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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 ***/樂天 白居易 詩

곡유상서몽득이수(哭劉尙書夢得二首) - 백거이(白居易)

by 산산바다 2021.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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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유상서몽득이수(哭劉尙書夢得二首) - 백거이(白居易)

                몽득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2

 

 

其一

四海齊名白與劉(사해제명백여유) : 온 세상에 유백으로 이름 함께하면서

百年交分兩綢繆(백년교분양주무) : 평생 나눈 둘의 우정 끈끈했는데

同貧同病退閑日(동빈동병퇴한일) : 가난과 지병과 여유까지 함께하다

一死一生臨老頭(일사일생임노두) : 늙은이를 남겨두고 먼저 떠나버렸네

杯酒英雄君與操(배주영웅군여조) : 함께 마시고 취하며 정치혁신 꿈꾸었고

文章微婉我知丘(문장미완아지구) : 문장 속 깊은 뜻도 나는 알아보았지

賢豪雖歿精靈在(현호수몰정령재) : 현자와 영웅은 죽더라도 혼은 남아 있다 하니

應共微之地下游(응공미지지하유) : 먼저 떠난 미지와 함께 땅 속 세상도 돌아보게

 

 

* 綢繆(주무) : (우정이나 애정이) 간절하고 끈끈하다. 단단하게 동여매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다.

* 老頭(노두) : 백발(白髮). 얼굴에 나이 든 티가 나는 것을 가리킨다. 나이 든 남자에 대한 호칭이기도 하다.

* 微之(미지) : 원진(元稹)을 가리킨다. 원진은 유우석보다 11년이나 앞서 세상을 떴다.

 

회창(會昌) 2(842) 가을, 유우석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작품이다.

유우석은 젊은 시절 왕숙문(王叔文)의 정치개혁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뒤 오랫동안 장안에서 밀려나 장강 남쪽의 지방을 전전하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낙양에서 이름뿐인 한직을 얻어 지내게 되었다.

* <신당서(新唐書)백거이전(白居易傳)>에서는

백거이가 처음에는 원진과 시를 주고받아 원백(元白)으로 불리다가(居易初與元稹酬咏, 故號元白),

원진이 죽은 뒤에는 유우석과 함께 유백(劉白)으로 불렸다(稹卒, 又與劉禹錫齊名, 號劉白).이라 하였다.

 

 

其二

今日哭君吾道孤(금일곡군오도고) : 그대를 위해 우는 오늘 내 외로움을 말하느라

寢門泪滿白髭鬚(침문누만백자수) : 문 앞에서 눈물이 수염을 타고 흘러 내리는데

不知箭折弓何用(부지전절궁하용) : 살 부러진 활을 앞으로 어떻게 쓸지 모르겠고

兼恐唇亡齒亦枯(겸공순망치역고) : 입술이 사라져버린 치아가 마를 것도 걱정되네

窅窅窮泉埋寶玉(요요궁천매보옥) : 캄캄한 무덤 속에는 귀한 것들이 묻힐 테고

駸駸落景挂桑楡(침침낙경괘상유) : 달려가는 것 같은 석양도 늙은 날들을 비출 텐데

夜臺暮齒期非遠(야대모치기비원) : 무덤으로 갈 늙은 나이 그리 멀지 않으니

但問前頭相見無(단문전두상견무) : 앞으로는 서로 만날 일 없을 것을 물어보네

 

 

* 유우석(劉禹錫 772~842)

당조(唐朝)의 저명한 시인으로 자는 몽득(夢得)이고 소주(蘇州) 가흥(嘉興-지금의 저장성浙江省에 속함) 사람이다. 정원(貞元) 9(793)에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진사가 되었다. 시와 문장에 두루 능하고 제재 또한 광범위하여 유종원(柳宗元)과는 유유(劉柳)’로 병칭되고 위응물(韋應物), 백거이(白居易)와는 삼걸(三杰)’로 불렸으며 백거이와는 유백(劉白)’으로 합칭되었다. 백거이는 그를 시호(詩豪)라고 칭했으며,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낸 까닭에 사람들이 유빈객(劉賓客)이라고도 불렀고, 만년에 검교예부상서, 비서감 등의 명예직 직함을 가진 적도 있어서 비서유상서(秘書劉尙書)라고도 불렀다. 누실명(陋室銘)죽지사(竹枝詞), 양류지사(楊柳枝詞), 오의항(烏衣巷)등의 명편을 남겼고, 철학 저작으로 천론天論(3), 문집으로 유몽득문집劉夢得文集유빈객집劉賓客集을 남겼다.

 

* 원진(元稹 779~831)

당조(唐朝) 때 시인으로 자는 미지(微之) 또는 위명(威明)이고, 낙양(洛陽) 사람이다. 북위(北魏) 종실인 선비족 탁발부의 후예로 부친 원관(元寬)과 모친 정씨(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부터 백거이(白居易)와 함께 신악부(新樂府)를 제창한 그를 사람들이 원백(元白)으로 병칭하였다. 어려서 부친이 세상을 뜬 뒤 모친을 따라 봉상(鳳翔)에 있는 외가로 가서 자랐다. 정원(貞元) 9(793)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제수한 뒤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다. 직간을 잘하여 보수적인 관료와 환관들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구세력과 타협하여 벼슬을 살았다. 무창군절도사(武昌軍節度使)를 지내던 중 진중에서 병사했다. 염시(艶詩)와 도망시(悼亡詩)에 특히 능했다. 원씨장경집元氏長慶集60권과 소집小集10권을 남겼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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