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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중국조사(中國祖師) 法脈 系譜

제 31조 파두 도신(破頭道信) (606~651)

by 산산바다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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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두 도신(破頭道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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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1 파두 도신(破頭道信) (606~651)

 

 

華種有生性 因地華生生 大緣與性含 當生生不生

 

꽃의 종자에는 태어나는 성품이 있고.

땅의 인연으로 태어나 자라고 피는 것

큰 인연의 성품이 더불어 합해지면,

마땅히 생하고 생하면 다시 생하지 않으리.

 

중국 선종의 제 4조인 도신대사. 중국 선종의 정착을 위해 생애를 바쳤던 여섯 봉우리 가운데 네 번 째 봉우리가 되었던 도신대사(道信大師). 선종 승려 가운데 최초의 육신불(肉身佛. 肉身菩薩) 모셔졌던 도신대사.

 

그분이 비록 선종 최초의 육신불이 되셨지만, 그 분의 참뜻은 육신불로 남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도신대사의 진정한 뜻은 중국 선종의 정립과 중생의 해탈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達摩大師)로 부터 6조 혜능대사에 이르까지의 여섯분 고승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생소한 스님이 제4조 도신 대사이다. 그러나 도신 대사는 다섯 분 못지않게 큰 도력을 갖추신 분이었고, 선종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크게 공헌한 분이었다. 그분은 황하 유역의 북방 선풍과 양자강 유역의 남방 선풍을 통합하였고, 중국 선종 최초의 총림(叢林)을 만들었으며 [능가경] 중심의 인도식 선사상을 [금강경] 중심의 중국식 선으로 개량하는 등 선종사에 있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크나큰 공로를 남긴 것이다.

 

대사는 서기580년에 사마(司馬)씨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하남 지방에서 살았던 그의 선조들이 기주 광제현, 지금의 호북 기춘으로 이주한 뒤에 태어났다. 그러나 유년기의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다만 "날 때부터 특이 하였고, 어릴 때부터 불교의 모든 해탈법문(解脫法門)을 흠모 하였으니 마치 전생에 익힌 것과 같아 보였다"고 한 [전등록]의 기록이 전할 뿐이다.

7세에 출가하여 두 명의 스승을 섬겼다고 하나, 어느 절에서 누구를 은사로 모셨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사의 오도적 생애는 14세에 제3조 승찬 대사를 만남으로 해서 달라진다. 때는 수나라 개황(開皇) 12년 임자(壬子), 서기 592년 이었으며, 장소는 서천(舒川) 환공산(晥公山), 지금의 안휘성(安徽省)에서였다.

 

어린 사미 도신은 큰 스님이신 승찬 대사 앞에 예를 올리고 간곡히 말씀 드렸다.

"원컨데 화상이시여, 자비를 베푸시어 해탈하는 법문을 일러 주소서."

"누가 그대를 속박 하였더냐?"

 

"아무도 저를 결박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벗어난단 말인가?"

 

이 문답 속에서 도신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대오(大悟)한 것이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해결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불교의 해탈법문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사미승 도신은 이러한 간단한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도저히 뚫을 수 없었던 해탈의 관문을 통과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허물을 곧바로 꼬집어 깨달음을 얻게 하는 순수한 개오(開悟)의 방법은 승찬 대사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달마대사 이래 이어져 온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2조 혜가대사와 3조 승찬대사의 오도기연을 통해, 이들 개오방법의 공통점을 함께 공부해 보자.

 

혜가스님은 달마대사에게 왼팔을 끊어 바치는 신심을 보이고 입실(入室) 하였지만,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었다.

"저의 마음은 아직 편안하지 않습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옵소서."

"너의 편안하지 않은 마음을 가져 오너라. 내 너를 위해 편안하게 해 주마."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 마음이란 필경 찾을 수 없는 것,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하여 주었느니라."

 

이 말이 끝나자 혜가는 확철대오 하였고, 요지부동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치병에 걸려 고생하던 승찬 또한 혜가대사를 찾아가 평안을 구하였다.

"제자는 오래전부터 풍병을 앓고 있습니다. 죄장참회(罪障懺悔)의 법으로써 이 목숨을

구하여 주옵소서."

"죄를 가져 오너라. 없애 주리라."

"죄를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죄는 내가 이미 다 참()하여 마첬나니라. 앞으로는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라."

 

안정되지 않은 혜가의 마음, 죄업 때문에 병이 생겼으니 업장을 소멸시켜 달라는 승찬의 호소, 해탈을 구하는 강열한 구도의 의지에 스스로 결박당한 도신의 무명은 스승이 던진 회광반조(廻光返照)의 가르침에 의해 모두 타파되었다. 회광반조. 그것은 빛을 돌이켜 마음의 본질을 비춰보라는 말이다.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향해 되돌아가라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회광반조의 선문답으로 해탈을 얻은 도신은 9년 동안 승찬 대사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다가 길주(吉州)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2~3년 더 스승을 시봉 하였다.

그동안 승찬 대사는 자주 현묘한 법으로 그를 시험하고 가르쳤으며, 마침내 인연이 익었음을 알고 달마대사로부터 전하여 온 의발(衣鉢)과 전법게(傳法偈)를 주셨던 것이다.

 

꽃씨는 땅을 인()하고

땅을 의지하여 꽃씨는 피어난다.

그러나 꽃씨를 심는 이 없으면

꽃도 땅도 모두 피어남이 없노라.

 

의발과 전법게를 전한 승찬대사는 곧 나부산(羅浮山)으로 떠났고, 이때부터 도신 대사는 혼자만의 외로운 정진과 중생교화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전등록][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는

도신대사가 오도한 직후 마음을 걷어잡아 완전히 졸음을 쫓았기 때문에, 입적할 때 까지 60년 동안 '상좌불와(常坐不臥)하고 협불지석(脇不至席)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눕지도 않고 단정히 앉아 정진한 도신대사의 60년 장좌불와(長坐不臥)는 달마의 9년 면벅(面壁)과 버금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달마가 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벽이 달마를 본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달마의 9년 면벽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을 뜻하는 것이라면, 도신의 60년 장좌불와(長坐不臥)는 그의 삶 자체가 선이요, 삼매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스승이신 승찬 대사가 나부산으로 운수행각을 떠나자, 그는 여산(廬山)의 대림사(大林寺)로 옮겨 10여 년 동안 보임(保任) 하였다. 그때 대림사에는 중국 삼론종(三論宗)을 세운 법랑(法朗)의 문인으로서 천태종의 선관(禪觀)을 즐겨 닦았던 지착선사(智錯禪師)가 주석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대사는 반야와 천태사상을 공부 하였고,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염불 수행법을 체득 하였다.

선종의 승려이면서도 염불수행법을 가르친 도신대사, 그러나 대사가 가르친 염불은 극락왕생이나 기복의 차원이 아니라 해탈을 위한 일행삼매의 방편 이었다.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법계의 모든 현상이 평등하여 한결같고, 차별이 없는 하나임을 관하는삼매이다. 이 일행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먼저 반야바라밀을 닦은 다음, 조용한 장소를 택해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대사는 가르쳤다. 그것도 그 어떤 대상도 취하지 말고, 오직 부처님만을 마음에 담아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일불염불(一佛念佛)을 닦아 칭명전념(稱名專念)이 되면 곧 일행삼매가 이루어진다고 대사는 가르쳤다. 일불염불이야말로 일행삼매를 이루는 가장 빠른 방법임을 강조한 대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은 육조혜능은 일불염불을 항상 곧은 마음으로 행하는 상행일직심(常行一直心)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마침내 선종 특유의 일행삼매법이 정착 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대림사에 있던 대사는 어느 날 여산의 봉우리에 올라갔다. 그 곳에서 호북에 있는 파두산(破頭山)을 바라보니 자주 빛 구름이 서리었고 그 아래에 여섯 갈래의 흰 기운이 가로로 뻗쳐 나가는 것을 보았다. 대사는 불법을 크게 떨칠 도량이 그곳에 있음을 깨닫고 파두산을 후일의 거처로 정하였다.

 

수나라 대업(大業) 13, 서기 617년에 대중들을 이끌고 길주(吉州)를 향해 길을 떠난 대사가 여능(廬陵)부근에 이르렀을 때, 도적떼를 만나게 되었다. 도둑들은 70여 일 동안 성을 둘러싼 채 포위를 풀지 않았고, 성 안의 우물은 모두 고갈되어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를 가엾게 생각한 대사는 성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마하반야(摩何般若)'을 외우게 하였다.

 

도적들이 성곽 주위를 돌다 위를 바라보니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신병(神兵)이 버티고 서서 지키는 것이 아닌가. 이상히 여긴 도적들은 "이 성안에 반드시 도력(道力)이 높은 사람이 있으니 공격하지 말자"고 하면서 모두 슬금슬금 물러갔다는 이적(異蹟)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이적은 '마하반야'의 독송으로 인해 일어났다. 왜 선종의 4조인 도신대사가 '마하반야'를 외우게 하였는가?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달마대사 이래 육조 혜능에 이르기까지 선종 법맥상전의 신표로는 [능가경]이 전해졌다. 그런데 대사는 [능가경]이 아닌 [반야심경]으로 중생교화의 문을 열었다. 이것은 선()은 이론이나 철학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간파한 도신대사는 구조와 설명이 복잡한 [능가경]보다, 쉽게 외울 수 있고 쉽게 마음의 힘을 기를 수 있는 [반야심경]을 통하여 선의 대중화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대사가 [반야심경]을 강조한 이후, 홍인과 혜능 대에는 [금강경]이 선의 소의경전으로 정착 되었다.

따라서 이적을 낳은 도신대사의 '마하반야'[능가경]중심의 인도적 달마 선을 [금강경] 중심의 중국 선으로 탈바꿈시킨 산파역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무덕(武德) 7년인 서기 624년에 대사는 고향땅인 기주로 돌아와 여산에서 보아 두었던 파두산에 머무르니 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대중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파두산은 일명 황매산(黃梅山). 쌍봉산(雙峰山)으로 불리어 지는데, 대사는 이 산의 유거사(幽居寺)에 머물면서 입적할 때까지 30년 동안 선풍을 떨쳤던 것이다.

 

파두산에서 수행지도체계는 중국 총림선(叢林禪)의 효시가 되었다. 달마 이후 승찬 대사까지의 조사들은 모두 은거생활을 하거나 일정한 장소를 지키지 않는 운수행각을 했으므로, 수행승들은 마음이 있어도 조사를 중심으로 모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총림의 형성은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이 같은 단점이 도신대사가 파두산에 주석함으로써 타파된 것이다. 남북의 학자와 선객들은 대사를 중심으로 모여 들었고, 그 수는 5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신의 총림을 이어받은 5조 홍인은 7백여 명의 문도를 규합 하였고, 육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대규모의 선림승단(禪林僧團)이 형성 되었던 것이다. 도신대사가 이와 같은 대집단의 생활을 무리 없이 꾸려갈 수 있었던 것은 승려들의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과 사찰 인근 농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청규(白丈淸規)에서 자급자족을 위한 승려들의 노동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백장보다 2백년 가까이 앞선 도신대사 때 승려들의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찰의 자급자족 경제와 대중 포교를 함께 지양했던 도신대사는 선종승단의 혁신을 가져온 고승이었다.

 

또한 도신대사의 총림 형성으로 황하유역에서 시작된 선종이 양자강 유역까지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다. 이는 선종 교세의 확장을 의미한다. 처음 달마대사는 숭산 소림사에서 9년 면벽을 하며 북쪽 낙양일대에서 활동을 하였지만 그뒤 2조와 3조는 차츰 남쪽으로 내려왔고, 마침내 도신대사는 양자강 유역에 정착하여 황하와 양자강의 즉 남과 북의 선풍을 이어 놓는 큰 기류를 형성 하였던 것이다.

 

당의 정관(貞觀) 17, 서기 643년에 당 태종은 대사의 도풍을 듣고 가까이서 보고자, 조서(詔書)를 보내 수도로 불렀다. 그러나 대사는 표()를 올려 사양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 마침내 화가 난 당태종은 네 번 째 조서를 보내면서 사신에게 명령을 하였다.

"이번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거든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오라."

조정에서 온 사신은 파두산에 이르러 조서를 전하였고 마침내 칼을 빼어 들게 되었으나, 대사는 태연히 목을 내밀 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에 감동한 사신이 그대로 돌아가 태종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니, 대사에 대한 태종의 신심이 더욱 깊어 졌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와 종교, 권력과 법력의 한계를 장중하게 확정 지어 주는 교훈일 뿐 아니라, 달마 이래 중국선의 확립을 위해 기울인 도신대사의 참된 정신을 알려주는 귀중한 일화이다.

서기 651년 당나라 고종 영휘(永徽) 294일에 대사는 홀연히 대중들을 불러 훈계를 내렸다.

 

"일체의 제법(諸法)은 모두 해탈되어 있다

 너희들은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미래의 중생을 교화하라."

 

말을 마치고 편안히 앉아 72세의 나이로 입적 하였다. 제자들은 파두산 즉 황매산에 유체를 모신 탑을 세우고, 중서령(中書令)의 두정(杜正) 윤기(倫其)로 부터 글을 받아 탑비를 세웠다.

 

입적한 다음해의 사월 초파일에 탑문이 까닭 없이 열리더니, 사방으로 짙은 향내가 퍼져 나오며 입적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대사의 유체가 모습을 나타 내었던 것이다. 제자들과 초파일을 기념하기 위해 운집한 신도들은 놀라움과 감격에 휩 쌓였다. 그 뒤 제자들은 감히 탑문을 닫지 못하였고, 육신불로서 중생계와 영원히 함께 하는 스승의 모습을 우러러 보며 향화공양을 올렸던 것이다.

 

도신대사의 평생의 뜻은 중생들의 해탈에 있었다. 중생들이 곧바로 마음을 밝혀, 본성을 깨닫고 부처를 이루기를 간절히 바라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에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해탈"이라고 한 마지막 임종의 말씀처럼 도신대사는 중생들의

해탈과 성불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영원한 진리의 몸인 전신사리 즉 육신불로 지금도 수많은 불교도들의 예배를 받고 있다.

 

도신 존자는 법을 이은 후 섭심(攝心)으로서 잠에 떨어지는 일이 없었으니, 60년을 눕지 않은 채 지냈었다고 한다.

 

항시 파두산(破頭山)에 거주하였으니 수많은 학승들이 모여들었던 , 하루는 황매(黃梅)라는 지방을 찾았던 길에 길가에서 한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나이는 7살 정도로서 그 생긴 모습이 기특하여 존자께서 묻기를,

"너의 성()은 무엇인가?(子何姓)"

이에 아이가 대답하기를,

"불성(佛性)입니다.(是佛性)" 하였다.

 

존자께서 말씀하기를,

"너에겐 성씨도 없단 말이냐?(汝無姓耶)" 하고 말하자,

"성품()이란 공한 까닭입니다.(性空故)"라고 아이는 대답하였다.

 

이렇듯 대화를 나누던 존자께서는 그 아이가 법기(法器)임을 아시고 그의 부모를 찾아 출가할 것을 허락 받으니, 그 아이의 이름은 홍인(弘忍)이요 이후 도신 존자의 법을 잇는 전법자가 되는 것이다.

 

이후 나이 72세가 되어 존자께서는 홍인(弘忍)에게 법과 함께 게송을 전하니, 열반에 드신지 4년이 지나도 생존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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