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중국조사(中國祖師) 法脈 系譜

제 30조 감지 승찬(鑑智僧璨) (593~606)

by 산산바다 2022. 11. 19.

산과바다

감지 승찬(鑑智僧璨)

佛祖正脈(불조정맥) HOME

 

 

 

                  제 30 감지 승찬(鑑智僧璨) (593~606)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에 다다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가 어려울 뿐이다.

어떤 길()이 싫다고 애써 피하고, 좋다고 혹해서 따르는 집착()만 하지 않으면

바른 길()이 뭔지 훤히 알게 된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을 꺼릴 뿐.

증오와 애욕만 없으면 훤칠하게 드러난다.

 

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털끝만치라도 차이가 생기면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생기니

도를 현전에서 터득하고자 하거든 순경이나 역경을 두어서는 안 된다.

 

違順相爭 是爲心病 不識玄旨 徒勞念靜

어기고 따르면서 서로 다투면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되어

현묘한 뜻도 모르고 공연히 번뇌만 그치려 한다.

 

圓同太虛 無欠無餘 良有取捨 所以不如

태허처럼 원만하여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여여하지 못한다.

 

莫逐有緣 勿住空忍 一種平懷 泯然自盡

세간의 인연도 따르지 말고 제법개공의 도리에도 머물지 말라.

한결같이 마음을 평등하게 지니면 연()과 공()이 저절로 없어진다.

 

止動歸止 止更彌動 唯滯兩邊 寧知一種

움직임을 그치고 고요하고자 하면 고요가 다시 더욱 크게 움직여

움직임과 고요의 양변에 막히게 되니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一種不通 兩處失功 遣有沒有 從空背空

한결같음으로 일관하지 않으면 움직임과 고요함의 공덕을 잃게 되니

()를 부정하면 유()에 빠지고 공()을 따르면 공()을 등지게 된다.

 

多言多慮 轉不相應 絶言絶慮 無處不通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진리에) 상응치 못하니

말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통하지 못할 곳이 없다.

 

歸根得旨 隨照失宗 須臾返照 勝却前空

근본을 향하면 종지를 얻고 현상을 따르면 종지를 잃으니

잠시라도 돌이켜 비추어 보면 위의 공()보다 뛰어나게 된다.

 

前空轉變 皆由妄見 不用求眞 唯須息見

위의 공()이 전변(轉變)하는 것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참됨도 구하려 말고 오직 망견을 쉬어야 한다.

 

二見不住 愼莫追尋 才有是非 紛然失心

분별하는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지도 말라.

잠깐이라도 시비를 내면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게 된다.

 

二由一有 一亦莫守 一心不生 萬法無咎 無咎無法 不生不心

허물과 법의 둘은 한 마음에서 생기게 되니 그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한 마음 내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허물이 없고 법도 없으면 허물도 나지 않고 마음도 없다.

 

能隨境滅 境逐能沈 境由能境 能由能境

주관은 객관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 따라 없어지니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 되고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 된다.

 

欲知兩段 元是一空 一空同兩 齊含萬象 不見精  寧有偏黨

양단을 알고자 하는가. 원래 동일한 공()이다.

동일한 공()은 둘 다 똑같아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세밀하고 거칠음이 따로 없으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大道體寬 無易無難 小見狐疑 轉急轉遲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지만

좁은 견해로 의심을 내니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執之失度 必入邪路 放之自然 體無去住

대도에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 반드시 삿된 길에 빠지게 되고

대도마저도 놓아 버리면 자연스러워 본체에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任性合道 逍遙絶惱 繫念乖眞 昏沈不好 不好勞神 何用疎親

자성에 맡기면 도()에 계합하고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망념에 얽매이면 진()에 어긋나고 혼침하여 여의치 못하게 된다.

여의치 못하면 정신이 피곤하니 어찌 친()과 소()를 알겠는가.

 

欲趣一乘 勿惡六塵 六塵不惡 還同正覺

일승에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멀리하지 말라.

육진을 멀리하지 않으면 그것이 정각(正覺)과 같다.

 

智者無爲 愚人自縛 法無異法 妄自愛著 將心用心 豈非大錯

지혜로운 이는 걸림이 없으나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얽매인다.

법은 다른 법이 없으나 망령되게 스스로 애착하여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알려고 하니 어찌 크게 그릇되지 않으랴.

 

迷生寂亂 悟無好惡 一切二邊 良由斟酌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나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다.

일체의 분별하는 견해는 자못 억지 짐작 때문이다.

 

夢幻虛華 何勞把捉 得失是非 一時放却

몽환(夢幻)과 허화(虛華)를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득실과 시비를 일시에 놓아 버려라.

 

眼若不睡 諸夢自除 心若不異 萬法一如

만약 눈에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만약 마음이 한결같으면 만법이 일여하게 된다.

 

一如體玄 兀爾忘緣 萬法齊觀 歸復自然

일여하게 본체가 현묘하면 올연히 반연을 잊고

만법이 그대로 현전하여 자연으로 돌아간다.

 

泯其所以 不可方比 止動無動 動止無止 兩旣不成 一何有爾

그 까닭을 없애고 나면 견주어 비할 바가 없다.

고요하면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면 고요해도 고요하지 않다.

고요와 움직임이 없으니 하나인들 어찌 있겠는가.

 

究竟窮極 不存軌則 契心平等 所作俱息

구경과 궁극은 일정한 법칙이 없고,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하면 능과 소가 모두 없다.

 

狐疑盡淨 正信調直 一切不留 無可記憶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정신(正信)이 제대로 드러나고

일체에 머물지 않으면 집착할 바가 없다.

 

虛明自照 不勞心力 非思量處 識情難測.

텅 비도록 저절로 비추어지면 애써 마음 쓸 일 없다.

비사량처는 분별사식(分別思識)으로 헤아리지 못한다.

 

眞如法界 無他無自 要急相應 唯言不二

진여법계는 나와 남이 없으니

그것을 알려고 하나 그것은 불이(不二)의 도리일 뿐.

 

不二皆同 無不包容 十方智者 皆入此宗

불이(不二)는 모두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으니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지를 깨친다.

 

宗非促延 一念萬年 無在不在 十方目前

종지에는 길고 짧음이 없으니 한 생각이 곧 만년이요

있거나있지 않음不在이 없으니 시방이 바로 눈앞에 있다.

 

極小同大 忘絶境界 極大同小 不見邊表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으니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으니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다.

 

有卽是無 無卽是有 若不如此 必不須守

()가 곧 무()요 무()가 곧 유()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다.

 

一卽一切 一切卽一 但能如是 何慮不畢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이와 같이 알면 어찌 지도(至道)를 마치지 못할까 걱정하랴.

 

信心不二 不二信心 言語道斷 非去來今

신심(信心)은 곧 불이(不二)이고 불이(不二)는 곧 신심(信心)이니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고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으로 잴 수도 없다.

 

 

승찬 스님(僧璨大師)의 출생지, 성씨 등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이 전해오고 있지 않아 스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단편적으로 전해오는 일화와 선시(禪詩) 신심명(信心銘)을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유추할 뿐이다.

 

2조 혜가 스님이 서위(西魏)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보리달마의 선풍을 드날리던 때에 승찬은 속인의 몸으로 혜가 스님을 만난다. 승찬은 이때 이미 세속의 나이로 40을 넘은 데다 문둥병까지 앓고 있는 몸이었다.

승찬은 혜가 스님을 찾아가 자기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불쑥 물었다.

제자는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화상께서 저의 죄를 참회하게 하여 주십시오.

스님이 말했다. 그대의 죄를 가지고 오라. 참회시켜 주리라.

승찬은 조금 있다가 말했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다 참회(懺悔)되었다. 앞으로는 불··승 삼보(三寶)에 의지해서 안주하라.

지금 화상(스님)을 뵈옵고 승보(僧寶)임은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보(佛寶법보(法寶)라 합니까.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도 그러하다.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은 마음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으며, 마음이 그러하듯이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혜가 스님께서는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아시고 곧 머리를 깎아주며 말했다. 너는 나의 보배이다. 구슬 찬()자를 써서 승찬(僧璨)이라 하라. 그해 318일 광복사(光福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그로부터 병이 차츰 나아져서 2년 동안 스님을 시봉(侍奉)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혜가 스님은 승찬에게 옷과 법을 전한 뒤에 다시 말했다.

그대는 내 법을 받고는 깊은 산속에 들어앉아 얼른 교화에 나서지 말라. 머지않아 국난이 있으리라. 승찬 스님은 선종 제3조의 대법을 계승한 뒤 몸을 숨겨 서주(舒州)의 환공산(晥公山)에 들어가 깊이 은거했다. 이후 도신 스님(道信, 580651)을 만나 그의 그릇됨을 알아보고 옷과 법을 전해주고는 곧 나부산(羅浮山)으로 가서 은둔하다가는 다시 옛터로 돌아와서 대중에게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널리 연설한 뒤에 법회 하던 큰 나무 밑에서 서서 합장하고 임종(606)하였다.

 

승찬 스님이 혜가 스님을 처음 만나던 때가 40(563)쯤 무렵이므로, 북주(北周) 무제(武帝, 561578)의 법란(573578)은 약 10년 후의 사건이 되고, 또 제4조 도신 스님(道信, 580651)을 만나 법을 전한 수 개황(隨開皇) 12(592)은 법란 이후 약 20년 이후의 일이 된다. 따라서 3조 승찬 스님은 전대미문의 가장 비참한 폐불(廢佛)의 법난기를 체험하며 달마의 선법을 펴고 전하는 막중한 사명을 완수한 조사였다고 할 수 있다. 폐불에 의해서 압박을 받고 숨어 들어가게 되었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순화되고 축적된 불교적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임무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승찬 스님에게는 선시 신심명(信心銘)이 그의 이름으로 전해진다.

신심명은 전체 구성이 4146584자의 소품이지만, 오늘날까지 사상의 극치를 함축하고 있는 명저로 회자(膾炙)된다. 신심명의 대의는 우리가 모든 상대적인 양변의 차별견해를 모두 버리면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모든 대립이나 시비·득실의 망념을 여의어 상대경계가 아닌 평등 자재한 경지를 증득해 거기에 머물 것을 촉구한다. 또한 승찬 스님이 신심명에서 하나가 곧 일체라는 상호 무애를 설한 것은 화엄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으며, 만법을 평등하게 관찰하면 자연 그대로 본연에 돌아간다고 한 것은 노장(老莊)의 만물일체관과도 그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 결국 신심명은 선교를 막론하고 양변을 여윈 중도(中道)가 불교의 근본 사상임을 표방한 중도론(中道論)이면서, 나아가 선과 중국적 사유체계가 모순 없이 회통한 사유의 극치라 하겠다.

승찬은 주로 능가경(楞伽經)을 사부대중에게 전했으며, 신심명을 널리 전했다.

신심명은 사언절구로서 총 146584자의 운문체로 되어 있으며, 신심을 중요한 수행의 관건으로 보고 일체의 편견에 집착하지 않는 수행을 강조했다.

6세기 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신심명은 중국과 한국은 물론 일본 등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15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불법을 배우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독송하고 있는 수행의 지침서이다.

신심명은 중국에 불법이 전해진 이후에 최고의 글로 학자들이 격찬하고 있고,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심명의 일관된 가르침은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양변(兩邊)에 치우치는 그릇된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일반적 흔히 가지기 쉬운 상대적인 개념 즉 증·(憎愛), ·(好惡), ·(逆順), ·(是非), ·(欠餘), ·(大小), ·(促延), ·(有無), ·(一多), ·(止動) ·(遠近) 등 모든 상대적인 개념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말고 중도(中道)를 잡는 것이 도의 본질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석가모니불 이후 용수 보살이나 달마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강조되어 왔던 중도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불교의 핵심사상을 비교적 짧은 문장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는 명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승찬은 신심명의 마지막 구절에서 불이신심(不二信心)를 강조함으로써, 둘이 아니라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하지만 신심명(信心銘)은 후대의 어떤 작자가 승찬(僧璨)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산과바다 이계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