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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涅槃頌

월산(月山)선사 (1913~1997) 열반송(涅槃頌)

by 산산바다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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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산(月山)선사 (1913~1997) 열반송(涅槃頌)

 

 

廻廻一生 :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未移一步 :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本來其位 : 본래 그 자리는

天地以前 : 하늘 땅 보다 먼저이니라.

 

 

월산은 1913(癸丑) 5월 초하루 함경남도 신흥군 동상면 원평리에서 부친 경주 최씨 흥규 거사와 모친 노씨의 3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종열. 태어날 때부터 상호(相好)가 인자하고 미목(眉目)이 빼어날 뿐 아니라 기품 또한 남달랐다.

월산이 태어난 곳은 절이 많았던 천불산 부근의 사하촌인지라 자연 불심이 돈독했던 부모님의 자애로운 훈육 속에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서숙(書塾)과 학교를 마치고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접했으나 더 이상 진전이 없자 청년기에는 고향을 떠나 망국의 한을 안고 일본과 중국을 돌며 인생에 대한 고민과 방황, 그리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월산은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가치 있는 인생은 어떻게 일궈가야 하는 것인지 청년 월산은 혼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명상에 젖곤 했다.

1944년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석왕사에서 만난 금오 화상을 따라 도봉산 망월사로 온 월산은 금오 화상을 은사로 득도 출가했다.

월산의 그릇을 단박에 알아본 금오 화상의 배려로 장년의 나이에 인천의 스승이 되는 길로 접어든 이후 치열한 구도의 길로 뛰어 들었다.

덕숭산으로 달려가 만공 화상을 만난 월산은 그곳에서 만공 화상의 태산 같은 무게와 선의 깊이에 감복, 기필코 참선정진을 통해 성불하리라는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만공 화상에게서 받은 이뭐꼬화두를 월산은 평생 놓지 않았다. 금오 화상의 보임처였던 보길도에서 비룡 등과 용맹정진을 거듭한 그는 다시 육지로 돌아와 전강 화상의 회상에서 선을 참수하는 한편 속리산 법주사와 태백산 각화사,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를 두루 거치며 한암 등 당대의 선지식을 만나 지도를 받으며 본분사(本分事) 해결을 위한 참구를 거듭했다.

특히 경북 청도의 적천사 토굴에서 수행정진을 거듭했는데, 이곳에서의 수행을 통해 10여년간 도를 구하는 납자로서의 방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중답게 살아보자.’ 월산은 1948년에는 뜻 맞는 도반이었던 청담 향곡 보문 자운 성철 혜암 등과 함께 문경 봉암사에서 결사 수행 중 공주청규(共住淸規)를 만들어 백장선사 등 옛 선지식들의 가르침에 따라 잘못된 구습을 혁파하고 새롭고 올곧은 승풍을 일으키기 위해 힘썼다.

납자들 스스로 청규를 제정해 옛 조사들의 길을 재현해낸 것이니 정신적으로는 불교 정화의 기틀이 여기서 싹트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한국전쟁 전후에는 부산 선암사와 양산 천성산 내원사 등지에서 공부했다.

1953년 은사 금오 화상을 모시고 종단정화불사에 앞장 서 비구종단의 초석을 놓는 일에 정진했고, 참선정진 중에도 시절인연이 닿아 종단을 위해 위법망 구해야 할 일이 생기면 기꺼이 총무원장과 교구본사 주지 등 소임을 맡아 헌신하기를 사양치 않았다. 그렇지만 종단의 대소사를 보는 가운데에서도 행역선(行亦禪) 좌역선(坐亦禪)의 자세로 안살림 수행에 간단이 없었으니 이사(理事)에 두루 통찰력을 보였다.

1968년 가을 어느 날, 은법사(恩法師) 금오 화상이 입적을 앞두고 문도들을 법주사 사리각으로 불러 모았다. 한 참 동안을 묵묵히 침묵으로 보낸 화상이 이윽고 문도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더니 문득 오른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에 맞상좌 월산이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고 자신의 경계를 표현한 글을 지어 올렸다.

忽覺本來事 : 참모습 깨닫고 보니

佛祖在何處 : 부처와 조사 어느곳에 있는가.

轉裏藏乾坤 : 몸 속에 하늘과 땅 본래 감추어 있으니

身獅子吼 : 몸을 뒤쳐 사자후를 하노라.

不立 : 세우지 않고

不捨 : 버리지 않고

不休 : 쉬지 않도다.

글을 읽은 금오 화상은 월산이 이미 개안(開眼)의 경계에 이르렀음을 알고, “모든 일을 월산에게 맡기노라.”라며 인가를 발표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가르침을 원하는 월산의 요청에 무념을 종으로 하는 이 일을 너에게 부촉하노라(無念爲宗此事付汝).”라고 재차 전법의 의지를 밝혔다.

이윽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 누워 있던 금오 화상이 문득 벽에 걸린 불자를 가리키며 월산을 돌아봤다. 자신의 법통이 월산에게 이어졌음을 거듭 증명하는 전법의 순간이었다.

* 월산(月山)스님 오도송(悟道頌)

 

월산이 이뤄낸 독특한 가풍은 경허 만공 금오 등 앞서간 스승들의 날카롭기는 하지만 일면 거칠거나 다소 분망했던 점들을 정제하고 소화해서 마침내 일체의 군더더기도 남기지 않은 것이었으니 그의 준수한 외모만큼이나 원만하고 뚜렷한 선지(禪旨)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날카로운 선기와 들짐승처럼 과격한 파격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소화한 후 나타나는 경지, 그것은 바로 중도(中道)였으니, 월산은 이 중도라는 완성된 모습으로 자신의 가풍을 세간에 드러낸 것이다.

 

이는 곧 밝음이 인이 되고 어둠이 연이 되어 밝음이 없어지면 그것이 곧 어둠인 것이니, 밝음으로 어둠을 나타내고 어둠으로 밝음을 나타내서 오고감이 서로 원인이 되게 하여 중도의 진리를 이루게 해야 한다는 육조 혜능의 열반유교(涅槃遺敎)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것이리라.

1996년 봄부터 미질을 보인 월산은 비록 쇠한 몸이었으나 옛날과 다름없는 온화한 표정과 언변으로 후학 양성에 박차를 가했으니, 본분종장(本分宗匠)의 위의(威儀)를 성성하게 드날리는 그의 회상에 제방의 납자들이 다투어 운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7년 가을, 노환이 위중해지자, 임종게라도 남겨주기를 간청하는 시자들의 요청이 잇따랐다. 월산은 마지못해 한편의 간결한 게송을 남겼으니, 근세 고승들이 남긴 열반송 중 백미로 손꼽히는 그의 임종게는 이러하다.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본래 그 자리는

하늘 땅 보다 먼저이니라.

廻廻一生

未移一步

本來其位

天地以前

3일 후인 96일 밤 830분 월산은 토함산의 고요 속에 불국선원 염화실에서 만중생을 향해 적멸의 진수를 일깨워 보이는 마지막 사자후를 토해냈다. 월산(月山)이 입적하던 날엔 흰 구름 얼기설기 떠도는 하늘이 몹시도 해맑았다. 사람들은 큰스님 법덕이 높아 가시는 날이 이렇듯 청량한 것이라고들 했다.

1997년 세수 86, 법랍 55세로 입적

 

​■ 月山스님 연보

191255일 함경남도 신흥군 동상면에서 출생

1943년 부친 사망 후 금오 화상과 첫 인연을 맺음

1944년 망월사에서 춘성 화상의 안내로 금오 화상을 은사로 득도

1948년 문경 봉암사에서 청담 성철 등과 수행결사

1968년 금오 화상으로부터 전법

1974년 불국사 주지에 임명돼 불국사 중창불사 및 불국선원 개원

1986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추대

1988년 재가자 선수행을 위해 경주시에 부인선원 개원

1988년 법보신문 창간

1997년 세수 86, 법랍 55세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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