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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 70조 율봉 청고(栗峰靑杲)

by 산산바다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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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0 율봉 청고(栗峰靑杲) (1738~1823)

 

 

조선 승려 호는 율봉(栗峰). 자는 拈花. 속성은 백씨. 순천사람.

1756년에 19세 되던 해 無垢大俊에게 출가하다. 雲月淑敏에게 구족계를 받고 환암탁계(喚庵卓戒)에게서 배우고 청봉거안(靑峰巨岸)에게 법을 받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금강경을 연구하다. 나한을 놀리게 하였으며 송광사 통도사에서도 신기한 일이 있었다. 율봉은 화엄을 실천하기 위하여 금강산은 지상정토이니 이곳이 법을 천명할 곳이라며 마하연에서 불법을 설파하여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그것이 오늘날 불가에서 한 맥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율봉문하이다. 선사의 도력이 뛰어나 활불이 세상에 나왔다고 칭송하였다. 순조 2386세로 입적했다.

 

율봉스님이 직접 쓰신 서첩이 있다고 하나 구해보지는 못하고 한국불교총서에서 그의 단편적인 기록만 찾아보았다. 三峰集(화악당 삼봉스님. 속명 지탁. 1750-1839)遺忘錄(應雲空如의 저술)에 그의 명호(名號)가 다소 보인다.

 

삼봉집 삼봉스님의 행장에

스님은 낮에는 밭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단정히 좌선을 하였다. 홀연히 한 두타(頭陀)가 지나가다가 보고 이르기를 그대의 기상을 보니 가히 불가(佛家)의 동량이 될 터인데 어찌 이렇게 막혀 있느냐?” 스님께서 이르기를 도에 뜻은 있습니다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두타가 이르기를 보개산 석대암 율봉 청고 대사가 법을 설하고 있는데 법중에 대중이 구름같이 모여 있다. 그대는 가겠는가?” 하였다. 스님은 바로 가서 참배하고 입문하였다. 율봉스님이 그를 보고 이르기를 나의 도를 전할이가 왔구나.” 방장에 들어 어루만지며 인가하였다. 몇 년을 머물다 율봉스님이 금강산 마하연으로 옮겨가자 스님도 함께 따라갔다.

師晝則事田 夜則端坐忽有一頭陀 過見曰觀子氣像 可作佛家棟樑 何滯於此師曰果有志於道 而不知何往 頭陀曰寶蓋山石臺庵 有栗峰靑杲大師說法法衆雲集 汝可以往矣 師卽往參 方才入門 栗峰見之曰 傳吾道者來矣八方丈 撫而印之 留數年 栗峰移金剛山摩訶衍 師亦從焉 (상봉집 행장중에서)

 

하루는 율봉스님이 스님께 일러 가로되 그대의 평소 몸가짐을 보니 그윽이 부처와 조사가 서로 합에 있거늘 어찌 산에 머물지 않고 가려하느냐?” 스님이 이르기를 “‘누가 감히 산에 머문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율봉이 가로되 우리 부처님의 본의는 그렇지 않다. 귀중한 것은 유통하고 인연들을 교화하는데 있는데 어찌 바퀴를 부수고 공산을 지키느냐? 그러면 초목이 함께 부패하리니, 다시 고해에 자비의 배를 몰아 피안으로 인천을 교화해야할 것이다.” 하였다.

一日栗峰謂師曰 觀子日用全機 暗與佛祖相合 何不住山去 師曰某甲何人 敢言住山 栗峰曰不然吾佛本意 貴在流通化緣 豈可守折軸於空山 與草木俱腐 便可駕慈舟於苦海 化人天於彼岸 (상봉집 행장중에서)

 

또한 金剛山楡岾寺說禪堂重建記(1825. 삼봉집 62)摩訶衍重建記 (1832. 삼봉집 78)에도 그의 이름이 보인다. 설선당은 율봉스님이 혈기 왕성한 시절에 제자 수 십 명과 함께 용맹정진 하였고 십 수 년 화엄경을 설하였던 곳이었으나 그가 마하연으로 옮기고 난 뒤에는 오래간 방치 되었던 것 같다. 그의 제자 월송선사가 이곳을 돌아보았을 때가 1824년 이었는데 이해는 율봉스님이 돌아 가신지가 일 년 밖에 않 되었는데도 설선당이 폐허된지 오래되어 1824년에 역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1825(을유)년에 중건되었다고 했다.

 

摩訶衍重建記

몇 번이나 흥폐하며 지나왔던가. 근세에 이르러 율봉스님이 호남에서 이곳으로 왔는데 상수대중이 수백명이었고 화엄의 일승교를 연설하였고 이승을 배우는 이들을 심하게 꾸짖어 대승의 뜻을 여의지 않았다. 안거하신지 십 수년 화연이 다하여 대적삼매에 들었다. 이후 이 암자는 비고 사람이 없어 대들보와 기둥은 어그러지고 섞고 허무러졌다.

 

세속사람들은 선사가 시적(示寂)한 뒤에 사리가 안 나왔다고 수군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시적을 했으면 자취를 보여야지 사리도 안 남겼는데 무슨 선사냐고 비아냥대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해대었다. 율봉선사에 대해 헐뜯는 소리를 들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율사시적게(栗師示寂偈)를 지어 세간의 소리를 잠재웠다.

 

花落有實(화락유실) : 꽃은 지면 열매를 남기고

月去無痕(월거무흔) : 달은 가면 흔적이 없네.

誰以花有(수이화유) : 누가 꽃의 유()를 들어

證此月無(증차월무) : 저 달의 무를 증명하리오.

有無之際(유무지제) : ()와 무()의 경계는   ( 사이제 경계(가장자리))

 

實師之眞(실사지진) : 실로 스님의 진리라오.

彼塵妄者(피진망자) : 진망에 허덕이는 자는

執跡以求(집적이구) : 자취에 집착하여 구하네.

我若有跡(아약유적) : 내가 만약 자취를 남겼다면

豈留世間(기유세간) : 어찌 세간에 머물렀으리오.

妙吉相屹(묘길상흘) : 묘길상은 우뚝 솟아 있고   산우뚝할 흘 우뚝 솟을 흘)

法起峰靑(법기봉청) : 법기봉은 푸르구나.

 

秋史 金正喜(1786~1856)栗師示寂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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