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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詩/涅槃頌

보화(普化)선사 열반송(涅槃頌)

by 산산바다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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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화(普化)선사 (?~861) 열반송(涅槃頌)

 

 

제발로 관에 들어가 입적 맞은 보화(普化)선사 

보화 스님이 하루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승복을 구걸했다. 사람들이 모두 승복을 갖다 주었지만, 보화 스님은 웬 일인지 모두 필요 없다.하고 받지 않았다. 임제선사는 원주를 시켜 관()을 하나 사 오게 했다. 그러고는 보화 스님에게 내가 그대를 위하여 승복을 한 벌 만들어 놓았소.” 그러자 보화스님은 기분 좋게 곧바로 관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가 내일 내가 동문(東門) 밖에서 세상을 하직하겠다.”고 선언했다

 

 

임제의현(臨濟義顯, ?-- 866)의 도반인 보화(普化) 선사는 입적에 이르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관 속에 들어가 열반을 맞이했다. 이 장면이 <전등록>은 물론 <임제록> 37단에도 나온다

이 선어록에 따르면, 보화 스님이 하루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승복을 구걸했다. 사람들이 모두 승복을 갖다 주었지만, 보화 스님은 웬 일인지 모두 필요 없다.하고 받지 않았다. 임제선사는 원주를 시켜 관()을 하나 사 오게 했다. 그러고는 보화 스님에게 내가 그대를 위하여 승복을 한 벌 만들어 놓았소.” 그러자 보화스님은 기분 좋게 곧바로 관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가 일 내가 동문(東門) 밖에서 세상을 하직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날 사람들이 동문으로 구름처럼 몰려 가보니 폭삭 속은 거짓말이었다. 다음 날엔 또 남문 밖에서 세상을 하직할 것이라고 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가 보니 역시 또 부도수표를 발행한 것이었다. 이러기를 3, 4일 째 되는 날엔 그 누구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보화 스님은 혼자 관 속으로 들어가 길 가는 사람에게 뚜껑에 못질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소식이 즉시 시내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다투어 가서 관 뚜껑을 열어보았다. 관을 열어보니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몸 전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다만 공중에서 요령소리만 달랑달랑 울릴 뿐이었다.

선사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실 무근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사실이 과장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시사 하는바가 분명히 있다. 보화선사 이야기는 ()’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

 

 

일제강점기 장암사 연담을 은사로 득도하고 유점사 동선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승려.

성은 설씨(薛氏), 속명은 태영(泰榮), 법호는 석우(石友). 경상남도 의령 출신. 어려서부터 장자방(張子房)과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매우 좋아하였고,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의서(醫書)와 노장철학(老莊哲學) 등을 공부하였으며,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30세를 전후하여 우연히 산천을 구경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 7, 8년 동안 방황하다가 부산 범어사(梵魚寺)에 이르러 보조 지눌(普照知訥)수심결(修心訣)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대도(大道)가 불법문중(佛法門中)에 있음을 느끼고, 1912년금강산의 장안사(長安寺)로 가서 연담(蓮潭)을 은사(恩師)로 출가하였다. 그 뒤 유점사(楡岾寺)의 동선(東宣)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30년 동안 정진하여 대오(大悟)하였다. 그 뒤 금강산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성품이 몹시 청렴하여 제자들이 신도들에게서 얻어오는 시물(施物)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으며, 제자들을 지도할 때는 위의(威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엄격히 다스렸다.

1938년 법제(法弟)인 상월(霜月)에게 금강산과 인연이 다하였으니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제의하여, 함께 지리산의 칠불암(七佛庵)에서 7년 동안 안거(安居)하였는데, 이때 해방이 되었고 금강산은 이후 북한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로 경상남도 사천(泗川)의 다솔사(多率寺)에 머물다가 다시 남해도(南海島)로 들어가 해관암(海觀庵)을 창건하였다.

해인사(海印寺)에 있다가 1954년 정화불사 때에는 조계종(曹溪宗)의 초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어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을 종식시키고 통합종단(統合宗團) 구성을 위해 힘을 기울이다가 1958215일에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84, 법랍 45세였다. 다비(茶毘) 후 정골(頂骨) 하나가 나와 동화사의 비로전(毘盧殿) 앞에 부도와 탑비를 세워 봉안하였다.

 

 

보화(普化)선사 오도송(悟道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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