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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 64조 편양 언기(鞭羊彦機)

by 산산바다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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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양 언기(鞭羊彦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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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4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장씨. 법호는 편양(鞭羊). 경기도 안성군 죽산(竹山) 출신.

어머니는 이씨이다. 어머니가 이상한 태몽을 꾸고 낳았으며 11세에 출가하여 휴정(休靜)의 제자인 현빈(玄賓)에게 계()를 받았다.

그 뒤 금강산에 머물면서 교학(敎學)을 익히는 한편, 참선을 닦았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묘향산 서산대사의 밑에서 선을 닦았고 이후 서산대사의 법()을 받은 적사 (嫡嗣)가 되었다.

그 뒤 어느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남쪽으로 편력하면서 고승들을 찾아 깨달음을 점검받았다.

'양을 기른다.'는 뜻을 지닌 그의 당호 편양이 가리키듯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자주 시정(市井)에 나왔다.

그의 시문(詩文)이나 선교(禪敎)에 대한 법문은 매우 간결하고 쉬운 것이 특징이다.

평소에도 심산유곡에 은거하여 수도하면서 혼자만의 법열(法悅)에 잠기는 것은 결코 불교의 진면목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깨달음을 얻는 것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뜻은 그의 행적에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특히 숯장수와 물장수를 하였기 때문에 평양 인근의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교와 선을 두개의 별문(別門)으로 보지 않는 서산대사의 경향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안에서도 일승(一乘이승(二乘삼승(三乘) 등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불경은 청중의 근기(根機)에 따라 설한 것이므로 처음부터 대승(大乘)과 소승(小乘) 심천(深淺)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종의 교판(敎判)을 내세웠는데, 화엄(華嚴)은 인연이 무르익은 보살인 상근기(上根機)를 위하여 단번에 보리(菩提)를 이룰 수 있음을 설한 것이고, 아함(阿含)은 성문(聲聞)을 위한 사제(四諦)와 연각(緣覺)을 위한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설한 것이며 방등(方等)은 보살을 위하여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설한 것이고, 법화(法華)는 앞의 삼승을 위하여 구경(究竟)의 대도(大道)를 설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상의 4가지 교의 근본원리가 곧 묘심(妙心)이라고 하였다.

 

또 선과 교의 관계에 대하여

"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서 단적으로 불심을 전한 것이지만 이것은 최상의 근기를 가진 사람만이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최상승(最上乘)이다.

그러나 세간에는 대근기의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선문(禪門)도 임시로 교를 빌려서 이로(理路: 이치의 길)와 어로(語路)를 만들어 하근기(下根機)사람을 포섭한다.

그러므로 교는 즉 하근기 사람이 입선(入禪)하는 문호(門戶)이다.“라고 주장하였다.

 

, 선을 의리선(義理禪조사선(祖師禪격외선(格外禪)의 삼선(三禪)으로 구별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수행자의 근기로 말미암은 주관적 차별이지 결코 객관적으로 선을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밖에도 그의 사상은 대략 7가지로 요약된다.

(1) 경절문(徑截門)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하는 교외별전이라는 것을 대전제로 삼았다.

(2) 이 경절문 이외의 모든 경전은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한 것이라고 보았다.

(3) 비록 설한 내용이 다양하다고는 할지라도 결국 모든 교설은 일법(一法)으로 귀일(歸一)한다.

(4) 이 일법은 곧 중생들의 천진한 자성(自性)이며, 이것이 곧 부처라는 것이다.

(5) 모든 경론(經論)은 결국 이 자성을 밝히는 것이지만, 분별심이나 차별심을 일으키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

(6) 이 자성을 깨닫는 실천방법으로는 경절문과 원돈문(圓頓門)과 염불문(念佛門)이 있는데 경절문은 공안(公案)을 통해서, 원돈문은 자성의 관조(觀照)를 통해서 그리고 염불문은 염불을 통해서 공부한다는 것이다.

(7) 이 셋은 비록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자성을 온전히 밝히려는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으며 그 어느 문을 통하여 자성을 밝히더라도 결과적인 경지(境地)는 차별이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그의 행적은 많은 무리를 불러 모으게 하였으며, 대중과 함께 사는 보살행(菩薩行)과 도력(道力)으로 인하여 문하에는 많은 걸승들이 배출되어 서산대사 문하의 사대파(四大派)의 하나인 편양파(鞭羊派)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묘향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입적할 때까지 제자가 수백에 달하였다.

저서로는 <편양당집> 2권을 남겼는데 그 상권에 실린 <선교원류심검설(禪敎源流尋劍說)>은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장이다

 

선사가 평양성에서 지낼 때, 모란봉 기슭에 움막을 치고 살면서 임진왜란으로 집과 부모를 잃은 삼백 여명의 거지 떼를 보살피는 거지 왕초가 되었으며, 때로는 걸식하고 때로는 숯장수와 물장수를 하였기 때문에 평양 인근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뭣고화두를 놓치지 않고 되뇌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이를 이먹고로 알아들어서 이먹고 노장이라고 불렸다. (출처: ‘양치는 성자’-백운스님)

 

평양성 백성들이 이 거지 중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아무리 박대를 해도 떠나지 않으니 평안감사에게 밖으로 쫓아내 줄 것을 청하였다.

평안감사가 쫓아낼 구실을 찾으려고 스님을 불렀다.

그대가 글을 좀 아는가?”

잘 알지는 못하고 조금은 압니다.”

내가 운자(韻字)를 띄우면 시를 지어보게. 짓는다면 이 성안에 머물러 있어도 되지만, 시를 못 지으면 성 밖으로 쫓아낼 것이다.” 

그러면 말씀을 하십시오.”

평안감사가 아주 어려운 글자로 가재 오() 자를 운자로 띄웠다. 편양 선사가 즉시 시를 짓기를

마엽유감기릉조(麻葉猶甘豈凌糟)

부귀공명여퇴(富貴功名如退)

삼 잎도 오히려 달거늘 어찌 지게미를 마다하리.

부귀공명은 가재처럼 뒷걸음질 하노라.

 

평안감사가 마지막 결구에 다시 다리미 오()자를 운자로 내놓았다.

 

현순백결과백세(懸鶉百結過百世)

청천세탁불용(淸川洗濯不用)

해어져 누덕누덕 기운 옷으로 백 년을 지내니

청천강에 빨아서 입을 뿐 다리미는 쓰지 않노라

 

어려운 운자로 멋진 시를 짓자 평안감사가 감탄하며

그대는 혹시 호가 어떻게 되시오?”

저는 본래 이름이라 할 것이 없지만 세상 사람에게 소개할 때는 편양이라거나 언기라고 하지요.”

아하! 서산대사 아래 전법 제자로 편양 언기라는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스님이시군요.”

그런 후 평안감사가 백성들에게 당부하길

평양성에 재앙과 난이 없이 평화롭게 잘 지내는 것이 바로 이 큰스님의 도덕으로 인해 덕을 보는 것이니 이분을 잘 모셔야 합니다.”

이에 사람들이 옷과 음식 등을 갖추어 선사를 찾아갔으나 떠나고 흔적이 없었다.

 

<편양 언기 >

雲走天無動(운주천무동) : 구름 가나 하늘은 움직임 없고

舟行岸不移(주행안불이) : 배 가도 언덕은 옮겨가지 않네

本是無一物(본시무일물) :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기쁨과

何處起歡悲(하처기환비) : 슬픔은 어느 곳에서 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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