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登江中孤嶼贈白雲先生王迥(등강중고서증백운선생왕형) : 맹호연(孟浩然)
강 중간에 있는 섬에 올라 백운선생 왕형에게
悠悠淸江水(유유청강수) : 강 위의 푸른 물결 맑고 끝도 없더니
水落沙嶼出(수락사서출) : 강물이 줄어들자 작은 섬과 모래밭이 드러났는데
回潭石下深(회담석하심) : 바위 밑을 돌아 흐르는 물은 바닥을 볼 수 없고
綠篠岸傍密(녹사안방밀) : 가늘고 푸른 대는 강기슭 따라 빽빽하게 자라고 있네.
鮫人潛不見(교인잠불견) : 교인이 잠시 물속에 숨어 볼 수 없어 그런지
漁父歌自逸(어부가자일) : 어부가 노랫소리 편안하고 느긋한데
憶與君別時(억여군별시) : 그대와 헤어지던 날을 생각해보니
泛舟如昨日(범주여작일) : 배를 띄운 것이 마치 어제 일 같네.
夕陽開晩照(석양개만조) : 저녁놀 비스듬히 온 세상을 비출 때
中坐興非一(중좌흥비일) : 섬 위에 앉아 보는 즐거움 끝이 없는데
南望鹿門山(남망녹문산) : 남쪽으로 집이 있는 녹문산을 바라보다가
歸來恨如失(귀래한여실) : 이별의 아쉬움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네.
* 江中孤嶼(강중고서) : 맹호연의 집 간남원(澗南園)은 양양(襄陽) 교외의 현산(峴山) 부근에 있었는데,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강(漢江)이 흐르고 있었고, ‘孤嶼(고서)’는 강에 있었던 작은 섬을 가리킨다.
* 悠悠(유유) : 끝없이 너른 것을 가리킨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모습을 가리킨다.
* 沙嶼(사서) : 백사장과 작은 섬을 가리킨다. 보통은 작은 모래톱을 가리킨다.
* 綠篠(녹소) : 푸른빛 도는 세죽(細竹)을 가리킨다. ‘傍’을‘邊’으로 쓴 자료도 있다.
* 鮫人(교인) : 전설에 나오는 바다 밑에 사는 괴인 또는 인어(人魚)를 가리킨다. 장화(張華)가 《박물지(博物誌)》에서 ‘南海水有鮫人, 水居如魚, 不廢織績, 其眼能泣珠(남쪽 바다에 있는 교인은 물속에서 고기처럼 살았는데 사람들처럼 옷을 지어 입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진주가 되었다).’라고 했다.
* 自逸(자일) : 몸과 마음이 조용하고 편안한 것을 가리킨다. ⟪시경(詩經)⋅소아(小雅)⋅시월지교(十月之交)⟫에서 ‘天命不徹, 我友敢效 我友自逸(만약에 천명이 주나라 조정에만 있다면/편안함을 구하는 내 벗을 배우지 않겠노라)’이라고 했다.
* 中坐(중좌) : 연회 중간을 가리킨다. 좌중(座中)을 가리킨다.
* 鹿門山(녹문산) : 후베이(湖北) 양양(襄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후한(後漢)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가 약재를 채취하며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은자들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두보(杜甫)는 「冬日有懷李白」이란 시에서 ‘未因乘興去, 空有鹿門期(흥이 나야 기꺼이 길을 떠날 텐데/녹문산의 기약에 허공에 떴네)’라고 했다. ‘如’를 ‘相’으로 쓴 자료도 있다.
제목에 나오는 왕형(王迥)이란 인물은 백운선생이란 호를 가진 진(晉)나라 때 고사(高士)로 양양(襄陽)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며 채취한 약재를 팔아 살았던 사람인데,
아래 맹호연의 또 다른 시에서 보는 것처럼 두 사람이 인가를 떠나 한가로운 삶을 살며 긴밀히 교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閑歸日無事(한귀일무사) : 집으로 돌아온 뒤 나날이 일이 없어
雲臥晝不起(운와주불기) : 구름 속에 누워서 한낮까지 빈둥댄다.
有客款柴扉(유객관시비) : 누군가 찾아와 문이라도 두드리면
自云巢居子(자운소거자) : 스스로 숨어 사는 사람이라 말하네.
居閑好芝朮(거한호지출) : 느긋하게 지내며 영지와 백출을 좋아하여
采藥來城市(채약래성시) : 약재를 채취해서 마을로 내려가곤 하는데
家在鹿門山(가재녹문산) : 살고 있는 집은 녹문산에 있지만
常游澗澤水(상유간택수) : 언제든 강과 호수의 물을 찾아 즐기네
手持白羽扇(수지백우선) : 손에는 새 깃을 모아 만든 백우선 들고
脚步靑芒履(각보청망리) : 집 나설 땐 풀로 엮은 신발을 신고
聞道鶴書徵(문도학서징) : 조정에서 부른다는 말이라도 들은 날은
臨流還洗耳(임류환세이) : 물가로 가서 두 귀를 깨끗이 씻어버리네
-맹호연(孟浩然)의 시 「백운선생왕형견방(白雲先生王迥見訪)」 전문-
◈ 맹호연孟浩然[689~740]
당나라 때 시인으로 본명은 확실하지 않으며 자가 호연(浩然)이고 양주(襄州) 양양(襄陽) -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양양(襄陽)사람이다. 맹자의 33대손으로 알려진 그를 사람들이 맹양양(孟襄陽)이라고 불렀는데, 벼슬을 살지 않은 그를 맹산인(孟山人)으로 부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절의를 좋아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좋아했으며 시를 잘 지었다. 나이 마흔에 장안으로 가서 현종(玄宗)에게 시를 지어 바쳤으나‘不才明主棄(재주가 없어 밝으신 임금님께 버림을 받고)’란 구절을 본 현종이 ‘卿自不求仕, 朕未嘗棄卿(그대 스스로 벼슬을 구하지 않았고/짐도 일찍이 경을 버린 적이 없다)’라고 하면서 기용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였다. 당대 산수 전원 시파의 대표로 불리지만 초기에는 정치시와 변새유협시를 많이 썼다. 시는 2백여 수가 전하는데 대부분 산수를 돌아보며 쓴 작품들이다. 왕유(王維)와 함께 왕맹(王孟)으로 병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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