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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 61조 벽송 지엄(碧松智嚴)

by 산산바다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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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 지엄(碧松智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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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1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스님의 법명은 지엄(智嚴), 법호는 야로, 당호는 벽송속성은 송씨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복생(福生)이고 어머니는 왕씨이며 전북 부안 사람이다.

어머니가 꿈에 인도 스님이 예를 올리고 자고간 뒤 잉태, 조선 세조 10(1464) 315일 벽송을 낳는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글공부와 무예를 좋아하여 무과에 뽑혔다.

1491년 여진족(女眞族)이 침입하자 도원수 허종(都元帥 許琮)의 휘하에서 장수로 출전(出戰)하여 공()을 세웠다.

28세 때 계룡산(鷄龍山)의 조계 대사(祖溪 大師)를 찾아가 출가(出家)하였다.

중종 3(1508)에는 금강산 묘길상암으로 들어가 정진했으며, 중종15(1520) 3월엔 지리산으로 들어가 초암에 머물며 정진을 거듭했다황악산 직지사의 벽계 정심선사에게서 활연대오(豁然大悟) 하였다.

벽송지엄스님께서 스승을 찾아다니시다가 벽계 정심선사의 소문을 듣고 물한리로 찾아갔다.

선사의 외모는 빛나는 눈빛을 제외하고는 생에 찌든 촌로에 불과 했다.

벽송지엄스님이 찾아간 뜻을 밝히자

"나는 도를 갖고 있지 않네. 보다시피 먹고 살기에 바빠. 자네가 거처할 방도 없고." 선사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벽송지엄스님은 그날부터 토굴 하나를 따로 짓고 벽계정심과 같이 싸리 광주리를 만들고 나무를 해다 장에 내다 팔면서 생활했다.

기회만 있으면, "부처는 누구냐?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어냐? 도가 무어냐? 스님이 깨달은 내용이 어떤 것이냐?“

쉼 없이 가르침을 간청했지만 그때마다, "나무한 뒤에 가르쳐 주겠다. 집에 가서 가르쳐 주겠다.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 가르쳐 주겠다."며 미룬 것이 삼년이 지났다.

어느 날 정심선사가 나무하러 간 사이, 벽송지엄이 여보살에게 떠날 뜻을 밝혔다.

"별안간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스님을 찾아 올 때는 도를 배우러 온 것이지 고용살이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삼 년이 지나도록 도를 가르쳐 주지 않으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도 스님이 오시면 떠나세요." 여보살이 만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벽계정심선사가 나무를 해서 돌아왔다.

"지엄스님이 도인지 무언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화가 나서 떠났습니다.“

"무식한 놈, 내가 왜 안 가르쳐 주었나. 자신이 그 도리를 몰랐지. 자고 나서 인사 할 때도 가르쳐 주었고, 산에 가서 나무할 때도 싸리 광주리를 만들 때도 가르쳐 주었지. 이 밖에 특별히 따로 도가 있나? 있다면 그건 도가 아니고 번뇌지.“

벽계정심선사는 집 앞 언덕에 가서 막 계곡을 빠져 나가려는 벽송지엄을 불렀다.

", 이놈 지엄아!“

벽송지엄이 벅계정심선사의 고함소리에 돌아보았다.

선사는 주먹을 불숙 내밀며 다시 고함쳤다.

"! 내 법 받아라!" 이 순간 지엄은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확철 대오한 후 벽송은 71세 되던 1534년 겨울 지리산 수국암에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법화경>을 강론하면서 말했다.

"이제 내가 너희들에게 적멸상(寂滅相)을 보여 줄 터이니, 마음 밖에서 참 도()를 찾지 말라. 참 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시자를 시켜 차()를 따르게 하여 한 잔을 마시고는 결가부좌 한 채 열반에 들었다.

하늘에는 상서로운 오색구름이 가득하고, 선사의 몸에서는 오색의 빛이 나와 일주일 동안이나 발광하였다.

이후 대사의 다비를 모실 때 상광(祥光)이 하늘에 뻗치고, 사리(舍利)가 무수히 나왔다고 한다.

읊은 노래와 게송 50수가 세상에 전해진다세속나이 71, 법랍 44세로 세연(世緣)을 마쳤다.

 

示眞一禪子(시진일선자)

 

花笑陛前雨(화소폐전우) : 꽃들의 웃음 섬돌 앞에 비처럼 내리고

松鳴檻外風(송명함외풍) : 난간 밖에선 솔바람 소리 요란하네.

何須窮妙旨(하수궁묘지) : 어찌 그리도 오묘한 뜻 찾아 헤매는가?

這箇是圓通(저개시원통) : 낱낱의 이것들이 모두 깨달음인 것을

 

 

조사와 조사가 법을 부촉한 일이 없거니

사람마다 본래부터 스스로 있음이니라

너는 부촉할 것 없는 법을 받아

급히 부딪쳐 저 뒷사람에게 전하도록 하라

 

벽송사(碧松寺)는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벽송 지엄(碧松智嚴)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에서 보면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회암정혜, 경암용윤, 서룡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겸수한 대 종장들을 109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으로 불린다.

 

벽송지엄 선사는 무자화두(無字話頭)에 의해 무명(無明)을 타파하고 선요(禪要)에 의해 지혜의 병을 떨쳐버렸으니, 간화선 수행법(看話正宗)에 의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되었다.

 

그래서 벽송사는 간화선의 제일 조정(朝庭)으로서의 역사를 간직한 한국선불교의 근본도량'이 되는 것이다.

 

벽송대사의 뒤를 이어 벽송산문의 제2대 조사에 오른 분이 부영영관(芙蓉靈觀)선사이다.

부용영관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靑虛休靜)과 부휴선수(浮休善修)이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산문의 제3대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 하게 된다.

서산대사 문하에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 병송사에서 오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부용영관의 다른 한 사람의 수법제자인 부휴선수선사 또한 벽송사에서 도를 깨닫고 벽송산문의 조사가 되어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행화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 출가스님의 모두가 서산문파와 부휴문파에 속한다.

서산과 부휴 양대조사가 모두 벽송사 출신이라는 사실은 벽송사가 조선불교의 종가(宗家)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벽송사를 가리켜서 "조계조정(曹溪朝庭), 벽송총림(碧松叢林), 선교겸수(禪敎兼修), 간화도량(看話道場)" 이라고 불렀다.

 

1704(숙종30)에 환성지안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 때에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동의 전각이 즐비하였으며, 상주하는 스님이 300여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10여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이로부터 금대암에 선원이 개설되어 수선납자가 운집하고, 벽송사 본당에는 강원이 개설되어 근세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었으니, 300년 동안 조선불교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이로부터 선교를 겸한 대종장들이 벽송사에 수선안거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게 되니, 강당을 거쳐 간 강주(講主)스님 만도 약 100인이나 되니 학인과 납자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근대에 선지식이신 경허선사도 벽송사에 주설하며 서룡선사 행적기록을 집필하였다.

일제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불교 최고의 조정인 벽송사의 사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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