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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58조 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

by 산산바다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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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8 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

 

 

혼수(混修)1320년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에서 출생하였다. ()혼수(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이다. 본성은 조씨(趙氏)로서 경기도 광주(廣州풍양현(豊壤縣)이 그 본관이다아버지의 휘는 숙령(叔鴒)으로 헌부(憲府, 사헌부의 줄임말)의 산랑(散郞)이요, 어머니는 경씨(慶氏)로서 본관이 청주(淸州)이니, 모두 사족(士族)이다.

 

 

오도송(悟道頌)

三十年來不入塵 : 30년 동안 속세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水邊林下養情眞 : 물가와 수풀 밑에서 참된 성정(性情)을 길렀는데,

誰將擾擾人間事 : 누가 시끄러운 인간사를 가지고

係縛逍遙自在身 : 자유자재 소요하는 이 몸을 묶으려 하는고.

 

任運騰騰度一生 : 임운자재로 등등하게 일생을 보내었는데

病中消息更惺惺 : 병중의 소식 까지도 더욱더 성성하구나.

無人識得吾歸處 : 나의 돌아갈 곳 알 사람이 없지마는

窓外白雲橫翠屛 : 창 밖에 흰 구름은 푸른 병풍에 걸려있구나.

 

 

1341년 고려 충혜왕 2년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혼수는 계송(繼松) 대선사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전적을 배웠는데 총명이 남달라 스승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341년 고려 충혜왕 2년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1348년 이웃사람이 급하한 것을 보고 더욱 정진해야 함을 느끼고 금강산(金剛山)에 입산한다.

1350년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경산(京山)에 주석한다. 5-6년 후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대자법화경(大字法華經)을 베껴 써 어머니의 명복을 빈다.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머물고 있는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찾아가 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당시 재상 조쌍중(趙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 능엄경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다.

3년 동안 머물다가 충주(忠州청룡사(靑龍寺)로 갔다청룡사 서쪽 산기슭에 집터를 고쳐 짓고 연회암(宴晦菴)이란 편액을 걸었다.

공민왕 회암사(檜巖寺주지를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금오산을 거쳐 오대산의 신성암으로 거처하였다오대산에 머물고 있던 나옹 혜근화상(惠勤和尙)을 찾아가 자주 도()의 요지 질의하니나옹은 뒤에 금란가사(金襴袈裟)상아불(象牙拂)산형장(山形杖) 3가지 신물을 주었다.

1361년에 강릉도(江陵道) 안렴사(按廉使)가 혼수를 천거하였으나, 상경 도중에 은둔하여 정진한다. 1369년에 백성군(白城郡) 사람 김황(金璜)이 원찰(願刹) 서운사(瑞雲寺)에 혼수를 초빙하였다.

1370년 공민왕이 나옹화상에게 명하여 회암사에서 공부선(功夫選)을 개최할 때 참여하여 유일하게 인증을 받았다.

 

1372년에 왕명으로 불호사(佛護寺주지로 나아갔고 이듬해 내불당의 주지에 임명되어 있었으나 몰래 도망가 평해의 서산에서 은둔하였다. 결국 13741월에 응하였다.

1375년 가을부터 13763월까지 송광사(松廣社주지를 하였다. 서운사로 돌아왔다가 1378년 치악산을 거쳐 다시 연회암에 머물렀는데 얼마 후 광암사(光巖寺주지를 3년간 하였다. 그후 주지를 사양하고 원주 백운암(白雲菴)을 거쳐 용문, 평해, 치악산 등의 명산을 돌아다녔다.

13834월에 연회암에서 국사로 책봉받고 충주 개천사를 하산소로 삼았다. 그해 가을 서운사로 석하였는데 왕이 개성으로 불러들여 광암사(光巖寺주지로 임명되었다.

1385년 가을 광암사에서 능엄경 법회를 열었다. 1386년에 우왕의 어머니인 대비 안씨가 공민왕을 극락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능엄법회인 불정회를 보국사(輔國寺)에서 개최하였다.

13878월에 수창궁(壽昌宮)에서 소재석(消災席, 재앙의 소멸을 비는 자리)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돌아갈 때에는 이직(李稷)을 딸려보내 존경을 표하였다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개천사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1389년 곧 뒤이어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국사직을 거절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으나 몇 달 안 되어 다시 국사로 책봉되었다.

1391년 가을에 이성계와 대장경을 발간하여 서운사(瑞雲寺)에 안치하고 회양법회를 열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성계에게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다.

입적

1392918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춘추가 73세에 하랍(夏臘)60세였다.

 

문인 소안(紹安)이 유서를 받들어 알리니태조 이성계가 애도하는 심정에서, 시호는 보각(普覺), 탑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1393년에 그의 문인들이 부도 곁에 비()를 세우고자 그의 제자 만우(卍雨)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찬()하게 하고소안(紹安)이 이를 받들어 태조에게 알리니태조는 권근(權近)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1394년에 충주 청룡사에 탑비가 세워졌다.

 

 

幻庵國師傳-東師列傳

師名混修 字無作 號幻庵 姓趙氏 廣州豊陽人也元仁宗延祐七年

高麗忠肅王七年庚申生 麗恭愍王 請懶翁爲主盟 設工夫選於檜巖寺 上率諸宮兩府文武百僚 親幸臨觀 禪講諸德 江湖衲子急皆集會金佛堂中 排設法座師拈香罷 陞座垂問 在會大衆 以次入對 皆曰未會 或理通而礙於事 或狂甚而失於言 一句便退 上若有不預色 然幻庵修禪 師後至 師歷問三句三開 一一應對

明太祖洪武二十五年 我太祖元年壬申入寂 贈諡曰普覺 玄陵請留 辭歸 賜號曰國師正徧智智雄尊者 門兄弟三十三人內 出家弟子二十五 在家弟子 柒原府院君尹桓 領三司事李仁任 判門下崔瑩 門下侍中林堅味 守門下侍中李成林 我太祖大王 鐵城府院君李琳 三司左使廉興邦等八公

 

국사의 이름은 혼수(混修), 자는 무작, 호는 환암이며 속성은 씨이다. 광주의 풍양사람이다. 원나라 인종 연우 7년 고려 충숙왕 7년 경신년(1320)에 출생하였다.

 

고려 공민왕이 나옹에게 회암사에 공부선을 설치하여 주맹이 되어주기를 청하였는데 상감이 제궁과 양부 문무백관 관료를 거느리고 친히 가서 직접 보는 앞에 선사 강사 제덕의 강호납자들이 급히 금불당 가운데 모두 모였는데 법좌를 배설하였다. 나옹화상이 향을 싸루고는 끄고 자리에 올라 물음을 드리우니 모인 대중들이 차례로 들어가 대답하는데 모두가 알지를 못하였다. 혹자는 이()는 통했어나 사()에 막혔고 혹은 허황됨이 심하여 말을 잃기도 하였다. 상감이 불예[]의 색이 있는 것 같아 한마디하고는 곧 물러나려고 하는데 환암 혼수선사가 늦게 이르렀다 나옹화상이 삼수삼개를 역문하니 낱낱이 응대하였다.

 

명 태조 홍무 25년 아 태조 원년 임신(1392)년에 입적하니 시호를 보각이라 추증하였다. 현릉께서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사임하고 물러났다. 사호를 국사 정변지 지웅존자라 하였다. 문도의 형제는 33인이며 출가제자는 25인이며 재가제자로는 칠원부원군 윤환, 영삼사사 이인임, 판문하 최영, 문하시중 임견미, 수문하시중 이성림, 아 태조대왕, 철성부원군이림, 삼사좌사겸 응방등 8공이었다

 

 

慵齋叢話(成俔)

釋混修號幻庵 早喪厥考 年甫十三 隨叔鴒 獵于郊 有一鹿前走 若有顧待者 俄而一鹿兒追至 因感慨曰 獸之念兒與人何別 卽念考休獵 祝髮爲釋習竺墳 名聲藉甚儕流 莫敢拚而倫之

徃金剛山 食木衣麻 脇不霑席 若將終身 焉念慈母倚門之望 遂還作偈云 寄語巖前松柏樹 重來與而終千年 後師事息影庵 習楞伽經重皆粗得其皮 師獨深味骨髓  玄陵建道場 於光明寺 以懶翁主之一時衲子 無有升堂者 上有不豫色 薄暮將罷場 師後至 上喜甚迓之 師立門外 懶翁問如何是當門句 師曰不落左右中 中而立問如何是入門句 師卽入門曰 入已還同未入時 問如何是門內句 曰內外本空中云何入 問山何嶽邊止 曰峰高卽下 遇下卽止 問水何到成渠 曰大海潛流到處成渠  問飯何白米造 曰如蒸沙石 豈成嘉餐深肯之 辛禑遂以爲國師 師聞之不燡然作偈 云 三十年來不入塵 水邊林下養情眞 誰將擾擾人間事 係縛逍遙自在身 一日在靑龍寺 有疾喚門人 囑後事曰 吾行在晩倚墻作偈曰 任運騰騰度一生 病中消息更惺惺 無人識得吾歸處 窓外白雲橫翠屛 儼然而逝 師嘗請尹評 畵山水十二輻 又請尹紹宗作詩 紹宗擧目而覩走筆成之紹宗出 師請門人曰 此詩雖好難上於屛不如激牧老耳 遂激牧隱到房 張屛坐其中良久沉吟先書題目曰 此黃鶴樓也 此騰王閣也 一一名之 然後搦筆成詩 詩思入神 遂手書屛上而去 師曰此眞老手也 嘗寶玩之 後爲廣平府院君李仁任所得 余少時至儒生歌謠廳 見此畵筆蹤踈宕而遒勁 卽牧隱手筆也

 

혼수스님의 법호는 환암(幻庵)이며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 겨우 13살에 숙부 영()을 따라 교외에 사냥을 나갔다. 사슴 한 마리가 앞을 달리다가 돌아다보며 무엇을 기다리는 듯하였다. 갑자기 새끼사슴 한 마리가 쫓아 와 이르니, 이로 인하여 감개무량하여 이르기를 짐승이 그 새끼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과 다른 게 무엇인가.” 하고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고 사냥을 그만두고 머리 깎고 중이 되어 불경을 배우니, 명성이 자심하여 같은 무리들이 감이 그를 능가하지 못했다.

 

금강산에 들어가서 나무 열매를 먹고 베옷을 입고 옆구리를 자리에 붙이지 않고[누워서 자지않다.] 종신할 것 같더니, 그러나 자모(慈母)께서 문에 기대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을 생각하여 마침내 게()를 지어 이르기를 바위 앞의 송백(松柏)에게 말을 하노니, 다시 와서 너와 더불어 일생을 다하리라.” 하였다. 그 뒤 식영암(息影庵)에게 사사하여 능가경을 거듭 배웠는데, 모두가 거칠은 그 거죽만을 얻었으나 스님만이 유독 깊은 골수를 맛보았다.

 

현릉(玄陵 공민왕)께서 도량(道場)을 광명사에 세우고 나옹으로 주관하게 하니 당시의 스님들로서 당에 오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임금이 불예(不豫 질병의 일종)의 빛이 있어서 저물녘에 파장하려고 할 때, 스님께서 뒤늦게 도착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맞아들였다.

 

스님이 문 밖에 서 있기에 나옹이 어떤 것이 문에 해당하는 구(當門句)인고.”하고 물으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우에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 섰노라.” 했다.

 

나옹이 어떤 것이 문안에 들어서는 구(入門句)인고.”하니,

스님이 문안으로 들어서며 답하기를 이미 들어 왔지만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도다.”하였다.

묻기를 어떤 것이 문안의 구(門內句)인고?” 하니,

대답하기를 안팎이 본래 허공중이거늘 어찌 섰다 하리오.”하였다.

 

묻기를 산이 어찌하여 봉우리의 기슭에서 끝나느뇨?”하니

대답하기를 높은 것을 만나면 곧 낮아지고 낮은 것을 만나면 곧 끝나리라.” 하였다.

 

묻기를 물이 어찌하여 개천을 이룩하였느뇨?”하니

대답하기를 큰 바다가 스며 흘러들어 도처에 개천을 이루었느니라.” 하였다.

 

묻기를 밥은 어찌하여 흰 쌀로 만드느뇨?” 하니

답하기를 모래나 돌을 찔 것 같으면 어찌 좋은 밥이 되리오.”하니, 그렇게 여겼다.

신우(우왕)가 드디어 국사로 삼았으나 스님은 이 소문을 듣고 기뻐하지 않고 게()를 지어 이르기를

 

“30년 동안 속세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물가와 수풀 밑에서 참된 성정(性情)을 길렀는데, 누가 시끄러운 인간사를 가지고 자유 자재이 소요하는 몸을 묶으려 하는고.” 하였다

 

하루는 청룡사(靑龍寺)에서 병이 들어 문인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기를 나의 인생행로는 마지막이요 담장에 기댄 것이로다.”하고 게를 지어 이르기를

 

임운자재로 등등하게 일생을 보내었고 병중의 소식 더욱더 성성하구나.

나의 돌아갈 곳 알 사람이 없으니 창 밖에 흰 구름이 푸른 병풍에 비꼈도다.

엄숙히 서거하였다.

 

스님이 일찍 윤평(尹評)에게 청하여 산수화 12폭을 그리게 하고, 또 윤소종(尹紹宗)에게 청하여 시를 짓게 하니, 윤소종은 눈을 들어 그림을 바라보고 붓을 휘둘러 시를 지었다. 윤소종이 나가므로 스승이 문인을 청하여 말하기를 이 시가 좋으나 병풍에는 올리기 어려우니, 목로(牧老 이색)를 맞아 온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드디어 목은(이색)을 맞아오니 목은이 방에 와서 병풍을 펴고 그 속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가 먼저 제목 쓰기를, “이것은 황학루(黃鶴樓), 이것은 등왕각(滕王閣)이다.”하며 하나하나 이름을 붙인 뒤에 붓을 들어 시를 지으니, (詩思)가 신의 경지였다. 드디어 손수 병풍에 쓰고 가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것이야 말로 진정 노련한 솜씨로다.”하고 보물로 여겨 완상(玩賞)하였는데 뒤에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李仁任)의 소유가 되었다. 내가 젊었을 때 유생 가요청(歌謠廳)에 이르러 이 그림과 글을 보니 필적이 소탈하고 굳세었는데 바로 목은의 친필[手筆]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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