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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詩/禪師들의 禪詩

虛應堂普雨(허응당보우)의 禪詩(선시) (61)~(70)

by 산산바다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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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虛應堂普雨(허응당보우) (1509~1565)禪詩 (61)~(70)

 

 

虛應堂普雨(허응당보우) (1509~1565. 法號 虛應堂 · 懶庵. 奉恩寺 住持)

 

허응당보우(虛應堂普雨, 1509~1565, 조선 중기의 승려)1530(중종 25) 16세에 금강산 마하연에 입산, 1548년 강원감사 정만종의 천거로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고, 1551년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선교양종제(禪敎兩宗制)를 부활시켜 승과를 실시했는데 이때 서산(西山)과 사명(四溟)이 각각 선종과 교종의 승파에 장원으로 뽑혔으며,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유생들의 상소로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 귀양, 제주목사인 변협(邊恊)에게 피살당하였습니다. 저서로는 허응당집(虛應堂集)(3)이 있으며 양주 회암사지에 그의 부도도 추정되는 무명의 부도가 있습니다.

 

보우가 활약했던 시대는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이 확고하게 정착되면서 성리학이 극성했던 시기였다. 이때는 조광조, 이황, 이이와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활동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성리학 극성기에 명종의 모후인 문정대비(文定大妃)의 도움으로 오래전에 폐지된 불교의 제도를 부활하려는 보우를 유자들은 요승’, ‘권승이라며 철저하게 폄하했지만, 보우는 조선불교를 중흥시킨 뛰어난 고승이었다.

유가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 불교부흥을 위해 매진했던 보우의 삶과 행적은 승려 한 개인이 전체 유림을 대상으로 싸운 한 판의 처절한 전투였다. 보우는 이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지만, 선교양종과 승과를 복구하고, 도승제(度僧制)를 부활하는 등의 탁월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출처 : 불교신문

 

조선불교의 중흥조. 스님은 일찍이 불학에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와 서에 능하여 사대부들과 교류하였다. 15세에 출가하여 마하연사, 표훈사 등 금강산 일대에서 20여 년간 수행하다 세상을 나와 호남지역을 유람하다 곳곳에서 자행되는 극심한 폐불과 법난을 몸소 겪고 양주 회암사로 돌아와 몸져누웠다. 병고를 떨치고 일어날 즈음 당시 봉은사의 명곡조사가 노환으로 물러나게 되자 문정대비는 보우대사를 천거 봉은사에 주석케 하였다. 문정대비의 후원을 얻은 보우대사는 쇠락해가는 조선불교를 중흥하기 위한 근본도량을 봉은사로 하고 이곳에서 중흥불사를 시작하였다.먼저 승려 5000여명 도첩을 주어 승려의 신분을 보장하였고, 선교양종을 부활하였으며, 승과고시를 실시함으로써 불교 인재발굴의 장을 마련, 서산*사명과 같은 당대의 고승을 배출할 수 있었다. 스님은 시문에 능하였고, 불교에 있어서는 선과 교에 탁월한 식견을 갖추어선교일체론을 주장하였으며, 유불선(孺佛仙) 삼교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스님의 이러한 사상은 후학들이 편찬한 허응당 문집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중기의 고승.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 보우는 법명이다.

 

가계 등은 미상이며,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그 뒤 금강산일대의 장안사(長安寺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련을 쌓고 학문을 닦았다. 6년 동안의 정진(精進) 끝에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법력(法力)을 얻었고, 그밖에도 대장경을 모두 섭렵하는 한편 <주역>도 공부하였다. 당시 그를 지도해준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나 여러 가지 문헌을 종합해보면,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견성암(見性庵)에 있던 지행(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548(명종 3) 12월 봉은사(奉恩寺) 주지에 취임하여 제일 먼저 문정대비로 하여금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 (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능침(陵寢)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물건을 훔친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황언징(黃彦澄)을 처벌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에는 방()을 붙여 잡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킴으로써 유생들의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조선시대 와서 처음 있는 일로서 유생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끝내는 이 문제가 조정에까지 비화되었다.

 

이때부터 문정대비·보우와 유생들 사이에는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었다. 이후 문정대비로 하여금 선교 (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게 함으로써 15515월에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다. 선교 양종을 부활하라는 문정대비의 비망기가 내려진 뒤 6개월 사이에 상소문이 무려 423건이나 되었고,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것이 75()나 되었다. 그러나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佛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156547일에 문정대비가 죽고, 대비의 장례를 마친 유생들은 곧바로 보우의 배척과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가운데 이이(李珥)<논요승보우소 (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것을 주장함에 따라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보우는 1565612일에서 728일 사이에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보우의 죽음이 서울에 알려진 것은 1015일이었다. 보우는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선교일체론 (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았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허응당집(虛應堂集)>3권과 <나암잡저(懶庵雜著)>1,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 (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1, <권념요록(勸念要錄)>1권 등이 있다.

 

 

 

(61) 舟中卽事(주중즉사) : 배 안에서

 

乘桴赴詔設齋筵 ~ 뗏목 타고 부름에 나아가 재() 자리 設置하고

還泛昭陽渡上船 ~ 다시 昭陽江 건너려고 배에 올랐네.

一棹冷涵龍岫雨 ~ 노는 龍門山 비를 차갑게 머금었고

片帆靑帶水鍾煙 ~ 조각배는 水鍾寺 노을 푸르게 둘렀구나.

紅翻江澹楓搖岸 ~ 붉게 일렁이는 맑고 丹楓나무 언덕에 흔들려

白點篷疎月滿天 ~ 거룻배 드문드문하고 하늘엔 달빛 가득하네.

漁父不知來去意 ~ 漁父는 오고 가는 뜻 알지 못하고

蘆花秋渚枕竿眼 ~ 갈대꽃 핀 가을 가에 장대 베고 잠자네.

 

* 거룻배(lighter) : 근해에서 배에 물건을 싣거나 내리는 데 사용되는, 보통 바닥이 편평하고 흘수가 얕은 보트나 바지선(barge).

 

 

 

(62) 贈別緝默兩禪人(증별집묵량선인) : . 두 스님과 헤어지며 주다.

 

<1>

積雪封松逕 ~ 쌓인 눈 소나무길 봉쇄했고

寒雲凍草堂 ~ 찬 구름 草堂에 얼어붙는데

豈知同策杖 ~ 어찌 알았으랴. 함께 지팡이 짚고

如約共尋狂 ~ 約束한 듯이 미치광이 찾아올 줄.

會遇情雖切 ~ 만난 비록 절실해도

分離意自傷 ~ 헤어지면 마음 저절로 하니

千峯萬壑裏 ~ 一千 봉우리 一萬 골짜기 속에서

冀好返輕裝 ~ 가볍게 行裝 꾸려 잘 돌아가길 바라네.

 

<2>

淸平嫌寺淺 ~ 淸平山은 절 넓지 않아 싫고

雪岳愛松深 ~ 雪岳山은 소나무 숲 깊어 사랑하네.

未解藏蹤妙 ~ 자취 감추는 妙法 풀지 못하여

勞師訪跡尋 ~ 수고롭게 禪師를 찾아오게 하였구려.

 

 

 

(63) 智軒萬德 訪余於淸平之祖室 求存心養性之要 及臨衆處事之方 以偈示之 :: 智軒萬德 스님이 淸平寺 祖室로 나를 찾아와 마음을 保存하고 本性을 기르는 要諦大衆하여 일에 對處하는 方法하기에 偈頌을 보여주다.

 

心爲身主萬機源 ~ 마음은 몸의 主人으로 모든 기미(幾微)根源이며

括地包天妙絶言 ~ 天地를 포괄하면서도 하게 말로는 斷絶되어

不覩不聞常戒懼 ~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에 恒常 警戒하고 두려워하여서

無忘無舍是操存 ~ 잊거나 버림도 없어야 이에 잡아서 保存할 수 있다.

放行月落千江照 ~ 놓아주어 가게하면 달그림자 一千 個에 비치고

把定雲歸萬壑屯 ~ 잡아두어 安定하면 구름이 돌아가 一萬 골짜기에 머문다.

在室尙無慚屋漏 ~ 房室에 있을 때라도 집에서 새어나가는 부끄러움이 없어야하며

非行賞怒物威恩 ~ 칭찬과 성냄으로 위엄과 은혜를 衆生에게 해서는 안 되네.

 

 

 

(64) 眞佛庵(진불암) : 진불암

 

庵在雲重處 ~ 庵子가 구름 깊은 곳에 있는데

從來不設扉 ~ 처음부터 사립은 달지 않았네.

臺杉含晩翠 ~ 築臺나무 늦 푸르름 머금고

庭菊帶斜暉 ~ 뜨락의 菊花는 저녁노을 띠었네.

木落經霜菓 ~ 나무는 서리 맞은 열매를 떨어뜨리고

僧縫過夏衣 ~ 스님은 여름 지낸 옷을 꿰매네.

高閑吾本意 ~ 高尙하고 閑暇로움 나의 뜻이기에

吟賞自忘歸 ~ 글 읊고 景致 구경하느라 돌아가기도 잊었네.

 

 

 

​​(65) 次無爲子韻(차무위자운) : 無爲子를 따서

 

承恩謝病還仙洞 ~ 은혜 입어 으로 사직하고 仙洞으로 돌아오니

澤雉生涯未足貧 ~ 못에 사는 꿩 같은 生涯 가난하다하기엔 充分치 않네.

開合印家誠世幻 ~ 관아에 종사함은 참으로 世上 허깨비

起居泉石是吾眞 ~ 自然起居함이 나의 참이라네.

雲門不見賓來往 ~ 구름 덮인 山門에 손님 往來 보이지 않고

腰帶那知禮屈伸 ~ 허리띠를 어찌 에 따라 펴고 굽힘을 알리오.

睡到午時無喚覺 ~ 졸다가 낮이 되어도 불러 깨우는 이 없건만

臥看宗事正泥塵 ~ 누워서 宗事를 돌봄은 바로 진흙탕 먼지로다.

 

 

 

(66) 次嵩師韻(차숭사운) : 스님의 시운을 빌려 

 

山雨絲絲濕翠嵐 ~ 실 같은 비 푸른 남기(嵐氣) 젖고

未詢禪味戀難堪 ~ 의 맛 물어보지 못하니 그리움 감당하기 어렵네.

何當出定携去 ~ 언제쯤 禪定에서 벗어나 지팡이 잡고 떠나서

煮茗相傾月下談 ~ 끓여 서로 기울이며 달빛 아래서 이야기 할까.

 

* 남기(嵐氣) :   무렵에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

 

 

 

(67) 虛樓待月(허루대월) : 텅 빈 樓閣에서 달을 기다리며

 

獨坐虛樓待月生 ~ 텅 빈 에 홀로 앉아 달뜨기 기다리니

泉聲松籟正三更 ~ 샘물 소리 솔바람은 바야흐로 三更이네.

待到待窮無待處 ~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기다림마저 없는 곳

寒光如晝滿山明 ~ 차가운 빛 대낮같이 가득 밝아오네.

 

 

 

(68) 天壇祝釐(천단축리) : 天壇에서 祝壽하다

 

天賦忠誠不自忘 ~ 하늘이 賦與하신 忠誠 스스로 잊지 못해

爲君禮象天壇月 ~ 임금 위해 를 올리는 天壇의 달밤.

潛心默禱俯臨昭 ~ 마음 내리고 말없이 祈禱하니 밝게 굽어보시기에

踧踖不知寒立雪 ~ 공손恭遜한 마음으로 눈 위에 서서도 추운 줄도 모르네.

 

 

 

(69) 淸平洞盤石上見寺僧欣迎拗體(청평동반석상견사승흔영요체) : 淸平洞 盤石에서 스님들이 반갑게 맞이함을 보고

 

玉露凄凄艶菊叢 ~ 이슬 쓸쓸한데 菊花떨기 어여쁘고

一筇袞袞歸來容 ~ 지팡이 하나로 돌고 돌아 돌아온 모습.

琉璃澗道十五里 ~ 透明한 시냇물 길 十五 里

錦繡秋風千萬峯 ~ 비단인 千萬峯에 가을바람.

飛瀑龍潭下雲衲 ~ 瀑布水 나는 龍潭으로 구름 속 스님들 내려와

掃塵盤石邀萍蹤 ~ 먼지 쓴 너럭바위에서 定處 없는 나를 맞아주네.

多情猿鶴喜我至 ~ 多情한 원숭이와 도 내가 到着함을 기뻐하며

欲左欲右隨重重 ~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겹겹이 따르네.

 

 

 

(70) 淸平述懷(청평술회) 1 : 청평산에서 마음에 품은 생각

 

退棲幽興孰齊肩 ~ 물러나 사는 그윽한 興趣 어디에도 비견比肩할 바 못되는데

獨自逍遙道自然 ~ 홀로 逍遙하니 自然스러워라.

十笏房中消白日 ~ 세 칸 房中에서 하루를 보내고

數株松下賦淸篇 ~ 몇 그루 소나무 아래에서 맑은 를 짓는다.

旣爲萬壑風雲主 ~ 이미 萬 個 골짜기 風雲主人이 되었으니

剩得千峯雪月權 ~ 千 個 봉우리 눈과 달을 누리는 權利를 얻었네.

若使士林知此事 ~ 萬若 士林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幾多爭疏九重天 ~ 얼마나 많이 대궐大闕上疎를 다투어 올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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