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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57조 태고보우(太古普愚)

by 산산바다 2022. 11. 20.

산과바다

태고 보우(太古普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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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7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

 

 

* 보우선사(普愚禪師 1301~1382)는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 속성은 홍(). 고려 홍주현(현 충남 홍성군) 출신.

13세에 양주 회암사 광지선사 문하로 출가. 중국으로 건너가 임제종 19대손인 원나라 청공(淸珙)선사 문하에 들어가 수학.

 

悟道頌(오도송)

趙州古佛老(조주고불로) : 조주에 사는 옛 조사

坐斷千聖路(좌단천성로) : 앉은 채 천성의 길을 끊었네.

吹毛面提(吹毛적면제) : 칼날을 바로 눈앞에 대어도

通身無孔窺(통신무공규) : 온몸에 하나의 구멍도 없네.

狐兎絶潛踪(호토절잠종) : 여우나 토끼도 자취 감춘 중

身師子露(번신사자로) : 문득 뛰어드는 사자 한 마리

打破牢關後(타파뢰관후) : 철벽같은 그 관문 때려 부수니

淸風吹太古(청풍취태고) : 맑은 바람이 태고를 불어버리네.

 

 

* 태고보우(太古普愚)선사(1301~1382)나옹 혜근선사백운 경한선사와 더불어 여말삼사(麗末三師)로 추앙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이다.

선사는 1301년에 태어나 1350년 이후인 공민 왕대에 활동하였으며 조선 건국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382년에 입적하였다. 선사는 왕사와 국사에 책봉되면서 불교계에 대한 쇄신을 꾀하고자 하였고 선사가 진작시킨 선풍은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에도 빛을 발하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 불교계에는 선사와 그의 문도가 계통적으로 이어진다는 법맥이 설정되어 있다.

 

고려 말기 스님. 태고(太古)는 호이다. 속성은 홍(洪)이며, 홍주 사람이다. 13세에 양주 회암사에서 광지에게 출가하고, 가지산 하총림(下叢林)에서 도를 닦아,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다. 용문산 상원암ㆍ성서(城西)의 감로사에 고행 정진하였고, 1337년(충숙왕 복위 6) 송도 전단원(栴檀園)에서 참선하다가 다음 해 정월에 크게 깨닫는다. 이에 삼각산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있으면서 태고라 호(號)하고 태고암가를 지었다. 1346년(충목왕 2) 중국에 가서 호주 하무산 56조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잇고 동국(東國) 임제종의 초조(初祖)가 되다. 다음 해 본국에 돌아와 용문산 소설암에 있었다.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법을 묻고, 왕사(王師)를 삼아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9산(山)을 통합하여 1종(宗)을 만들게 하였으나, 뒤에 사퇴하고 소설암으로 옮기다. 신돈(辛旽)이 투기하여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다가, 신돈이 죽은 뒤에 국사가 되었다. 우왕 8년 12월 24일 소설암에서 입적하니, 세수 82세. 법랍 69세 였다.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가 태고사에 있다.

태고보우(太古普愚) 

 

參禪錄

                         太古普愚國師(태고보우국사)(1301~1382)

 

日月似電光(일월사전광) : 세월이 번개 같으니

光陰良可惜(광음량가석) : 시간을 잘 아껴라

生死在呼吸(생사재호흡) : 죽고 사는 것이 숨 쉬는 데 있으니

難以保朝夕(난이보조석) : 아침에는 살아 있지만 저녁까지 살아 있을지

行住坐臥間(행주좌와간) :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동안

寸景莫虛擲(촌경막허척) : 한 순간도 헛되이 버리지 말라.

 

勇猛加勇猛(용맹가용맹) : 용맹에 용맹을 더하기

如我本師釋(여아본사석) : 우리 부처님 같이 하며

精進復精進(정진부정진) : 정진하고 또 정진하되

心地等惺寂(심지등성적) : 마음은 언제나 또렷하면서 고요히 하며

深信佛祖意(심신불조의) :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하신 뜻을

須要辨端的(수요변단적) : 깊이 믿고 분명히 판단하라.

 

心卽天眞佛(심즉천진불) :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거늘

何勞向外覓(하노향외멱) : 어찌 밖을 향해 찿으랴

放下萬事着(방하만사착) : 모든 일 다 놓아 버리기를

路窮如鐵壁(로궁여철벽) : 감옥에 갇힌 것 같이 하며

妄念都滅盡(망념도멸진) : 모든 생각을 다 끊어 버리고

盡處還抹却(진처환말각) : 끊었다는 생각마저 잊어 버려라.

 

身心如托空(신심여탁공) : 몸과 마음이 허공 같을 때

寂然光達爀(적연광달혁) : 고요한 광명이 빛나리라.

本來面目誰(본래면목수) : 내 본래 모습이 무엇인고?

纔擧箭沒石(재거전몰석) : 간절히 의심해 가면

疑團百雜碎(의단백잡쇄) : 의심덩이 문득 부서지고

一物盖天碧(일물개천벽) : 한 물건이 하늘땅을 덮으리라.

 

莫與無智設(막여무지설) : 이 경계를 모르는 이에게 말하지 말고

亦莫生悅懌(역막생열역) : 기뻐서 날뛰지도 말고

須訪見宗師(수방견종사) :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가

呈機復請益(정기부청익) : 얻은 바를 인가 받아야 한다.

然後名繼祖(연후명계조) : 그래야 비로소 조사의 법을 이었다 할 것이니

家風不偏僻(가풍불편벽) : 그러기 전에는 함부로 알았다고 하지 말라.

困來展脚眠(곤래전각면) : 이런 뒤에야 잠 오면 자고

飢來信口喫(기래신구끽) : 배고프면 먹고

人問是何宗(인문시하종) : 누가 법을 묻거든

棒喝如雨滴(봉갈여우적) : 사정없이 대하라.

 

 

太古普愚國師(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태고보우국사)禪詩(선시)

 

 

1. 개관

태고 보우(太古普愚)는 고려 말에 활동한 선종 승려이다. 공민왕(恭愍王)대에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봉해졌으며 보우를 필두로 하는 임제태고법통설(臨濟太古法統說)은 조선후기 주된 법맥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법통설도 이를 계승하고 있다.

 

2. 출생과 가계

대사의 법명은 보우(普愚), 법호는 태고(太古), 시호는 원증(圓證), 탑호는 보월승공탑(寶月昇空塔)이다. 보우와 생애와 관련된 기록은 이색(李穡)이 지은 북한산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문과 양평 사나사 비문, 문도 유창(維昌)이 쓴 태고행장(太古行狀)등이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보우는 1301(충렬왕 27) 9월 양근(楊根) 대원리에서 아버지 홍연과 어머니 정씨(鄭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보우의 어머니가 어느날 밤 태양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1301(충렬왕 27)에 대사를 낳았다.

원래 보우의 부계는 홍주(洪州) 홍씨(洪氏)로 그 시조인 홍규(洪規)가 고려 태조 때 벼슬이 삼중대광에 이르러 해풍부원군에 봉해짐에 따라 후손이 홍주에 세거하여 홍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보우의 홍씨 가문은 그가 태어난 고려말기에 이르러서도 지방 토호로서 세력을 유지하여 왔으나 뚜렷한 활약을 보인 인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1356(공민왕 5) 보우가 왕사로 책봉되면서 그의 아버지인 홍연(洪延)이 개부의동삼사·상주국·문하시중·판이병부사(開府儀同三司·上柱國·門下侍中·判吏兵部事)로 추증되고 본관인 홍주는 목()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보우의 가계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어머니 정씨의 고향인 양근(楊根)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정씨 집안도 양근의 토호였다. 보우로 인하여 어머니 역시 삼한국대부인으로 추증되었고 어머니의 고향인 익화현(益和縣)도 양근군으로 승격되었다.

 

3. 출가와 참선수행, 그리고 깨달음

보우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고 하는데 13세가 되던 해에 회암사(檜巖寺) 광지선사(廣智禪師)에게 출가하였다. 19살부터 조주(趙州)의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들어 참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보우는 1333(충숙왕 2)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 승당에서 지낼 때 아직도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면서 만법귀일의 화두를 들고 7일간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용맹정진 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날 밤 푸른 옷을 입은 두 동자가 나타났는데 동자 하나는 백비탕(白沸湯)이 담긴 병을 들고 다른 한 동자는 잔을 들어 백비탕을 받아 권하니, 보우가 이를 받아 마시고 홀연히 그 첫 번째 깨달음을 얻어 여덟 구의 게송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26세 때에는 승과(僧科)인 화엄선(華嚴選)에도 합격하였음을 볼 때 교학(敎學)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30세에는 열 두 가지 큰 서원을 가지고 용문산(龍門山) 상원사(上院寺)에서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였다. 그 열 두 가지 원이 무엇이었는지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그 뒤로는 칼같이 날카로운 지혜를 갖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어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보고 모든 알음알이가 사라지는 두 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37세가 되던 1337(충숙왕 복위 6)부터는 알음알이[知解]를 떠난 화두수행에 들어가서 조주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는데, 동안거에 들어가 그 이듬해 1월에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를 얻었으나 마지막까지 무자화두에 대한 의심은 깨뜨릴 수가 없었다.

38세가 되던 3월에는 자신의 속가가 있는 양근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며 지내면서 공안(公案) 일천 칠백 칙()으로 일컬어지는 온갖 화두를 점검하였다. 이 때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 화두에 막혀 있다가 결국 이를 타파하고 마지막 깨달음을 얻었는데, 행장에서는 이때의 깨달음을 20년 동안 고심했던 것이 끝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41세인 1341(충혜왕 복위 2) 봄에는 한양(漢陽)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 동쪽 봉우리에 암자를 지어 태고암(太古庵)이라 편액하고 5년 동안 머물면서 영가현각(永嘉玄覺)의 증도가(證道歌)와 같은 7언 및 6언 체제로 태고암가(太古庵歌)한 편을 지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보우가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을 수용하여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에 정진하고 깨달음을 얻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4. 입원구법 : 본분종사의 인가, 그리고 공민왕과의 만남

이 시기 고려의 승려들은 원나라에 유학하여 본분종사(本分宗師)들을 찾아가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받고 돌아오는 풍조가 있었다. 승려들에게 있어 원의 본분종사로부터의 인가는 고려 내에서 대단한 권위를 부여하였다. 보우 역시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에 이르고도 다시 임제선의 정맥을 찾아 자신의 깨달은 내용을 인가받아 돌아온다.

46세가 되던 1346(충목왕 2) 보우는 원나라에 들어가 약 2년간 유학하게 된다. 처음 원나라 연경(燕京)에 들어갔을 때 그 소문을 들은 원 황제의 명으로 당시 원나라 태자의 생일 법회에서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였다. 고려에서 온 승려 보우가 원 태자의 생일 축하 법회에서 강설한 것은 당시 원나라 태자가 고려 출신 기황후의 소생인 아이유시리다라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보우는 원나라 각지를 유력하다 축원(竺源) 영성선사(永盛禪師)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으나 영성선사가 이미 입적한 뒤여서 다시 절강성(浙江省) 하무산(霞霧山)으로 가 석옥(石屋) 청공선사(淸珙禪師) 를 친견한다. 이 때 보우가 청공선사에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하고 태고암가(太古庵歌)를 바쳤더니 청공선사가 크게 감탄하였다. 이에 보우는 임제의 18대 법손인 청공에게 그 깨달음을 인정받고 청공의 가사를 전수받았다. 보우가 청공에게 인가를 받고 연경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 그의 명성은 이미 자자하여 원의 황제로부터 또다시 설법을 요청받아 영녕사에서 법회를 주관하였다. 이 때 원 황제는 보우에게 금란가사와 침향목으로 만든 불자(拂子)를 하사하였고 태자 등 왕족들도 향과 폐백을 보내는 등 보우는 원 황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이 때 맺은 원 황실과의 관계는 귀국한 뒤에도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356(공민왕 5)에 봉은사(奉恩寺)에서 보우를 초청하여 법회를 개최했을 때 원 황실에서 오색비단과 가사 3백 벌을 보내왔다.

보우의 원나라 구법기의 행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 영녕사 법회 때 왕기(王祺)와의 만남이다. 왕기는 당시 고려에서 질자(質子)로 연경에 머무르던 훗날의 공민왕(공민왕)이다. 왕기는 보우에 대한 원 황실의 극진한 환대와 성대한 법회를 보고 감탄하여 보우에게, 자신이 훗날 고려로 돌아가 새로운 정치를 하게 된다면 스승으로 모시겠노라고 하였다 한다.

 

5. 왕사, 국사로의 책봉과 활동

보우는 48세가 되던 1348(충목왕 4)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용문산(龍門山)에 소설암(小雪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머물게 된다. 이 때 보우는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1편을 짓게 되는데, 여기서 원 천자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과 석옥 청공으로부터 법은 인가받고 온 것에 대하여 대단히 즐거워하고 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52세인 1352(공민왕 원년)에 이제 왕으로 즉위한 공민왕이 보우를 찾아 개경으로 오게 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56세인 1356(공민왕 5) 공민왕에 의해 왕사로 책봉되었다. 이 때 보우는 불교계의 제도를 정비하고자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선문구산을 한 종으로 통합하려 하였다.

62세가 되는 1362(공민왕 11) 가을에 양산사(陽山寺) 주지로 부임하고 63세에는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의 주지를 맡았다. 한편 이 때는 신돈(辛旽)의 정계에서 활동하던 시기라 보우는 공민왕에게 상소하여 신돈을 가까이 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뜻이 관철되지 못하자 신돈의 일로 왕사를 사임하였다. 68세가 되던 때 신돈에 의해 속리산에 금고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1371(공민왕 20)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한 뒤에 보우를 다시 국사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보우는 이를 사양하였다.

이후 우왕(禑王)이 왕위에 오르고 1378(우왕 4) 보우를 불렀을 때 비로소 국사로 취임하였다. 1381(우왕 7)에 보우는 우왕에 의해 거듭 국사로 책봉되고 그 이듬해인 1382(우왕 8)에 소설암에서 세수 82, 법랍 69세로 입적하였다.

이에 왕이 향목을 하사하여 화장하였는데 100과의 사리가 나왔다. 이를 나누어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보월승공탑을 세웠으며 이 외에 석종을 만들어 양주 태고사(太古寺), 가은 양산사(加恩 陽山寺), 양근 사나사(舍那寺)에 사리를 나누어 봉안하였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2권과 태고유음(太古遺音)6책 등이 있다.

 

6. 태고보우 법통설의 전개

여말선초 불교계를 주도했던 계파는 사실 나옹혜근(懶翁惠勤)과 그 문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혜근의 제자였던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는 지공화상(指空和尙)에서 나옹혜근을 이어 자신에 이르는 조파도(祖派圖)를 확정하고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로 간행하여, 이른바 고려말 삼화상의 계보를 완성하기도 하였다.

보우가 법통상의 조사(祖師)로 처음 부상한 때는 17세기 전반이다. 임진왜란 이후 계파의식이 강조도고 문파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사명 유정[사명대사](惟正(四溟大師))의 입적이 계기가 되어 이전 법맥의 계승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법통설이 제기되었다. 임제태고법통설은 석옥청공 태고보우 혼수(混修) 각운(覺雲) 정심(正心) 지엄(智嚴) 영관(靈觀) 휴정[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가지며 조선초 교단을 주도했던 무학자초 등 나옹계 주류들이 배제되었다. 임제태고법통설은 태고보우를 통해 전해진 중국 임제종 정통법맥이 휴정에게 이어졌고 조선불교는 그 임제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정체성을 표방하고 있으며, 나옹법맥에서 태고법통으로 전법 인식이 뒤바뀌게 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1764년에 나온 불조원류(佛祖源流)에서 잘 표방되고 있다.

보우가 석옥 청공에게 의발을 전수받고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하였다는 임제태고법통설은 조선후기 양대 계파인 청허계와 부휴계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면서 주된 법통으로 확립되어 오늘날 조계종의 정체성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태고보우(太古普愚)국사(1301~1382) 열반송(涅槃頌)

 

人生命若水泡空  : 삶이란 물거품과 같나니

八十餘年春夢中  : 팔십 평생이 일장춘몽이로다.

臨路如今放皮袋  : 이제 길을 떠나며 가죽 껍데기를 벗자니

一輪紅日下西峰  : 둥그런 붉은 해는 서산에 떨어지노라

 

사람의 생명은 물거품처럼 헛되어

팔십 여 년이 한바탕 봄꿈 속이었네.

임종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에서 석방되어

한 둘레 붉은 해처럼 서쪽 봉우리로 지리라.

 

사람 목숨이 물거품이니

80여년이 봄 꿈이라

죽음에 이르러 가죽포대 버리니

붉은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네.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충렬왕 27)~1382(우왕 8). 고려 말기 권문세족인 홍주홍씨(洪州洪氏) 출신으로, 아버지는 연()이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13세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지산파(迦智山派)에 속하는 회암사(檜巖寺)의 광지선사(廣智禪師)에게 출가했다.

19세 때에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話頭)를 참구했으며, 화엄학에 정진해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했다. 그러나 경전 공부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선()의 수행으로 돌아가 정진하기 위해,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 들어갔다가 감로사(甘露寺)에서 고행했다.

1337(충숙왕 복위 6) 송도 전단원(栴檀園)에서 참선하여 이듬해 정월 크게 깨달았다. 그 뒤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 있다가 1341(충혜왕 복위 2) 중흥사 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짓고 그곳에 머물면서 태고암가를 지었다.

1346년 중국의 선승에게 인가를 받으러 원()에 건너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았다. 원에 가서 2년간 머물렀는데, 원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에게 반야경을 강설할 정도로 환대를 받았다.

1348년 귀국 후 광주(廣州) 미원장(迷元莊)에 우거하면서 친척을 모아 일가를 이루고 공민왕에게 요구하여 현()으로 승격시키고 감무(監務)를 설치하게 했다.

1356(공민왕 5) 왕사(王師)로 책봉된 뒤 조정에 별정직 기관인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승직의 임명권을 장악했는데, 이는 종래의 교단운영 원칙이 무너졌음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고려의 전통적인 오교양종(五敎兩宗)의 교단체제도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그는 구산선문의 통합을 건의했으며, 수도를 남경(南京漢陽)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신돈과의 권력다툼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돈이 집권하자 보우는 사승(邪僧)으로 지목받고 속리산에 금고 당했다.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國師)로 봉한 뒤 영원사(營原寺)에 머물기를 청했으나 병을 핑계삼아 사양했다.

1381(우왕 7) 양산사(陽山寺)로 옮겼는데 이때 우왕이 다시 국사로 봉했다. 1382년 소설사(小雪寺)로 돌아와 죽었다.

 

* 太古普愚國師(태고보우국사)禪詩(선시)

   

 

우리나라(東國祖師) 佛祖正脈

57조 태고 보우(太古普愚)

58조 환암 혼수(幻庵混修)

59조 구곡 각운(龜谷覺雲)

60조 벽계 정심(碧溪淨心)

61조 벽송 지엄(碧松智嚴)

62조 부용 영관(芙蓉靈觀)

63조 청허 휴정(淸虛休靜)

64조 편앙 언기(鞭羊彦機)

65조 풍담 의심(楓潭義諶)

66조 월담 설제(月潭雪霽)

67조 환성 지안(喚惺志安)

68조 호암 체정(虎巖體淨)

69조 청봉 거안(靑峰巨岸)

70조 율봉 청고(栗峰靑杲)

71조 금허 법첨(錦虛法沾)

72조 용암 혜언(龍岩慧彦)

73조 영월 봉율(永月奉律)

74조 만화 보선(萬化普善)

75조 경허 성우(鏡虛惺牛)

 

만공전강계

76 1 만공 월면 (滿空月面) (1871~1946)

77 2 전강 영신 (田岡永信) (1898~1975)

78 3 송담 정은 (松潭正隱) (1927~)

 

만공혜암계

761 만공 월면 (滿空月面) (1871~1946)

772 혜암 현문 (惠菴玄門) (1886~1985)

783 묘봉 인공 (妙峰印空) (1943~2022 )

794 원제 혜충 (圓濟惠忠) (1951~ )

805 정명 대적 (淨名大寂) (1974~ )

 

경허혜월계

75조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

76 1혜월 혜명 (慧月慧明) (1862~1937)

77 2운봉 성수 (雲峰性粹) (18891946)

78 3향곡 혜림 (香谷蕙林) (19121978)

79 4진제 법원 (眞際法遠) (1934~ )

  

경허만공전강송담

경허만공혜암묘봉원제정명

경허혜월운봉→향곡→진제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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