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별방태위묘(別房太尉墓) - 두보(杜甫)
방태위의 무덤을 떠나며
他鄕復行役(타향복항역) : 타향에 또 먼 길 떠나며
駐馬別孤墳(주마별고분) : 말 세우고 외로운 무덤에 이별을 고하네.
近淚無干土(근누무간토) : 눈에 가까이 흐르는 눈물 막을 흙이 없고
低空有斷雲(저공유단운) 낮은 하늘엔 조각구름만 떠있네.
對棋陪謝傅(대기배사부) : 바둑을 둘 때면 사태부(謝太傅)를 모신 것 같았고
把劍覓徐君(파검멱서군) : 칼을 잡고 서국(徐國)의 임금을 찾아온 듯
唯見林花落(유견림화낙) : 오직 보이는 것은 숲 속에 꽃잎이 떨어지고
鶯啼送客聞(앵제송객문) : 꾀꼬리 울어 나그네를 전송하는 소리 들릴 뿐.
[通釋] 이곳 낭주(閬州)에서 타향살이하다 또 성도로 먼 길을 떠나면서 잠시 말을 세우고 외로운 방관의 무덤에 들러 조문을 한다. 안타까운 그대 생각에 무덤가에서 눈물을 흘리니 우는 자리 가까운 곳에는 마른 땅이 없고 낮게 깔린 하늘에는 조각구름만 떠 있다. 살아 있을 때 방태위는 내가 뫼시고 바둑을 둘 때면 마치 사안과 같은 인격이었다. 나를 알아주셨기에 옛날 계찰이 서군에게 들러 그의 무덤에 칼을 걸어두고 갔듯, 돌아가신 방태위를 잊지 못해 그의 무덤에 와 있다. 그의 무덤은 쓸쓸하게 아무도 없어 숲속에 지는 꽃만 보이고 나그네를 전송하는 꾀꼬리 울음소리만 들린다.
[解題] 이 시는 두보(杜甫)가 낭주(閬州)에서 성도(成都)로 돌아갈 때 쓴 것이다. 엄무(嚴武)의 도움으로 성도에 머물렀던 두보는 엄무가 입조하면서 잠시 성도를 떠났는데, 광덕(廣德) 2년(764) 엄무가 다시 성도로 돌아오자 두보 역시 성도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낭주(閬州)에 있었던 두보가 봄에 성도로 돌아오면서 이 시를 지었는데, 지기(知己)에 대한 우정이 잘 드러나 있다.
마지막 구절은 쓸쓸한 무덤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방관의 장자(長子)는 두 눈이 멀었고 첩 소생의 자식은 아직 어려, 방태위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무덤이 적막했다고 한다. 마지막 구절은 그런 정황을 나타낸 것이다. ‘孤墳(고분)’이라는 표현이 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서로 조응(照應)하면서 재상까지 지낸 인물의 쓸쓸한 무덤 분위기를 전해준다.
* 房太尉(방태위) : 방관(房琯)을 가리킨다. ≪舊唐書(구당서)≫에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자(字)는 차율(次律)로 하남인(河南人)이다. 현종이 안록산의 난으로 촉(蜀)으로 피난갈 때 재상이 되었다. 숙종(肅宗) 건원(乾元) 원년(元年) 6월, 진도사(陳濤斜)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빈주자사(邠州刺史)로 폄직되었다.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 보응(寶應) 2년 특진되어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는데, 객지에서 병이 들어 낭주(閬州: 지금의 泗川省 閬州縣)의 절에서 광덕(廣德) 元年(763) 8월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로 사후 태위(太尉)로 추증(追贈)되었다. ≪國史補(국사보)≫에 “재상 가운데 장곡강(張曲江:張九齡) 이후 방태위와 이양공(李梁公)이 덕이 두터웠다고 말한다.[宰相自張曲江以後 稱房太尉李梁公爲重德]”라고도 하였다. 명재상이었을 뿐 아니라 두보와 동향(同鄕) 지기(知己)로 포의(布衣) 때부터 우정을 나눈 사이이며 정치적 동지이기도 하다. 두보는 방관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갈 수 있었고, 방관을 구하려다 숙종에게 죄를 얻어 화주(華州)로 폄직(貶職)된 적도 있었다. 두보와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눈 벗이 바로 이백(李白)과 방관(房琯)으로 이 둘과 관계된 시가 두보 시에 자주 보인다.
* 他鄕復行役(타향부행역) : 이때 두보(杜甫)가 낭주(閬州)에서 성도(成都)로 돌아갈 때였다.
* 近淚無乾土(근루무건토) : 시인이 눈물 흘리는 무덤가의 주변 가까운 곳은 눈물에 젖어 마른 땅이 없을 지경이라는 말이다.
* 低空有斷雲(저공유단운) : ‘低空(저공)’은 낮게 깔린 하늘, ‘斷雲(단운)’은 조각구름을 말한다.
* 陪謝傅(배사부) : ‘謝傅(사부)’는 남조(南朝)의 사안(謝安)을 가리킨다. 살아 있을 때 사안처럼 도량이 넓고 침착했던 방태위의 인품을 드러내주는 말이다. ≪晉書(진서)≫ 〈謝安傳(사안전)〉에 보이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동진(東晉)이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 비수(淝水)에서 대전(大戰)을 벌일 때 사안(謝安)은 나그네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동진군의 승전보가 전해졌는데도 사안은 전혀 희색을 띠지 않고 침착하게 있었다는 일화를 인용하였다. 사안(謝安)이 사후(死後)에 태부(太傅)로 추증(追贈)되었으므로 사부(謝傅)라 하였다.
* 把劍覓徐君(파검멱서군) : 오(吳)나라 계찰(季札)의 고사인 계찰괘검(季札掛劍)을 인용한 것이다. ≪史記(사기)≫ 〈吳太伯世家(오태백세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계찰이 처음 사신을 갈 때 북으로 서국(徐國) 임금에게 들렀다. 서군(徐君)이 계찰의 칼을 좋아하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 계찰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으나 상국(上國)으로 사신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줄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서국(徐國)에 들렀을 때는 서군(徐君)이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이에 마침내 자신의 보검(寶劍)을 풀어 서군(徐君) 무덤가의 나무에 묶어두고 떠났다.[季札之初使 北過徐君 徐君好季札劍 口弗敢言 季札心知之 爲使上國未獻 還至徐 徐君已死 於是乃解其寶劍 繫之徐君冢樹而去]” 여기서는 계찰(季札)을 자신에 비유하여 죽은 후에도 방태위(房太尉)를 잊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을 드러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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