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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중국조사(中國祖師) 法脈 系譜

제 32조 황매 홍인(黃梅弘忍)

by 산산바다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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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2 황매 홍인(黃梅弘忍) (651~674)

 

 

홍인의 속성은 주 씨다. 본래 여남에 살다가 기주의 황매로 옮겼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광채가 하늘로 뻗어 올랐고 향기가 났으며 몸과 맘이 평안하였다. 아이가 태어나 자라자 형상이 오묘하였다.

관상가가 말하길 이 아이는 부처님의 거룩한 32 상보다 단지 일곱 가지가 부족할 뿐입니다.

7세에 출가하여 제4도신의 제자가 되었는데 매우 총명하여 두 번 묻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신장은 8, 용모는 보통사람과 크게 다르며 성품은 질박하고 말이 없었다.

도신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후 명성이 더욱 높아져 장대의 호족들이 운집하였고 홍인의 교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有性來下種 因地果還生 無情亦無種 無性也無生

 

꽃과 종자는 나는 성품이 있나니,

땅에 의하여 꽃은 나고 또 난다.

정이 없으면 씨 또한 없어

부처의 성품도 태어남이 없느니라.

 

옛 말에 의하면, 사조 도신(四祖道信)스님이 파두산(破頭山) 있을 무렵 그 산중에 이름 없는 노승 한 분이 있었는데 오로지 소나무만을 심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소나무 심는 도인'이라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사조스님에게 "설법을 좀 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더니, "그대는 이미 늙었으니, 도를 듣는다 한들 널리 펼 수 있겠는가. 혹시 그대가 다시 태어나 온다 하여도 늦었다고 생각하리라" 하였다.

노승은 마침내 그 곳을 떠나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한 처녀를 보고서 정중하게 물었다.

 

"하룻밤 묵어 갈 수가 있겠소?

"저의 부형이 있으니 가서 부탁해 보시오."

"그대가 응락 한다면 가보겠소."

 

그러자, 처녀는 고개를 끄덕여 그러라는 의사를 표시하였고 노승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그 곳을 떠나갔다그 처녀는 주씨(周氏) 집안의 막내딸이었는데 집에 돌아오자 아기를 잉태하니, 그의 부모는 몹시 화가 나서 쫓아내 버렸다. 그 처녀는 갈 곳이 없어 낮에는 동네에서 길쌈으로 품팔이를 하고 밤에는 행각승이 묵어가는 객사(衆館) 아래에서 잠을 자며 지내다가 사내아이를 낳았다그리고는 불길하다 하여 물속에 버렸으나 이튿날 보니, 물길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몸이 매우 선명하기에 깜짝 놀라 건져 올렸다자라면서 어머니를 따라 구걸을 하니 그 고을 사람들이 '성 없는 아이(無姓兒)'라 불렀다사조스님이 황매산(黃梅山)으로 가는 길에 이 아이를 보고 장난삼아 물었다.

"너의 성이 무엇이냐?"

"성이 있기는 합니다만 보통 성씨가 아닙니다."

"무슨 성이냐"

"불성(佛性)입니다."

"성이 없느냐?"

"성씨가 '()'인 까닭에 없습니다."

 

이에 사조스님은 그를 출가시키도록 어머니를 설득하니, 그때 나이 7세였다당시의 객사(衆館)는 오늘날 절이 되어 불모사(佛母寺)라 하였으며, 주씨 집안은 더욱 성하게 되었고, 파두산 저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소나무 심는 도인'의 육신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황매산 동선사(東禪寺)에는 불모총(佛母塚)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위에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전등록傳燈錄]이나 [정조도定祖圖]의 기록에 의하면

홍인(弘忍)스님의 성을 주씨라 한 것은 모친의 성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그러나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석홍인(釋弘忍) 스님의 성은 주씨이며 그의 어머니가 처음 임신하였을 때 달빛이 그가 가는 곳을 따라 뜨락과 방안으로 비치어 밤새도록 대낮처럼 밝았으며 이상한 향기가 스며오니 온 집안이 기뻐하며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객사(衆館)를 태어난 집이라 하며 태어나 물속에 버려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의 아버지가 몹시 사랑하여 그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러한 말들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를 알 수 없다이 일에 대한 헛된 서술들이 대략 이런 종류이다.

개원(開元) 연간(713 ~ 741)에 문학(文學) 여구균(閭丘均)이 부도탑을 세웠지만 쓸모없는 글을 새겼을 뿐이다더우기 회창(會昌) 연간(841 ~ 846)의 불법 탄압과 당대 말엽의 잦은 난리로 또 다시 짓밟혀 더욱 고증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그 기록이 잘못된 것임은 어머니가 주씨인데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무위자(無爲子)는 일찌기 스님의 영정에 찬하였다.

 

누구에겐들 아버지가 없으랴마는 조사에겐 오직 어머니뿐

그 어머니는 누구신가주씨 집안의 막내딸

도도히 흐르는 물이 강으로 들어가듯

문 앞은 변함없이 장안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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