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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 62조 부용 영관(芙蓉靈觀)

by 산산바다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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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 영관(芙蓉靈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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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2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부용 선사는 조선 성종 16(1485)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영관(靈觀), 법자는 은암(隱庵), 법호는 연선(蓮船), 당호는 부용당(芙蓉堂)이다.

8살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낚시를 갔는데, 선사는 망태 속의 물고기를 모두 놓아주었다.

아버지께서 크게 화를 내자 선사는 엎드려 울면서 말했다.

"사람이나 물고기나 목숨의 귀중함은 같고 아픔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그렇게 했습니다.“

또 하루는 괴이하게 생긴 한 스님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불가(佛家)에서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요. 세속에서는 살 인물이 아니니 출가를 시키십시오." 하며 사라졌다.

 

선사의 어린 시절 돌을 세워 부처라 하였고 혹은 모레를 올려 공양하였고 혹은 소나무를 드리워 암자를 만들었다.

눈을 감고 위엄있게 앉아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 것도 몰랐다.

날로 세상의 법은 싫어하고 깊이 공문(불문)을 생각하였다.

나이 13세에 이르러 정사(1497)년 가을 밤은 깊고 사람들은 잠들어 고요할 때 몸을 빼어 문을 나오니 마치 사람이 인도하여 가는 듯 십여리를 행하였다.

사천을 건널 때 바로 선사께서 기르던 개 한 마리가 따라왔다.

돌아보며 개에게 일러 가로되

"존당을 잘 지켜드리고 나를 따라오지 마라. 나는 지금 영원히 운수인이 되려한다. 맹세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너는 속히 돌아가 진중하여라." 하니,

개가 머리를 꺼덕거리며 그 말을 알아듣는 듯 마치 석별의 모습을 보이는 듯 몇 번을 컹컹거리더니 돌아갔다.

이에 홀가분한 외로운 그림자가 되어 강을 사이에 두고 돌아 본 즉 달이 바로 서쪽 봉우리에 넘어가고 있었다.

선사는 발길을 재촉하여 수일 만에 덕이산(德異山, 지금의 덕유산)으로 들어가 홀로 토굴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고행 선사를 찾아 가르침을 받은 지 3년 만에 승려가 되었다.

17세 되던 해 신총법사를 찾아 교학을 탐구했으며, 다시 위봉선사 회상에서 선의 요체를 참구했다.

그 뒤 선사는 덕유산 구천동으로 들어가 손수 토굴을 지었으며, 선당의 이름도 부용당(芙蓉堂, 몸은 비록 이 세상에 머물지만 생각은 늘 서방정토에 있으므로 그것을 상징하는 연꽃을 의미)이라 지었다.

9년 동안 두문불출한 채 용맹 정진하였으며, 일체 눕지 않는 장좌불와를 참행(參行) 하였으며 와불선(臥不禪)을 확립하였다.

9년의 장좌불와를 마치고는 다시 미륵봉 내원암으로 들어가 출입을 끊고 9년 동안 묵언불와(默言不臥)로 생사불수행(生死不修行)을 하였다.

 

1530(중종 25) 지리산에 들어가 벽송 지엄(碧松 智嚴)을 만나 비로소 불법을 크게 깨달아 20년 동안 가졌던 의심을 풀었다.

이로부터 태고 보우(太古普愚)의 법통을 계승하여 청허 휴정(淸虛休靜, 西山)에게 법을 전하게 되어 우리나라 불교계의 정통을 이룩했다.

3년 동안 지엄을 모시고는 이후 40여 년 동안 여러 곳을 두루 다니다가 1571(선조4) 414일 나이 87, 법랍 73년에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휴정(서산대사)을 비롯하여 부휴 선수(浮休 善修), 법융(法融), 영응(靈應), 정원(淨源), 신옹(信翁), 진기(眞機) 등 많은 사람들이 있다.

 

참 성품에는 성품이라는 것도 없으며

참법에는 본래 법이라는 것이 없으니

법성이 없음을 요달해 알면

어느 곳인들 통달치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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