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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涅槃頌

태고보우(太古普愚) 열반송(涅槃頌)

by 산산바다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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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보우(太古普愚)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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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고보우(太古普愚)국사(1301~1382) 열반송(涅槃頌)

 

 

人生命若水泡空 : 삶이란 물거품과 같나니

八十餘年春夢中 : 팔십 평생이 일장춘몽이로다.

臨路如今放皮袋 : 이제 길을 떠나며 가죽 껍데기를 벗자니

一輪紅日下西峰 : 둥그런 붉은 해는 서산에 떨어지노라

 

사람의 생명은 물거품처럼 헛되어

팔십 여 년이 한바탕 봄꿈 속이었네.

임종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에서 석방되어

한 둘레 붉은 해처럼 서쪽 봉우리로 지리라.

 

사람 목숨이 물거품이니

80여년이 봄꿈이라.

죽음에 이르러 가죽포대 버리니

붉은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네.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충렬왕 27)~1382(우왕 8). 고려 말기 권문세족인 홍주홍씨(洪州洪氏) 출신으로, 아버지는 연()이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13세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지산파(迦智山派)에 속하는 회암사(檜巖寺)의 광지선사(廣智禪師)에게 출가했다.

19세 때에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話頭)를 참구했으며, 화엄학에 정진해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했다. 그러나 경전 공부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선()의 수행으로 돌아가 정진하기 위해,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 들어갔다가 감로사(甘露寺)에서 고행했다.

1337(충숙왕 복위 6) 송도 전단원(栴檀園)에서 참선하여 이듬해 정월 크게 깨달았다. 그 뒤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 있다가 1341(충혜왕 복위 2) 중흥사 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짓고 그곳에 머물면서 태고암가를 지었다.

1346년 중국의 선승에게 인가를 받으러 원()에 건너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았다. 원에 가서 2년간 머물렀는데, 원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에게 반야경을 강설할 정도로 환대를 받았다.

1348년 귀국 후 광주(廣州) 미원장(迷元莊)에 우거하면서 친척을 모아 일가를 이루고 공민왕에게 요구하여 현()으로 승격시키고 감무(監務)를 설치하게 했다.

1356(공민왕 5) 왕사(王師)로 책봉된 뒤 조정에 별정직 기관인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승직의 임명권을 장악했는데, 이는 종래의 교단운영 원칙이 무너졌음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고려의 전통적인 오교양종(五敎兩宗)의 교단체제도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그는 구산선문의 통합을 건의했으며, 수도를 남경(南京漢陽)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신돈과의 권력다툼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돈이 집권하자 보우는 사승(邪僧)으로 지목받고 속리산에 금고 당했다.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國師)로 봉한 뒤 영원사(營原寺)에 머물기를 청했으나 병을 핑계삼아 사양했다.

1381(우왕 7) 양산사(陽山寺)로 옮겼는데 이때 우왕이 다시 국사로 봉했다. 1382년 소설사(小雪寺)로 돌아와 죽었다.

 

사상

그는 먼저 시대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관찰할 것을 주장하고, 당시의 구산선문에서의 파벌싸움이 심각함을 시대의 큰 폐단으로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구산을 일문으로 통합할 것을 주장하고 선문의 규칙도 일원화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구산선문을 넘어 전체 불교 교단의 문제로 확대되지 못했고, 당시 불교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당시 국가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던 권문세족과 같은 입장에 서서 그들의 후원을 받으며 농장을 확대하고 신돈과 대립하기도 했다. 그는 사상적으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입장을 취했다. 즉 임제종의 간화선을 내세워 선의 지적 이해를 철저히 배격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천편일률적으로 무자화두만을 참구하도록 했다. 보우가 주장하는 선의 실천방법은 처음부터 선문의 쇄락(灑落)한 활구(活句), 즉 화두만을 철저히 참구할 것이며, 만일 그것에서 소득이 있으면 본분종사(本分宗師)를 찾아가 확인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화두를 참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지해도 용납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거의 모든 경우에 내세우고 있었던 무자와 같은 화두에는 지해나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용납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 휴정(休靜)의 제자들에 의해 보우의 법통이 크게 강조되었다. 저서로 태고화상어록 太古和尙語錄·태고유음 太古遺音등이 있다.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 太古普愚國師(태고보우국사) 禪詩(선시)

* 제57조 태고보우(太古普愚)

* 태고보우(太古普愚) 오도송(悟道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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