피로하지 않을 것이 또 한 기뻐라(閱過行年六十七 及到今朝萬事畢 故鄕歸路坦然平 路頭分明未曾失 手中裳有一枝 且喜途中脚不倦)."라는 게송(偈頌)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법랍 39세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충렬왕은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81) 閑中偶書(한중우서) 2 : 閑暇로운 偶然히 짓다

 

閑居心自適 ~ 閑暇롭게 사니 마음 절로 洽足하고

獨坐味尤長 ~ 혼자 앉아있으니 그 맛이 더욱 悠長(유장)하다.

古柏連高閣 ~ 樓臺에 잇대어 있는 오래된 잣나무

幽花覆短墻 ~ 그윽한 꽃들은 짧은 담을 덮는다.

瓷甌茶乳白 ~ 茶器 속의 牛乳빛처럼 희고

榧机篆煙香 ~ 煙氣 책상에서 솔솔 피어오른다.

雨歇山堂靜 ~ 비 그친 은 조용한데

臨軒快晩凉 ~ 안으로 스며드는 爽快(상쾌)한 저녁의 서늘함이여.

 

 

 

(82) 閑中偶書(한중우서) : 閑暇로운 偶然히 짓다

 

庵在千峰裡 ~ 천봉우리 가운데에 숨겨진 절

幽深未易名 ~ 깊고 깊어 그윽함은 말로 다 못해

開窓便山色 ~ 창을 열면 산 빛이 밀려들고

閉戶亦溪聲 ~ 문 닫아도 들리나니 냇물소리

 

庵子봉우리 속에 아득히 숨어

골이 깊고 하여 이름조차 알 수 없네.

을 열면 다가서는 빛이요

닫으면 스며드는 개울 소리네.

 

 

 

(83) 閒中偶書(한중우서) :  한가로운 때 우연히 쓰다

 

飢來喫飯飯尤美 ~ 배고파 밥 먹으니 밥맛이 더욱 좋고

睡起啜茶茶更甘 ~ 잠 깨어 차 마시니 차 맛 더욱 좋다.

地僻從無人扣戶 ~ 사는 곳 외져 찾는 사람 없어도

庵空喜有佛同龕 ~ 암자엔 부처님 계셔 기쁨이 함께하네.

 

배고파서 밥을 먹으면 밥이 더욱 맛있고

자고 일어나 를 마시면 가 더욱 甘味롭다.

땅이 窮僻(궁벽)하여 두드리는 사람 없으니

庵子가 텅 비어 부처님과 한 에 있음이 기쁘구나.

 

 

 

(84) 閑中自慶(한중자경) : 閑暇한 내게 祝賀한다

 

日日看山看不足 ~ 날마다 을 보아도 보는 것이 늘 不足하고

時時聽水聽無厭 ~ 때마다 물소리 듣건만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네.

自然耳目皆淸快 ~ 自然으로 하면 귀와 눈 모두 맑고도 爽快(상쾌)

聲色中間好養恬 ~ 소리와 깔 그 속에 고요함을 기르네.

 

 

 

(85) 閑中詠懷(한중영회) : 閑暇한 가운데 속마음을 읊다

 

蕭條棲息寄山阿 ~ 쓸쓸한 人生 山과 언덕에 붙여

老去安閑不厭多 ~ 늙어갈수록 便安하고 閑暇함이 싫지 않도다.

隱几雲煙幾舒卷 ~ 冊床에 서린 구름안개 몇 이나 서리고 흩어졌는가?

杜門光景自消息 ~ 을 닫으니 그 光景 저절로 사라지는구나.

 

 

 

(86) 曉起聞鳥聲有作(효기문조성유작) : 새벽에 일어나 새소리 듣고 짓다

 

人間到處足歡場 ~ 世上 가는 곳엔 充分歡樂場所

綠竹尋常閙畵堂 ~ 音樂소리로 늘 豪華로운 집이 소란하다.

冷炎山家無可樂 ~ 쓸쓸한 山家에 즐길만한 것 혀 없어

天敎百鳥咽笙篁 ~ 하늘이 온갖 새들을 피리 불게 하였구나.

 

 

 

(87) 戲書(희서) : 장난스럽게 쓰다

 

諸君手裏有錢神 ~ 그대들은 손 안에 돈의 이 들어 있어

到處能回滿面春 ~ 가는 곳마다 히 온 얼굴에 봄을 돌려올 수 있지.

自笑山僧與時左 ~ 스스로 可笑롭구나, 나는 時代와 맞지 않아

唯將冷語屢氷人 ~ 오로지 썰렁한 말로 자주 사람들을 얼려버리니.

 

 

 

(88) 臨終偈(임종게) : 임종게

 

閱過行年六十七 ~ 돌아보니 世上살이 六十七 年인데

及到今朝萬事畢 ~ 오늘 아침 모든 일을 마쳤네.

故鄕歸路坦然平 ~ 故鄕으로 돌아가는 길은 平坦하고

路頭分明未曾失 ~ 노두가 分明하니 어찌 길을 잃으랴.

手中裳有一枝笻 ~ 손에는 겨우 하나의 대지팡이뿐이지만

且喜途中脚不倦 ~ 가는 길에 다리가 피로하지 않을 것이 또한 기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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