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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중국조사(中國祖師) 法脈 系譜

제 29조 신광혜가(神光慧可) (528~593)

by 산산바다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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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혜가(神光慧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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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9 신광혜가(神光慧可) (528~593)

 

 

보리달마의 법을 이은 2대 조사 혜가(慧可, 487~593)의 성은 희씨(姬氏). 어머니가 이상한 광채가 집안에 비치는 꿈을 꾸고 그를 낳으니 이름을 광광(光光)이라고 불렀다. 그는 30세에 향산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가 출생한 시대는 중국이 남북조로 나뉜 복잡다단한 때였다. 온 나라가 전쟁에 휩싸여 있었고 크고 작은 나라들이 마치 물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데다 용모가 수려해 부모의 자랑이던 그는 노장과 유학 사상을 깊이 공부했는데 특히 '시경'  '역경'에 정통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어지러운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끼고 세속의 지식이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아 불문에 들어선다.

 

그가 출가한 곳은 낙양 용문의 향산사, 스승은 보정이었다. 신광(혜가)의 학식과 인품, 덕성은 곧 널리 알려졌다. 마침내 그는 위나라의 국사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국사란 왕을 보좌하며 국정을 함께 하는 승려이다. 그는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실에서 매달 설법을 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내면은 치솟는 번뇌의 불길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광이 선정에 들었는데, 홀연히 한 선인이 나타나 말했다.

 

"머지않아 과위(果位: 깨달음의 지위)를 얻을 그대가 어찌하여 여기에 막혀 있는가? 남쪽으로 가라.“

이튿날 신광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이를 본 그의 스승 보정이 고치려 하자, 하늘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지금 신광은 뼈를 바꾸고 있는 중이다. 예사 아픔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그제야 신광은 스승에게 선인이 말한 바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보정이 그에게 말했다.

"네 얼굴이 길하고 상스러우니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라. '남쪽으로 가라' 함은 소림을 일컫는 것이니, 필시 달마대사가 너의 스승이리라.“

 

이렇게 혜가는 책의 첫머리에 소개한 대로 팔을 끊어 바침으로서 달마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공부하던 혜가도 부처님의 정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너무 괴롭고 불안하여 스승 달마를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스님, 저 혜가 慧可 입니다.“

"들어오너라. 그런데 무슨 일이냐?“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마음을 편안케 해 주십시오.“

"편치 않은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럼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겠다.“

혜가는 스승께 사실대로 말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의 마음을 이미 편안케 해 주었구나.“

 

달마의 그 말은 혜가에게는 천둥 치는 소리, 뇌우였다. 혜가는 활짝 웃었다. 눈을 뜨면 항상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불안했던 혜가는 달마의 이 안심법문을 통해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마침내 혜가는 붓다로부터 전해진 서천의 28대 달마의 법을 이어 받고 법의 증표로 부처님의 금란가사를 받아 달마를 초조로 하는 선종 2대 조사가 되었다.

 

혜가가 달마 밑에서 그렇게 공부하기를 5. 그는 도부, 담림 같은 수행자와 함께 생활했다. 도부는 15세쯤 달마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속성은 왕씨였고, 천성적으로 선정의 고요함을 좋아하였으며 식량을 준비하여 스승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중 동굴에 숨어 수행하는 달마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달마선법을 익힌 그는 남행하여 양나라 건강 부근의 정림사에 머물렀는데, 양무제는 도부를 예우하여 금릉의 개선사에 주석토록 하였다고 한다. 이후 도부는 사천성의 아미산 등지를 만행하다가 말년에는 다시 개선사로 돌아와 입적하는데, 달마가 "너는 내 가죽을 얻었다"고 하였으니 혜가의 사형이었음이 분명하다.

 

도부와 혜가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도부는 원만하고 너그러운 성격의 사형이었던 것 같다. 달마의 최초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달마의 제1 제자 위치를 혜가에게 물려주고 멀리 양나라로 떠난 것이다. 혜가는 맑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도부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것이다. 또 한 사람의 수행자 담림은 달마의 '이입사행론'을 모아 엮고 서문을 쓴 수행자로서 혜가와는 동고동락한 수행자였다. 담림은 달마를 만나기 전에는 유명한 학승이었다. 혜가는 담림과 함께 탁발을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담림은 도둑을 만나 팔을 하나 잘리게 된다. 담림이 혜가를 찾아와 고통을 호소하자, 혜가는 상처를 불에 태워 지혈을 시키고는 천으로 싸매 주었다. 그날부터 혜가는 혼자 탁발하여 얻어온 양식으로 담림을 간호했다. 다음날 혜가가 담림에게 먹을 것을 주고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통증으로 밤새 끙끙 앓던 담림이 화를 냈다.

 

"혜가여, 아무리 내 팔이 잘려 이 꼴이 되어 있다지만 어떻게 그대마저 나를 병신 취급하는가.“

"왜 화를 내는가. 보리로 만든 떡이 눈앞에 있으니 그대의 입으로 스스로 먹으면 되지 않겠는가.“

"무슨 소린가. 도둑에게 팔이 잘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가.“

"담림이여, 나 또한 팔이 하나 잘려 없다네. 왜 그렇게 화를 내는가.“

 

혜가가 소매를 걷어 팔이 하나 없음을 보여 주자 담림은 깜짝 놀라고 만다. 일찍이 혜가가 담림과 같은 상황에서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공관을 익혀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담림은 혜가에게 사죄했다. 팔이 하나씩 없는 수행자라 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무비림(無臂林)이라 불렀다. 혜가는 곁의 그런 뛰어난 수행자들과 함께 수행하며 드디어 불교의 진리를 구명하여 명확한 오의에 통달했다. 혜가는 달마를 만나게 됨으로써 그의 관점을 진제제일의(眞締第一義)로 고정시킬 수 있었으며 헤맴(방황)을 극복하고 오직 진제를 깨닫기 위해 일생을 불법홍포에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혜가는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간에 언제든 마음이 진실을 지향하여 상대의 동향에 따라 가르쳐 지도했다. 그의 지도 방법은 붓다의 그것과, 또한 달마의 그것과 일치했다. 소리의 울림에 응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에 관하여 깨달음을 알려주고, 행동을 통해 이해에 이르도록 해 주었다. 혜가는 여러 지방의 곳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다. 그래서 혜가를 시기하는 승려들이 나타났다. 보리 유지와 광통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독물을 먹였다. 그런데도 혜가는 독물을 먹었다. 독물이 그를 해칠 수는 없었다. 혜가는 이름을 감추고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저잣거리에서 설법했다. 혜가는 머슴살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는 사람들이 물었다.

"덕이 높으신 스님께서 왜 머슴살이를 합니까?“

"내 마음을 내가 길들이고 있는데 무슨 참견을 하십니까?“

이렇게 그의 독특한 지도를 받아 깨달음을 연 사람이 날로 증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거리 설법을 경청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마침내 보리유지 제자들이 혜가를 가리켜 '수상한 사람'으로 몰아 관가에 고발했다. 혜가를 조사한 관리는 보리유지 제자들의 주장대로 그가 확실히 수상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혜가 스스로 자신을 '나는 틀림없이 수상한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현감은 마침내 법대로 그를 처형하도록 하였다. 혜가는 이때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전생에 지은 묵은 허물의 빚을 이제야 갚는구나. 나의 법문은 4대 조사 때에 이르러 그 이름만 가질 뿐 타락할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달마를 초조로 하여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으로 이어지는 능가주의 운동가들은 분명히 '능가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해서 절대 진리를 구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혜가가 미리 예측했던 대로 훗날 능가경은 4(승찬도신홍인혜능)가 지나고 난 후에는 형식적인 분석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달마는 분명 원리적 방법과 실천적 방법을 통해서 절대 진리를 답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혜능의 뒤를 이은 회양은 물론이고 그 뒤를 잇는 모든 조사들이 능가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혜가의 거듭된 당부를 어기고, 다시 말하면 능가주의와 반야주의를 어기고 초기 선종과는 전혀 다른 선종을 향했던 것이다. 혜가는 마침내 형을 받고 입적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빛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그의 몸에서는 흰 젖이 흘러나왔다. 현감 택중간은 혜가의 최후 모습을 그대로 황제에게 전했다. 북주의 황제(무주)는 크게 후회했다.

 

"그야말로 참다운 보살이었구나. 우리의 실수로 참된 사람을 억울하게 죽게 했구나.“

 

조정의 신하들은 혜가의 의연한 죽음으로 하여 모두 불교에 귀의했다. 그로 하여 북주의 불교 억압정책은 철회되었으며 불법은 다시 흥왕하기 시작했다. 당시 혜가의 나이는 107세였다. 그의 마지막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本來緣有地(본래연유지) : 본래부터 마음 땅이 있어

因地種花生(인지종화생) : 그곳에 씨를 뿌려 꽃이 피지만

本來無有種(본래무유종) : 본래 종자가 없음으로

花亦不曾生(화역부증생) : 꽃도 역시 피는 것이 아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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