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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 67조 환성 지안(喚醒志安)

by 산산바다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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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성 지안(喚醒志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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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7 환성 지안(喚醒志安) (1664~1729)

 

 

성은 정씨며 춘천사람이다. 현종 5년 갑진(1664)년 강희 3년이며 15세에 출가하였다. 미지산 용문사에서 머리를 깎고 상봉 원정스님께 구족계를 받았다. 17세에 월담 설제 스님께 법을 구하였으며 월담은 그가 대기임을 알고 의발을 미뤄주었다.

 

스님의 법명은 지안이며 춘천 청평사에 머물렀다. 누각아래에 영지가 있었는데 진흙으로 막힌지가 오래되었다. 준설 시에 작달막한 비석을 발견하였는데 그기에 <儒乘冠婦千里來>라고 새겨져 있었다. 해석해 이르기를 유승은 며 관부는 이다. 천리는 이니 志安이 다시 왔다.” 하였다. 그래서 이름하였다. 해남 대둔사에 머물 적에 사시마지를 올리는데 공중에서 세 번 부르는 소리가 성성하게 들렸다. 역시 세 번을 응답하였으므로 마침내 법호를 喚醒(환성)[부를 , 성성할 ]이라 하고 자를 삼낙[세번 대답하다]이라 하였다.

 

스님의 골상은 청정하고 준엄하였으며 음운이 신령스럽게 맑았고 말은 간결하였으며 안색은 온화하였다. 정성을 다하여 내전을 연구하는데 침식을 잃을 정도였다. 27세에 운진스님에 대하여 듣고 사모하여 금산 직지사 설법회에 그를 좇아갔다. 저녁에 설운대사가 경복하여 대중 수 백인에게 말해 가로되 내가 이제 사자좌를 그만두고자한다. 너희들이 예를 다하여 모시도록 하라.” 하고는 다른 산으로 거처를 옮겨 잠복하였다. 마침내 대중에 나아가 횡으로 설하고 종으로 설하며 털끝 실 끝까지 분석하였고 호연지기가 마치 강하의 결택과 같으니, 대중들이 활연히 개오하였다. 이로써 사방의 스님들이 쏠리듯 운집하였다.

 

일찍이 지리산에서 어떤 한 도인의 전언에 스님께서 속히 가셔야겠습니다.”하였다. 과연 몇 일이 지나 화재가 있었다. 금강산 졍양사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하늘에서 심한 큰비가 내리는데 스님이 걸망을 꾸려 바쁘게 나갔다. 산 아래 부잣집에서 스님을 청하였으나 들어가지 않았다. 왜사에서 투숙하였는데 그날 밤 절과 부잣집이 갈라지고 모두 물에 잠겼다.

 

을사년 금산사에서 대법회를 열었는데 대중이 무릇 1500인이나 되었다. 옹정(1664-1729) 7년 기유 66세에 법회의 일로 무고자가 있어 지리산 호남의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며칠 후 풀려나게 되었는데도 도의 신하 누군가가 불가하다고 마침내 탐라(제주도)로 유배되어 도착 후 7, 칠월 칠석에 갑자기 입적하시니, 산이 삼일동안 울었으며 바닷물이 끓고 용솟음치며 삼성의 참서의 징험이 있었다.

  

삼성이란 한라산 위에 석불이 있는데 비문의 뒤 글에 이르기를 삼성이 입적한 곳이니 첫째는 중국의 정법보살이 와서 살다가 입적하였으며 두 번째는 동국의 희응존자가 들어와 살다 입적하였으며 세 번째는 환성종사가 유배되었다가 입적하였다.” 하였다. 오종강요 1권과 문집 3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문인은 30여인이고 세수는 66세 법랍은 51세였다.

 

沿流一段事(연류일단사) : 물 따라 내려 흘러가는 한 조각 일이니,

竟無頭與尾(경무두여미) : 필경 머리와 더불어 꼬리가 없도다.

付與獅子兒(부여사자아) : 사자새끼에게 더불어 부촉하노니

哨吼滿天地(초후만천지) : 사자 울부짖는 소리 천지에 가득하도다.

 

지안 스님은 일생 동안 전국의 산사를 두루 행각하며 교화를 폈다. 언제나 평탄한 길보다는 험난한 길을 먼저 선택했던 스님은 무너지는 담장과 썩은 서까래라도 비만 가릴 수 있는 곳이면 머물렀다. 규모와 상관없이 스님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스님은 영남과 호남은 물론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함경도 등 전국을 대상으로 활동했다. 스님의 이러한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불교도들이 감복했다. 끊이지 않는 정쟁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방황하던 유생들도 스님에게서 화엄학을 공부하며 삶의 길을 모색했다. 이들에게 지안스님은 희망이었다. 무너져 가던 불법이 다시 일어섰다. 핍박과 가난으로 삶의 희망을 잃었단 많은 백성들이 스님을 따랐다.

1725(영조1) 김제 금산사에서 열린 화엄대법회에는 1400여명의 대중이 몰려들었다. 스님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과 존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이 법을 설하면 대중들은 모두 존경과 찬탄으로 스님을 우러러 봤다. 지안 스님의 이런 놀라운 법석들이 거듭되자 사대부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불교가 그리고 스님이 민초들의 희망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당파싸움으로 이골이 난 사대부들의 수완은 놀라웠다. 영조 임금 당시 국정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이 중심이 돼 일으킨 이인좌의 난(1728)에 교묘하게 스님을 엮어 넣었다. 정권을 잡았던 노론세력의 집요한 모함으로 1729(영조 5), 지안 스님은 결국 역모라는 무서운 죄명을 뒤집어쓰고 전라감영에 유폐됐다. 스님의 결백함은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그러나 이들은 스님을 가만두지 않았다. 온갖 구실을 붙여 끝끝내 스님을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조선중후기 외로이 전등의 불씨를 살렸던 스님은 모진 고초를 겪다가 제주 도착 7일 만에 가부좌를 한 채 입적에 들었다. 법랍 51, 세납 66세였다. 그러나 제주도 유배 이후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은 허응당 보우 스님처럼 사대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분석들이 많다.

 

스님이 입적할 무렵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山鳴三日 海水騰沸)”

임종게를 남겼는데 당시 제주도에는 3일 동안 폭우가 그치지 않았다고 전한다.

스님이 적멸에 들었으나, 사대부들의 무서운 눈초리에 누구 하나 스님의 비문을 쓰지 못했다. 결국 스님의 비문은 입적 이후33년이 지난 1762년이 돼서야 작성됐다. 비문을 지은 이조판서 홍계희(1703~1771)는 비문 끝에 훌륭한 대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배 보내 입적케 한 일은 조선의 비극임을 극렬히 통탄한다.”고 애석해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안 스님의 비와 탑은 문손 연담 유일 스님에 의해 두륜산 대둔사(현 해남 대흥사)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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